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합천 황매산 영암사지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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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23   |  발행일 2015-01-23 제38면   |  수정 2015-01-23
폐허속에 내려앉은 천년고요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합천 황매산 영암사지
황매산 영암사지 금당 터. 석축의 최상단에 위치하며 석등, 석탑과 중심축을 이룬다. 쌍사자석등은 보물 제353호, 삼층석탑은 보물 제480호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합천 황매산 영암사지
산 사면을 따라 3단으로 쌓아 올린 영암사지의 석축과 조사당 터로 추정되는 건물터.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합천 황매산 영암사지
보물 제489호인 영암사지귀부.


폐허란, 남아있는 것들의 이름. 폐허의 건축이란, 남아있는 문법들의 노래. 바라볼 수 있는 건물은, 바라보는 순간 연주가 끝난 음악이지만 폐허의 건축은, 영원한 음악이다. 여기 극도로 우아한 고요함 속에, 몇 개의 주춧돌과 몇 개의 석물들이 남아 있다. 그곳에서부터 가장 명료한 균형과 비례를, 그리고 분명하고, 본질적이고, 순수한 규범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돌아서며 나는 저절로 ‘아, 참 좋은 것을 보았구나’ 라고 소리 내어 말했다.

◆ 폐사지, 영암사 터…산 사면을 다듬어 3단으로 절집 앉혀

배면에는 화왕산 모산재. 무더기로 피어난 흰 꽃들처럼, 흰 바위의 무리가 산을 이루고 있다. 그 아래에 산 사면을 다듬어 절을 앉혔다. 3단으로 차곡차곡 내려앉았을 절집은 지금 그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합천 황매산 영암사. 사람들에 의해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을 뿐, 정확한 내력을 담은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왕은…(스님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물러나 조용히 살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영을 내려 가수현 영암사에 머물도록 했다’는 ‘적연국사자광지탑비명’의 한 구절이 영암사를 추측해볼 만한 기록으로, 절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적어도 고려 후기까지는 남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석축은 차분하게 쌓여 있지만 전체적으로 웅장한 느낌이다. 높은 곳은 열한개의 단으로 장대석을 정연하게 쌓았고, 군데군데 쐐기돌을 박아 석축의 구조를 더욱 강건하게 했다. 축대의 상당부분은 근래에 복구되었다. 천년의 연륜과 팔짱을 끼고 선 그 현대적 이질감에는 저항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아랫단은 회랑을 두른 큰 영역으로 승방이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중간 단은 중문이 있던 곳으로 축대 위에 회랑을 두르고 마당 가운데에 삼층 석탑을 세웠다. 가장 윗단은 금당이 있는 곳이다. 자신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금당터의 석축은 마치 성벽의 치성처럼 가운데가 돌출되어 있다. 그 위에 석등이 자리한다. 이로써 중간단의 넓이가 확보되고 석등은 더욱 도드라진다. 돌출된 석축의 좌우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다. 활처럼 휘어진 계단은 하나의 바위를 조각해 만든 것이다. 단의 너비는 매우 좁다. 그것은 기능적인 계단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도약, 하나의 날개처럼 보인다. 마치 금당의 땅이 이 지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임을 강조하는 것처럼.

금당은 기단과 사방의 계단, 그리고 주춧돌들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높이와 간격이 다른 주춧돌들이 확인되어 적어도 세 차례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뒤쪽의 계단을 제외한 삼면의 계단 양쪽에는 사자로 보이는 동물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또한 소매돌이 남아 있는데 정면계단에는 구름 위를 나는 용이, 양옆 계단에는 사람 머리에 새의 몸으로 한없이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는 가릉빈가가 조각되어 있다. 금당은 용과 가릉빈가가 떠받치고 있는 천상이다.

◆ 해학적이고 낙천적인 쌍사자석등과 단단하고 간명한 삼층석탑

금당과 석등과 석탑은 일직선으로 놓여 영암사의 중심축을 이룬다. 탑과 석등은 단의 차이로 인해 대등하고, 표현의 방법으로 인해 대조적이다. 신라 말 9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이중의 기단에 삼층의 탑신이 올라 있고,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몸돌에 귀기둥을 새긴 것 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단단하고 간명한 모습이다. 그에 비해 쌍사자석등은 매우 장식적이다. 두 마리의 사자가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사자는 불교미술에 많이 등장하지만 사자를 일으켜 세운 것은 신라인들의 착상이라 한다. 사자의 형상은 압축되고 왜곡되어 있지만 한편으로 매우 사실적이다. 서랍장 위로 손을 뻗치며 안간힘으로 선 아기처럼, 사자는 통통한 두 다리를 벌려 다부지게 서느라 엉덩이에 힘이 잔뜩 들어있다. 갈기는 등 뒤로 늘어져 있고, 꼬리는 등 뒤에 올라붙어 장난스럽다. 해학적이고 낙천적인 사자의 모습은 일종의 해탈이다.

폐사지의 석물들은 링이나 체인에서 분리된 보석 알갱이와 같은 매혹이니, 1933년 일본인들은 이곳의 쌍사자석등을 훔치려 했다. 그들을 막고 석등을 보존한 것은 마을사람들이라 한다. 무너진 채 방치되어 있던 석탑을 세운 것도 그들이었고, 한때 마을의 고가 두 채를 옮겨와 절터를 지키기도 했다 한다. 그로 인해 절터의 일부가 훼손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영암사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들 덕이라 한다.

◆ 빈 터를 지키는 돌 거북 한 쌍…비신·이수는 어디로 간 것일까

금당의 서쪽 상부에 독립된 건물 터가 있다. 서금당터라 부르기도 하고, 건물터 좌우로 돌 거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사당 터라 여기기도 한다. 크지 않은 건물터에는 정면의 양쪽에 놓았을 나지막한 돌계단의 소매돌과 네모진 주춧돌 몇 개, 불상이 자리했던 지대석, 여기저기 허물어진 기단이 남아 있다. 앞에는 지대석과 하대석만 남은 석등이 있고, 양 옆에는 돌 거북이 웅크리고 있다.

건물터를 중심으로 동서에 자리하고 있는 거북이는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다. 비석의 내용이 새겨진 비신과 머릿돌인 이수는 사라지고 없다. 기록은 없지만 영암사를 창건한 개창조와 중건한 중창조의 탑비로 추정된다. 옛사람이 새긴 귀갑문은 선명한데, 비신이 자리해야 할 홈에는 어제 내린 눈이 오늘의 하늘을 담고 있다. 영암사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을 비석은 어느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일까.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찾아가는 길

88고속도로 고령IC로 나가 33번 국도를 타고 합천읍으로 간다. 합천읍에서 영상테마파크 방향으로 간 후 합천댐을 지나 황매산 군립공원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공원 입구 매표소를 지나 조금 내려가면 감바위 마을과 모산재 주차장이 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산길을 조금 가면 영암사지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길이라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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