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 시인 겸 르포작가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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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23   |  발행일 2015-01-23 제37면   |  수정 2015-01-30
“中 동북3성은 또다른 조선…동포들은 길림·연길을 우리말로 쓰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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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르포작가인 박영희씨가 지난 16일 영남일보를 찾았다. 그는 청산리 대첩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의 반대로 정규교육은 초등졸업으로 끝
1년6개월간 사북서 광부생활…광부의 딸과 결혼
위안부 할머니 평전 위해 갔다가 만주에 빠져
만주의 우리동포에 관한 책만 3권
자료수집과 탄광견학 위해 북한에 갔다가 추방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6년7개월간이나 감옥생활
대구 사람들은 못을 먼저 박아놓고 대화
계절이 바뀌어도 옷을 바꿔입지 않는 것과 같다

만주는 겨울이 제맛이다. 시인이자 르포작가인 만주전문가 박영희(53)도 공감한다. 2004년 눈썹에 고드름이 달릴 만큼 추웠던 어느 날, 시인은 하얼빈~연길행 야간열차를 탔다. 눈 내린 하얀 들판을 지나 한 간이역에 도착할 때쯤 어딘가 멀리서 닭이 홰치는 소리가 들렸다.

“홀로 지새운 만주의 긴 밤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이후 만주에 빠져 10년째 제 집처럼 드나들고 있다. 경비를 줄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겨울을 선호하지만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다. 북간도에 부는 삭풍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을 보려면 겨울이 아니고선 만주를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그는 만주를 드나들며 세 권의 책을 썼다. 최근엔 만주와 조선족동포 이야기를 담은 ‘해외에 계신 동포여러분’이란 르포집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중국에서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조선족동포 13명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그려져 있다. 지난 13일 그를 만났다. 호남 출신인 그가 왜 대구에서 17년째 은둔하다시피 하며 만주를 왔다 갔다 하는지도 궁금했다.

▲‘만주를 가다’ ‘만주의 아이들’에 이어 만주에 관한 세 번째 책이다. 만주를 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또 천착한 이유는.

“22살 되던 해, 식민지 시절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던 동포를 생각하며 나에게도 ‘마음의 빚’이 존재함을 알게 됐다. 26살에 현해탄을 건너고 40대에 이르러 압록강을 건넌 것도 만주에 천착한 것과 무관치 않다. 2004년 ‘대구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주관으로 강제위안부였던 조윤옥 할머니의 평전을 쓰기 위해 훈춘에 처음 갔다. 하얼빈과 목단강 등지로 20일 정도 다녔다. 거기서 일본과 북한에서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중국 속 우리동포의 상황은 어떠한가. 또 그들의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190만 동포 중 한국, 일본, 미국 등지로 나가 돈벌이를 하는 수만 80만명이다. 부모가 떠난 자리에 늙은이와 아이들만 남아있다. 그들이 떠난 집은 한족이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길림성을 지린성으로, 연길을 옌지로 표기하지 말아 달라고 한다. 만주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는 공간이다. 만주, 즉 중국의 동북3성은 또 다른 조선일 따름이다.”

▲20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는 무엇인가.

“임화(카프의 핵심적인 인물)가 갔던 길을 따라 일본을 답사하고 싶었다. 그가 주로 활동했던 요코하마와 윤동주가 옥사했던 후쿠오카 감옥 등을 둘러봤다. 특히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광부의 행적을 찾다 재일동포 3세 르포작가 ‘하야시 에이다이’를 만났다. 그는 광부로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에 대한 르포를 썼던 인물이다.”

▲르포작가는 현장을 두루 찾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엔 전문적인 르포작가가 그리 많지 않으나 일본엔 약 1천200명이 있다. 하야시가 르포를 쓰려면 ‘뿌리들의 아우성’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시가 꽃을 지향한다면 르포작가는 뿌리를 알아야 한다. 그때부터 르포작가를 꿈꿨다.”

