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합격했지만 김정일 외사촌 따라 특수부대 입대…혹독한 훈련 받아”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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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16   |  발행일 2015-01-16 제34면   |  수정 2015-01-16
스토리2, 61세 박정철씨 이야기

군대와 같은 규율 만경대혁명학원
마음에 안들어 다섯번이나 도망쳐

박정철(61·가명)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샛별군이다. 샛별군은 두만강 끝자락에 위치한 곳으로 옛날엔 종성군이었다. 조선 세종 때 김종서 장군이 개척한 6진 중 하나다. 박씨는 외동아들로 다섯 살 때 부모를 여의었다.

“1953년 휴전이 되고 나서도 남북 간에는 소규모 국지전이 계속 진행됐습니다. 그 가운데 무장암살단에 의해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어려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의 선친은 공산당 당일꾼 양성소인 보안간부훈련소(중앙당학교)를 거쳐 6·25전쟁 당시 인민군장교로 참전했다. 그의 선친은 3남2녀 중 막내로 선친의 가계가 모두 일제에 무장으로 항거한 독립투사였다. 그의 백부는 함경도 일대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이끈 걸출한 인물로 분단 후 함경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 또 고모는 함경도 길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함흥에서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광복을 맞았다. 고모는 10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후유증으로 하반신장애가 됐다.

“백두혈통은 김일성의 가계를 일컫는 용어이지만 북한에선 항일무장투쟁을 이끈 집안을 ‘백두산줄기’라고 합니다. 저희 가계가 거기에 해당됩니다. 선친이 독립운동을 하게 된 건 우연이라고 합디다. 10대 중반에 할아버지께서 공부를 하지 않고 농땡이를 부리던 선친의 종아리를 쳤는데, 선친이 동네에 불을 지르고 산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후 일경의 표적이 되자 토비로 변신해 30여명의 동료와 함께 파출소를 습격한 다음 무기를 탈취하고 일본순사를 죽였다고 합니다. 선친은 길주, 명천, 북청 등지에서 활약했는데 ‘함경도호랑이’로 불렸다고 해요.”

그는 선친이 일경에게서 뺏은 장검을 찬 채 말을 타고 있던 한 장의 사진을 기억하고 있다. 선친의 유품이었던 단검도 월남하기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평양 만수대의사당에 가면 열사관이 있는데 백부와 고모, 아버지의 행적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어요. 그걸 보고 저의 가계가 어떤 집안인지 알게 됐습니다.”

부모를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 그가 어릴 때 기억하는 것은 낫을 들고 산에서 나무를 했던 것이 전부다.

“아홉 살에 제 신분이 드러나 평양에 있는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하게 됐습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일제강점기 빨치산 활동을 했던 김일성과 혁명동지의 유가족, 당 고위간부의 자녀만 입학하는 최고의 엘리트학교인데 유치원에서부터 고등중학교까지 11년 과정입니다. 옷과 신발, 식사는 물론 학용품 등 모든 비용을 국가가 책임집니다.”

하지만 그는 군대와 같이 딱딱한 규율로 통제하는 혁명학원의 커리큘럼이 맘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딱딱한 옷과 모자도 불만이었다.

“공부는 썩 잘했는데 다섯 번이나 도망을 쳤습니다. 결국 졸업을 하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청진으로 도주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어머니가 저를 당에 신고하는 바람에 다시 학교로 붙들려 갔어요.”

그는 열세 살 때 천마제2중학교에 입학한다. 전교생이 170명 정도인 천마2중 역시 엘리트를 양성하는 국립고등중학교이다. 북한 정부는 그에게 두 칸짜리 집을 제공하고 식모도 딸려주었다. 열사 칭호를 받는 가계에서 태어난 덕분이었다.

“북한에서 항일가계나 혁명열사가족은 특별대우를 해줍니다. 천마2중엔 김정일의 외사촌 동생인 김학준도 다니고 있었는데 저랑 동기동창이었습니다. 김학준은 어릴 때 중국 선양의 한 제철소에서 노동을 하다 혈통이 밝혀져 북한으로 입국한 케이스입니다.”

그는 천마2중을 졸업하고 1972년 우수한 성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시험에 합격했으나 대학에 가지 않고 김학준을 따라 특수부대에 입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의 가계혈통을 잘 몰랐습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거든요.”

그는 군대에서 인간으로서 버틸 수 있는 모든 험한 훈련을 혹독하게 받았다.


“전쟁은 공멸의 길…올해는 남북이 꼭 화해하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다 탈출
조그만 전자회사 꾸렸다가 접어
북이탈주민 범죄자 취급하면 안돼


“부대 명칭이 ‘복수여단’이었습니다. 무명부대라고도 합니다. 소속 군인의 나이도 10대에서부터 50대까지 다양합니다. 말하자면 살상전문요원을 양성하는 부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선 킬러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훈련을 받습니다.”

그는 훈련을 받다 부상을 당해 경보병부대로 갔다. 이후 열아홉 살 때 공군군사대학에 입대한다.

“북한에선 사관학교를 나오거나 군관학교, 군사대학을 나와 장교로 임관합니다. ‘직발’이라고 해서 병사에서 바로 장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 공군군사대학에선 3년간 이론과정을 공부하고 1년간 전투비행실습을 했습니다. 이후 군사정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그는 이후 전투기조종사로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기종을 섭렵하면서 15년간 북한의 상공을 날아다녔다. 북한에서 전투기조종사는 최고의 엘리트라 할 수 있다.

