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16] 전남 장성 노사종가 ‘시래기 붕어찜’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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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22   |  발행일 2015-01-22 제21면   |  수정 2015-01-22
근처 江과 밭서 얻은 붕어와 무청으로 찜…기정진의 삶처럼 ‘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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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기정진이 평소 즐겨 먹었던 붕어찜(오픈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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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진이 만년에 제자들을 가르치며 머물다 별세한 곳인 담대헌(澹對軒). 기정진을 기리는 고산서원(장성군 진원면 고산리)의 중심 건물로, ‘담대’는 부모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본다는 의미다.


철학을 몸으로 실천한 성리학자
병인양요때 위정척사 최초 설파
가난·병고에도 벼슬은 멀리하고
진리실천·후학양성에 일생 바쳐


노사(蘆沙) 기정진(1798~1879)은 독창적이고 탁월한 이론을 정립한 철학자이자 철학을 몸으로 실천했던 성리학자이다. 특히 실천이 없는 관념적 이론은 진리일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던 그는 자신의 철학을 몸으로 실천해 보여야만 참뜻이 있다고 믿고, 평생 동안 겸허하고 순수한 학자로서의 자세와 처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가난과 병고 속에서도 벼슬을 멀리하고 오직 진리 탐구와 실천, 후학양성에 일생을 바치며 높은 수준의 성리학 이론을 터득했다. ‘조선 유학사’라는 저서로 유명한 현상윤(玄相允)은 수백 명에 이르는 조선시대 성리학자 중에서 학자다운 학문을 한 학자로 여섯 사람을 꼽았다. 화담 서경덕·퇴계 이황·율곡 이이와 이들을 이은 녹문 임성주·노사 기정진·한주 이진상을 거명한 것이다.

노사 기정진의 학문과 관련해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즉 ‘학문에 있어서는 장성만 한 곳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기정진은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와 장산리 등지에서 살다가 78세 때인 1875년 고산서원이 있는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로 이사 와 학문을 마무리하고 제자를 가르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곳에 마련한 담대헌(澹對軒)에 1879년 12월 생을 마치던 날까지 머물렀다. 담대헌은 이곳에서 부모님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기에 지은 이름이다.

후학들은 기정진 사후에 담대헌을 새로 짓고, 담대헌 뒤에 기정진의 위패를 모신 사당(高山祠)을 마련하는 등 고산서원을 건립했다.

기정진의 6세 종손 기호중씨(79) 부부가 광주에 살면서 수시로 이곳을 오가며 관리하고 있다. 사실상 종택 역할을 하고 있는 서원 고직사(庫直舍)에서 종부가 제사 음식을 비롯해 종가음식을 요리해 손님들에게 접대하고 있다. 이 노사종가에는 병약한 체질의 기정진이 평소에 즐기던 시래기 붕어찜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노사 기정진이 즐기던 ‘시래기 붕어찜’

기정진이 가장 오랫동안 살면서 저술활동을 하고 강학을 했던 중심지는 황룡면 하사리였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황룡면 장산리이다. 65세 이후 20년 가까이 머물면서 여러 저술을 남기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77세 때는 노령산(蘆嶺山) 아래의 하사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노사(蘆沙)’라는 호를 스스로 짓기도 했다.

‘노문3자(蘆門三子)’라 일컫는 대곡 김석귀·일신재 정의림·노백헌 정재규를 비롯해 손자인 송사 기우만의 학문이 하사리 기정진의 문하에서 익어갔다. 면암 최익현이 대원군을 탄핵하다 반대파에 밀려 제주도로 귀양 갔다가 돌아오던 1875년 4월에 기정진을 찾았던 곳도 하사리이다. 또 훗날 유명한 지사 시인이 된 매천 황현이 15세의 어린 학동이던 때 기정진을 찾아와 학문을 물었던 곳도 이곳이었다.

70이 넘은 노학자를 황현이 찾은 때는 1869년이다. 당시 기정진은 그에게 시 세 편(贈黃玹三首)을 지어 주었는데, 그중 한 편이다. ‘보배로운 소년이 행전도 안 치고 찾아오니/ 놀랍기도 하지만 걱정도 되는구나/ 쉽게 얻은 것은 잃기도 쉬운 것이니/ 연잎 위의 물방울 구슬 자세히 보라.’