▲임화는 월북 작가다. 임화의 길을 따라 북한으로 간 건 아닌가.

“일본을 10여 차례 다니면서 식민지 시절 북한에 있는 광산에 대한 자료를 찾아 그것을 바탕으로 한 편의 장편서사시를 쓰고 싶었다. 91년 10월, 중국북한대사관을 거쳐 베이징~평양행 고려민항기를 탔다. 김영수란 가명을 썼는데, 4박5일간 북한에 있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닌가.

“우리는 분단돼 있을 뿐이다. 순수한 동기로 갔다. 1차 자료입수와 탄광견학을 북한 당국에 요구했는데 ‘조선의 별’ 영화를 억지로 관람시키거나 주체사상 선전교육을 했다. 내가 북에 온 목적과 다르다고 항의했다. 전력난과 식량난 등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여러 가지 일로 북한 당국의 지도원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민간인과의 만남이 극히 통제된 일정이었다. 4일이 지나도 가고 싶은 곳은 한 군데도 못 갔다. 나중엔 영화도 안 보겠다고 버텼는데 북에서 추방되기 전날 밤 사달이 났다. 5일째 아침, 지도원이 베이징행 비행기표를 쥐여주더라.”



박 시인은 92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아 6년7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98년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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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프로필

△1962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 출생
△1985년 ‘민의’에 등단
△시집: 그때 나는 학교에 있었다, 즐거운 세탁, 팽이는 서고 싶다, 해 뜨는 검은 땅, 조카의 하늘 등
△르포집: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내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보이지 않는 사람들, 만주의 아이들,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사라져가는 수공업자, 우리 시대의 장인들 등
△시론집: 오늘, 오래된 시집을 읽다
△서간집: 영희가 서로에게
△평전: 김경숙
△기행산문집: 만주를 가다
△청소년소설: 운동장이 없는 학교, 대통령이 죽었다

▲대법원까지 갔나.

“그렇다. 1심에선 북에 가서 활동했던 것에 대해 무죄선고를 받았다. 재판부가 북에 간 것에 대해 ‘반성문을 써라’고 하기에 ‘인정할 건 인정하지만 난 작가다’고 하면서 끝내 쓰지 않았다. 모두진술에도 보통 ‘존경하는 재판장님’이라고 쓰는데 ‘진실을 원하는 재판장님’이라고 썼다. 여러모로 괘씸죄가 추가된 것 같다.”(웃음)

▲감옥에선 주로 무엇을 했나.

“세계문학사와 한국문학사를 공부했다. 딸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모아 시집을 내기도 했다. 시간이 금방 가더라.”

▲광부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27살 때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배를 탈 것인가, 광산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다 강원도 사북탄광으로 갔다. 1년6개월간 광부생활을 하다 광부의 딸과 결혼을 했다. 당시 일제강점기에 사용하던 폐광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탄을 캔 게 아니라 광산의 역사와 광부의 삶을 캤다.”

▲20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폭풍의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전남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 북악산이 있다면 고향엔 남악산이 있다. 북악이 대륙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면 남악은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곳에 있는 임성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정규교육은 그게 끝이다.”

▲왜 중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나.

“아버지가 보내주지 않았다. 낮엔 일을 할 테니 밤에라도 보내달라고 했는데 안 됐다. 공부는 잘했다. 위로 형과 누나들이 있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책을 무척 좋아했다. 하루는 중학교에 다니던 친구 집에 책을 빌리기 위해 들렀다가 그 아버지로부터 ‘저 아이랑 놀지 마라’는 말을 엿들었다. 굴욕감과 소외감으로 상처가 컸다. 15살 때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낫으로 발등을 찍고 서울로 갔다. 사회에서 이탈한 거지. 당시 동네에선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돈벌이를 하러 서울로 간 형과 누나들이 많았다. 하지만 명절에 선물꾸러미 들고 잘 차려입고 오는 게 유치해보였다.”