“83년 남한으로 귀순한 이웅평은 원래 이름이 리원평이었어요. 공군군사대학의 1년 후배이기도 합니다. 평안도 개천비행장을 이륙해 황해도 황주비행장에 착륙하는 변침훈련을 하다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지요. 머리가 좋다고 전투기를 잘 타는 건 아니에요. 또 전투기를 잘 탄다고 해서 뛰어난 조종사가 되는 건 아닙니다. 비행을 하면서 사격을 잘 해야 진짜 뛰어난 전투기조종사로 인정을 받습니다. 보통 전투기조종사의 능력을 ‘우’ ‘양’ ‘급’으로 치는데 웅평이는 양과 급 사이 정도예요. 저는 당시 책임비행사로 함경북도 길주 만탑산 상공에 있었는데 갑자기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날 오후 4~5시에 조종사 모두를 전술 강당에 모이게 하더니 사실을 이야기해주더군요. 다들 아찔했습니다.”

그는 전투기조종사에겐 최고지도부의 동선을 매일 알려준다고 했다. 그는 매일 북한의 상공에서 본 모습을 보지 않고 그리는 훈련을 받았다. 하루 50장씩 지도를 그림으로 그릴 때도 있었다. 인간 구글위성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는 서른네 살 때 부대장으로 진급했다. 계급으로는 상좌, 한국으로 치면 대령과 중령 사이 연대장급이다.

그는 이즈음 군인 신분으로 사복을 입은 채 당의 ‘책임일꾼’으로 근무했다. 책임일꾼은 북한의 공산당 중앙당 부부장급 이상, 지방당의 경우 책임비서·조직비서·선전비서 등 도·시·군(구역) 당 비서까지를 일컫는 말로, 당의 핵심 고위간부다.

“96년 식량공급을 책임지는 책임일꾼으로 평양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아사자가 속출할 때입니다. 배가 고파 굶어죽는 것도 봤어요. 제가 데리고 있는 당원 중에도 아사자가 있었어요. 출근을 하지 않기에 집에 가 봤더니 뼈만 앙상하게 남아 송장이 돼 있더라고요.”(눈물)

그는 1980년대 말~90년대 소비에트와 동유럽이 붕괴되면서부터 그 여파가 중공업국가였던 북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그는 당시 북한이 사회주의경제에서 자본주의시장경제공업으로 변신했어야 했는데 정책을 실기함으로써 고난의 행군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자본주의시장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쪽과 ‘고난의 행군’ 정신을 이어가자는 쪽이 대립했다고 했다. 그는 전자 쪽이어서 나중에 호된 비판을 받아야 했다.

“북한의 핵시설이 동결되고 원자력발전이 끊겨 전력난이 생겼습니다. 함경남도 금호지구에 발전소를 건설했는데 중유공급을 할 수 없었어요. 전력이 끊어지면서 모든 공업이 타격을 받았습니다. 평양 등 대도시에서 오히려 배급이 교란돼 아사자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김일성 사후 유훈통치기간이 끝난 2002년 4월 식량공급과 외교사업을 위해 미국, 캐나다를 비롯해 동남아, 중국은 물론 러시아, 중동 등지를 다녔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돈이 통용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북한을 어떻게, 왜, 이탈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가르쳐 줄 수 없음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는 2008년 중국에 있다가 북한을 이탈하고 이듬해 대구에 정착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한국의 실정은 북에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전 북한을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 남으로 왔습니다.”

그는 5년간 대구에서 생활하면서 보따리장사를 했다. 북한에서 인정하는 최고 신분의 가계에서 태어나 전투기조종사, 책임일꾼을 역임하면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던 그의 한국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보따리장사로 시작해 돈을 조금 모아 조그만 전자회사를 꾸렸다가 대기업 밑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사업을 접었습니다.”

2012년 그는 Y대 대학원 모 학과에서 ‘황장엽의 주체사상 비판’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박사과정을 하고 있으나 병마가 찾아들어 1년째 휴학을 하고 있는 중이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가는 그는 2년 전 2천만원의 사기를 당해 형편이 더 어렵다.

그는 북한이탈주민을 차별하거나 범죄자로 취급하는 언론에도 문제가 많다고 했다.

“제가 아는 북한에서 온 동생 이야기입니다. 그 동생이 취직을 하려고 사장에게 전화를 했는데 북한 말투만 듣고 ‘북한사람 쓰지 않는다’고 했다고 해요. 마음에 상처를 입어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법치국가라는 걸 강조하고 돈과 법으로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옆의 환자가 교통사고 환자예요. 그런데 가해자는 안 보이고 보험회사 직원만 한 번 오더라고요. 참.”

그는 한국인이 이렇게 강퍅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사람을 경시하는 잘못된 제도라고 했다.

“남과 북이 체제경쟁을 벌이면서 전쟁을 하면 둘 다 망합니다. 전 남과 북 사이에 평화를 저해하는 어떤 일도 하고 싶진 않습니다. 올해는 꼭 남북이 화해하는 해가 됐으면 합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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