[이재선 가족의 런던 생활연극기] 제23막 <끝> - 인생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4-12-19   |  발행일 2014-12-19 제40면   |  수정 2014-12-19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는 사람은 누구나 최고…딸에게도 꿈이 생겼다”
드디어 도착한 크라이스트처치. 기념사진을 찍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입장 마감시간이 됐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어린이 박물관에는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인기가 많다. 소영이와 정호는 방패만들기 수업에 참여했다.

런던 지하철 ‘베스널그린’ 역 근처의 빅토리아앤드 앨버트 어린이박물관. 세계에서 가장 큰 어린이 박물관으로 16세기에서 현재까지 인형, 테디베어, 장난감병정, 기차모형, 자동차모형 등으로 꽉 차 있다. 박물관은 2001년부터 무료입장을 실시하고 있다. 소영이와 정호는 영국 전통문양이 들어간 ‘방패 만들기’ 체험을 하고, 재선과 정희는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재선: 내일모레면 콜롬비아로 돌아가는 날이네. 말이 석 달이지, 영국 돌아다니다 보니까 시간 금방이다, 그자?

정희: 너무 계획 없이 와서 고생도 많았지만, 그만큼 추억도 많았고 좋은 시간이었지. 근데….

재선: 근데, 뭐?

정희: (주저하며 말을 꺼낸다) 오빠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영국까지 와서 애들 영어공부 더 못 시킨 게 아쉽기도 해. 사실 요즘 부모들 어학연수니 유학이니 자식을 ‘일류’로 만들겠다고 다들 야단인데 우리만 아무 생각 없이 설렁설렁 시간 보내도 되나 싶기도 하고.

재선: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연다) 정희야, 난 일류니 삼류니, 그렇게 세상이 사람을 위아래로 줄 세우는 거 맘에 안 든다. 니는 내가 어떤 계층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노? 일류? 이류?

정희: 에이, 오빠야 나한테 최고의 일류 남편이지.

재선: 아니, 난 내 스스로 삼류라고 생각한다. 일류 대학 나온 것도 아니고 직업이 대단해서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모 잘 만나서 금 숟가락 입에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니니 일류는 절대 될 수가 없다.

정희: (조용히 듣기만 할 뿐 말이 없다)

재선: 그런데 난 일류가 하나도 안 부럽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는데, 일류만 있으면 무슨 재미고? 이류, 삼류 다양한 사람 속에 내 같은 사람도 있고 해야지. 게다가 난 일류, 이류, 삼류가 수직적, 계층적이 아니라 수평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도 예술성 있는 작품만 있다고 생각해봐라. 극장 금방 문 닫는다. 오락영화도 있고 액션영화도 있어야 예술영화가 살아남는다. 나는 성룡 형님이 알 파치노보다 더 위대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정희: 그래도 세상의 흐름을 아예 무시하고 살 순 없잖아. 지금 당장 한 걸음 늦으면 이후엔 완전히 뒤처질 수도 있어. 부모가 삼류라고 해서 아이들도 삼류로 키운다는 건 말이 안 돼. 세상은 일류만 대접하는데 이상적인 생각으로 아이들 장래까지 한정지을 순 없잖아?

재선: (전에 없던 진지한 표정으로) 스펙평준화현상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유학 보내서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게 만들어 성공하면 다른 부모도 모두 아이들을 유학 보낸다. 또 그중 어떤 부모가 인턴경험과 공모전을 더해서 아이를 일류기업에 보내면 다른 부모도 또 따라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우리 사회에 일류라는 인재가 거기서 거기의 능력을 갖게 되는 거지. 대학원 졸업하고 9급 공무원 준비하는 사회가 과연 건강하냐 이거지. 우리 아이들을 차이가 아니라 차별화된 인재로 키우자는 거지.

정희: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가끔씩 내가 누구랑 사는지 헷갈린다. 평소 이재선답지 않게 ‘뜬금지식인’ 면모를 보이면 자꾸 놀라.

재선: (마치 최면에서 풀리듯 머리를 흔들며) 어, 내가 머라 캤노?



그때, 소영과 정호가 방패 만들기 체험을 마치고 재선에게 돌아온다. 방패를 들고 마냥 신난 정호와 달리 소영은 뭔가 심드렁한 표정이다.



정희: 소영이는 표정이 왜 그래? 방패 만드는 거 별로 재미 없었어?

소영: 아니 뭐, 재미없진 않았는데 그냥 그래. 약간 유치하기도 하고….

재선: 그럼 안 되지. 런던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할 순 없다. 소영이 하고 싶은 것을 말해라.

소영: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아빠, 나 옥스퍼드대학 가보고 싶어!

정호: 에이, 누나! 낼모레면 끝인데 왜 하필 재미없는 학교를 가?

재선: 옥스퍼드라…. 소영이가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영국의 첫 여성 총리 마가렛 대처의 모교기도 하지.

정희: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만약에 소영이가 옥스퍼드 가면 좋겠다. 그럼 간디나 스티븐 호킹 박사랑 선후배 되는 거잖아.

재선: (낄낄 웃으며) 아이고, 안정희, 꿈도 야무지다. 서울대도 아니고, 옥스퍼드? 옥스퍼드가 어디 동네 아 이름이가?

소영: (자존심 상한 듯 발끈하며) 아이 암튼! 가보자니까!



옥스퍼드의 또 다른 명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숍.
여행이 마냥 행복해 보이는 소영이.
영국 여행 중 공부 안 하고 노는 게 제일 좋았다는 정호.