천재적인 시인 황현의 모습을 보고, 재주만 믿고 경솔할까 걱정되어 경계의 시를 지어준 것이다.

기정진은 이곳에 머물다 마지막에는 고산리로 거처를 옮겨 지내다 별세했다. 궁핍 속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82세의 장수를 누렸다. 샘물처럼 솟는 학문적 의욕과 진리를 궁구하는 집요한 의지, 검소하고 절제된 삶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런 기정진은 평소 근처 황룡강 등지에서 잡아 온 붕어와 거처 주변의 가죽나무 잎, 무청 등을 넣고 푹 끓인 붕어찜을 즐겼다고 한다. 붕어찜과 함께 주변의 죽순으로 만든 죽순나물도 즐겼다.

노사종가의 음식은 기정진의 삶처럼, 채소와 나물 위주로 아주 담백하다. 종가에서는 지금도 손님상에 붕어찜을 비롯해 청국장, 집장, 죽순나물, 현미로 만든 인절미 등을 올린다.

◆‘장성일목(長城一目)’ 일화 주인공

노사 기정진은 소위 ‘천재’였다. 비범한 자질을 타고나 그는 5~6세에 이미 글을 해독하고 지을 줄 알았다. 7세 때 지은 ‘하늘을 읊음(詠天)’이라는 시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시가 되었다. ‘사람들의 선악에 따라 빠르게 보답한다네(隨人善惡報施速)’라는 글귀가 있는데, 7세에 이미 세상 이치를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10여 세에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통달하게 되니 주위 어른들도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이 무렵 중국(청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괴상한 문장을 하나 가져와 시험에 들게 했다. 그 문장은 ‘동해에 한 마리의 고기가 있는데 머리가 없고 꼬리도 없으며 등뼈도 없다. 그림으로 그리면 둥글고 글씨를 쓰면 모가 난다. 용은 짧고 범은 길다(龍短虎長).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이었다.

왕이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으나 제대로 풀이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신하 중 한 사람이 장성에 신동이 있으니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아뢰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 기정진을 불러와 그 문장을 내보이며 풀어보라고 했다.

기정진은 즉석에서 풀이하기를 “고기 어(魚) 자에 머리와 꼬리가 없으면 밭 전(田) 자만 남고 또다시 가운데 내려 긋는 척추뼈가 없으므로 오직 날 일(日) 자만 남게 된다. 이 태양은 그리면 둥글고 글자로 쓰면 날 일 자가 모가 난 글자이므로, 태양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용은 짧고 범은 길다라는 말은 십이지(十二支)에 용은 진(辰)이고 범은 인(寅)이므로, 해가 동쪽 진방(辰方)에서 뜰 때는 겨울철이라서 낮 길이가 짧고, 인방(寅方)에서 해가 뜰 때는 여름철이라 낮 길이가 길다는 뜻으로 태양의 일조시간 장단을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정진의 명쾌한 풀이를 보자 왕은 무릎을 치며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장안의 수많은 눈이 장성의 한 개 눈보다 못하다(長安萬目 不如長城一目)’라는 극찬의 말을 남겼다. 이 일로 기정진은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기정진이 ‘장성일목(長城一目)’의 ‘일목’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여섯 살 때 천연두를 앓다가 왼쪽 눈을 실명했기 때문이다. 한쪽 눈을 잃은 그에 대해 사람들은 ‘일목문장’으로 부르기도 했다.

기정진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를 설파한 최초의 상소를 올린 주인공이기도 한다.

69세 때인 1866년, 병인양요로 서양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면서 세상이 요동치자 기정진은 나라 걱정에 식음을 전폐하고 병이 날 지경이 되었다. 당시 그는 6가지 시무책을 담은 ‘병인소(丙寅疏)’를 임금께 올린다. 당시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를 이루자는 주장이 대세이던 때, 기정진은 결사반대하면서 전쟁을 위한 군비강화책을 열거하며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위정척사론을 폈다. 기정진의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적과 싸워 물리치게 되고, 그에게는 공조참판이라는 벼슬이 내려지기도 했다.병인소는 그의 이름을 천하에 알린 상소였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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