▲서울 생활은 어떠했나.

“서울역에 내려 카센터란 구직광고를 보고 찾아가 5개월간 일을 했는데 월급을 안 줘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뒀다. 다시 공장 일을 하다 신문배달을 하게 됐다. 신문은 나의 교과서이자 선생님이었다. 모든 세상이 신문 속에 다 있었다. 문화면을 비롯해 정치, 사회면을 꼼꼼하게 읽었다. 한자공부도 저절로 됐다. 같은 배달부였던 형의 권고로 중·고등검정고시를 보고 19살 때 졸업을 했다. 또래들은 아직 고3이었다. 대화를 하면 또래들이 못 알아먹을 정도였다. 소외된 공간에서 자랐지만 지식수준은 높았다.(웃음) 그때 3명의 스승을 만났다. 한 명은 나에게 공부를 하라고 권유한 ‘갈치’라는 형이었다. 사실 난 깡패가 되고 싶었는데 형의 말을 따랐다. 또 다른 사람은 신문지국장과 수녀님이었는데, 한 명은 정의와 인륜의 표본이었으며 수녀님은 내 삶에도 영혼이 있다는 걸 가르쳐 준 은인이다. 수녀님과 펜팔을 오랫동안 했는데 ‘너는 시인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신문배달을 5년간 하면서 약 1천200명의 사람을 만났다. 신문대금을 떼먹는 사람도 있는 반면 양희정이란 가수는 대금이 3천600원인데도 매달 5천원을 주며 격려했다. 다양한 군상으로부터 무엇이 옳고 선한지를 깨달았다.”

▲대입검정고시는 준비하지 않았나.

“그때가 80년이었다. 목포에 내려가서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런데 5·18이 터졌다. 정말 좋아했던, 전남대 법대에 다니던 고향의 형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 밖에 내가 알고 있던 친구와 형들이 죽었다. 제복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육사를 포기했다. 집에서도 일절 도와주지 않아 몸무게가 11㎏이나 빠져 영양실조가 됐다. 그때 나를 일으켜 세운 건 고전음악과 문학이었다. 임화, 김기림, 오장환도 그때 알았다. 20살 때 부산으로 갔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막노동을 하며 부산대에서 7년간 도강을 했다. 문학, 철학, 사회학, 가정학까지 거의 모든 수업을 들었다. 그때 도움을 준 분이 부산대의 한 교수다.”(그는 이름을 밝힐 수 없다고 했다)

▲하고 싶은 공부를 진짜 제대로 한 것 같다.(웃음) 시인으로 등단은 언제 했나.

“24살 때 문학무크지 ‘민의’에 12편의 시로 등단했다. 대학을 나와야 시인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날 펑펑 울었다.”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은 없나.

“왜 없겠나. 출소 후 15년 가까이 청소년특강을 많이 다니는데 의무교육이 중요하다는 걸 늘 강조한다. 아버지와는 26살 때 화해를 했다. 눈을 감으시기 전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학교공부가 다는 아니다. 어쩌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신문이나 사회에서 배웠으니.”(웃음)

▲대구에서 살아보니 어떤가. 앞으로 활동계획은.

“강제위안부시민모임행사나 인혁당 추모모임을 빼곤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구 사람들은 못을 먼저 박아놓고 대화한다. 유물은 오래갈수록 빛이 나지만 도시는 변화해야 한다. 계절이 바뀌면 옷을 바꿔 입어야 하는데도 안 바꿔 입는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몇 년 뒤 강원도 사북으로 떠날 것이다. 저널르포보다 조지 오웰처럼 가슴으로 스며드는 한국의 문학르포를 쓰고 싶은데, 만주의 항일을 주제로 소설을 쓰고 싶다. 30~40대를 보내면서 내 안에서 항상 잔뿌리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은 완성이 없다. 나중에 죽어서 꽃이 된다. 조상들이 왜 상여에 꽃을 달았을까 생각해보라.”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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