잉글랜드 옥스퍼드시에 있는 ‘크라이스트처치(Christ Church)’. 세계유일의 성공회교회 겸 대학으로 규모가 크고 귀족적인 전통이 강한 곳이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건물 앞에 긴 대기 줄이 늘어서 있고, 맨 끄트머리에 재선 가족이 보인다.



정호: 아빠, 여기가 옥스퍼드 대학이야? 그냥 큰 교회 같은데?

재선: 여기가 실제 교회란다. 대학생들이 공부도 하는 건물도 있고. 근데 옥스퍼드대학이 하나가 아니라 이런 대학(college) 38개가 모여서 세계 최고의 명문대, ‘옥스퍼드대학’이 되는 거지.

소영: (주변 사람들을 두리번거리며) 근데 여기 한국 사람들 생각보다 되게 많다. 저기 줄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도 가족끼리 왔나봐. 저 남자애는 나랑 비슷한 또래 같은데?

정희: 교육열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한국 엄마들이니…. 영국까지 왔으면 이런 세계적인 명문대 한번쯤 들르고 싶겠지.

재선: 여행인데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하고 가야지, 저렇게까지 애들 부담을 줘야 하나? 뭔가 ‘넌 커서 이런 대학 꼭 가야해’, 이런 분위기네. (정희를 힐끗 보며) 꼭 누구처럼.

정희: (들었지만 무시하고) 그건 그렇고, 소영아. 여기서 해리 포터를 찍었다고? 어느 장면인데?

소영: 직접 찍은 건 아니고, 여기 있는 ‘다이닝 홀’ 구조를 본 떠서 ‘호그와트’ 학생식당 영화세트를 만들었대.

정호: 암튼 호그와트를 직접 볼 수 있단 거잖아. 오 예~

재선: 영국 마지막 나들이인데 학교 온다고 우리 정호 입이 삐죽 나와 있더니 기분 완전 업됐네?

정희: 잠깐만, 사람들이 갑자기 돌아 나오는데? 소영아, 니가 가서 한번 물어봐. 어떻게 된 건지.

소영: (나오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돌아온다) 아, 어떡해. 오늘 건물 개방시간이 다 끝났대.

정호: (금방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정희: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부터 먼저 올걸.

재선: 그냥 건물만 둘러보지 뭐.

소영: 그럼 아빠, 이 근처에 앨리스숍 있다는데 거기 가보자. ‘이상한 나라 앨리스’에 나오는 사탕가게 모델이 된 곳이래.

정희: (살짝 놀라며) 어머, 그런 건 언제 또 조사했대?

소영: 헤헤.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도 여기 옥스퍼드 출신이래.

재선: (소영을 바라보며 혼자 독백) 소영이가 진짜 오고 싶었나보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테마로 각종 아기자기한 캐릭터상품을 판매하는 작은 상점, 앨리스숍을 시작으로 옥스퍼드 대학 곳곳을 구경하는 재선 가족, 이번엔 크라이스트처치 대학 기숙사 앞을 지나간다.



재선: 아, 저기가 크라이스트처치 대학 기숙사다.

소영: 우와, 여기 기숙사도 있어?

정희: 당연하지. 유학생도 많으니까. 소영이도 기숙사에서 살고 싶어?

소영: 응! 얼마 전에 ‘키다리 아저씨’를 읽었거든. 아, 기숙사 생활하면 공부가 막 저절로 될 것 같아.

재선: (피식 웃으며) 공부가 저절로 되다니, 아빠로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다.

소영: (뭔가 결심한 듯 다부진 얼굴로) 아빠, 엄마. 나 할 말이 있어요.

정희: 뭔데?

소영: (숨을 고르고 입을 연다) 지난번에 이번 영국 여행에서 느낀 점 물어봤잖아? 그때 대답 지금 할게. 나 여기 다시 올래.

재선: 그래, 아무렴. 나중에 언제든지 다시 여행 오면 되지. 근데 그게 이렇게 비장하게 해야 될 말인가?

소영: 아니, 아빠. 나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올 거라고.

재선: (낄낄 웃으며) 아이고, 이소영. 누가 엄마 딸 아니랄까봐 꿈 야무진 건 꼭 닮았네. 옥스퍼드가 동네 아 이름도 아이고…

정희: (재선의 허리를 찌르며) 삼류 아빠 말 듣지 마. 한 번 사는 인생, 꿈이 없으면 재미없는 거야. 이야, 우리 소영이가 난생 처음으로 뭔가 인생의 목표가 생긴 거네.

재선: (혼자 중얼거린다) 영국은 물가도 비싸고. 또….

정희: (재선 말허리를 자른다) 그것도 부모가 강요해서 생긴 목표가 아니라 소영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았으니 엄마는 더 바랄 게 없다. 이번 여행은 최고다.

정호: (질 수 없다는 듯이) 나도 꿈이 생겼어.

정희: (의외라는 듯) 뭔데?

정호: 공부 안 하고 이렇게 만날 여행하고 노는 거! 이거 딱 좋아.

재선: 역시 이정호. 언제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내 아들이다.

정희: 아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영국 여행도 끝이네.

재선: 가만 우리는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콜롬비아로 가잖아? 이건 여행이가, 아이가?



가족들 (모두 고개를 갸우뚱한다)



재선: 뭐, 아무렴 어떻노? 우리 사는 인생이 다 여행 아이겠나? 또 다른 여행을 향해 출발!



가족들 (활짝 웃으며 큰 소리로) 출발!


문화점조직 이공컬처 대표 20culture@naver.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