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영 시인의 시골에서 .1] 40대에 시골살이를 시작하다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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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23   |  발행일 2015-01-23 제39면   |  수정 2015-01-23
옻나무를 따라간 시골 나는 ‘옥천의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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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을 시작한 지 올해로 11년째다. 충북 옥천. 거기선 못 말리는 ‘옥천의 돈키호테’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나는 내 삶의 5분의 1을 좌충우돌 뛰어다니며 보냈다. 그것은 내 삶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이런 시골생활에 대해 지인들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한다. 10대에서 20대까지는 문학이라는 꿈을 쫓아다녔고, 본격적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30대는 방송국 주변을 돌아다니다 40세가 가까워지자 불쑥 이민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민생활 4년 만에 귀국해 시골생활을 선택했으니, 그럴 법도 할 것이다.

나의 시골생활은 남들이 말하는 귀촌이나 귀농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귀농이나 귀촌이란 단어를 싫어한다. 농촌이란 단어는 원래 우리말이 아니었다. 농촌이란 단어에 들어 있는 촌(村)은 원래 일본의 행정단위에서 나온 용어다. 식민지 행정의 모든 것을 그대로 간직한 단어다. 귀농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이 말에는 산업화 이후, 권력이 숨겨온 가식의 얼굴이 숨어 있다. 한국의 산업화는 농사의 근본을 파괴하면서 이루어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농이나 귀촌이란 말에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리 사회가 삶의 가치에 대하여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IMF외환위기를 통해 산업화 허상이 벗겨진 뒤 대안의 삶으로 거론되었던 단어가 최근 다시 살아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 귀농이나 귀촌을 도모하는 카페가 숱하게 생기고, 지방자치단체마다 대책을 내놓지만, 시골살이 몇 년 만에 되돌아가는 사람이 더 많다. 접근 방식이 잘못된 것이다. 귀농이나 귀촌이란 말은 정책 입안자들이 쓰는 잘 포장된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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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 옻순을 채취하고 있는 박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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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살고 있는 집에 있는 250년 된 옻나무와 옻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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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과 함께 옻된장을 만들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은
한국 옻식품 문화 탄생지
안지랑이 입구 식당에
옻 해장국을
처음 등장시킨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다

옻나무는
나와 아버지를
연결해 주는 고리였고,
내 청소년기를 지켜온 나무
숱한 가능성을 지닌 나무였다

'대한민국 옻 1번지’
충북 옥천에서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 실향의 시대를 지나서

나는 감히 지난 세기 한반도를 ‘실향의 시대’라 부른다. 자기가 태어난 곳을 잃어버린다는 실향. 그 실향의 문화가 지난 100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다. 처음 실향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나라와 더불어 고향을 잃기 시작해 만주와 시베리아로 떠났다. 이 시기는 주로 일제에 의해 토지를 잃거나 징용 등으로 고향을 떠났다.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타의에 의한 실향은 사람들의 삶을 척박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정신적인 가치까지 흔들리게 하지는 못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끝나자 새로운 행태의 실향이 한반도를 뒤덮은 것이다. 그것은 사상과 이념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자발적인 실향이었다. 좌우대립으로 시작된 그 징조는 6·25라는 전쟁을 통해 한반도 대부분을 뒤덮으며, 고향을 잠시 떠나는 피란민과 되돌아가지 못하는 숱한 실향민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안정화될 무렵 이 사회는 산업화라는 거센 파도가 끌고온 정신적 실향에 빠져들었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이 실향현상은 그때까지 간신히 버티어오던 이 땅의 오랜 문화적 배경인 농경문화를 무너뜨렸다. 이 자발적 실향은 삶의 가치를 다른 시선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도시 중심의 가치 체계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갔고, 모든 것은 경제적인 가치로 평가하며, 그것만이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그릇된 풍조를 만연시켰다.

자연 속에서 개인 스스로 자신의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는 근본을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지난 세기 말에 이르러 우리는 스스로가 쌓아올린 경제라는 바벨탑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IMF 외환위기를 통해 깨달았다. 그렇게 깨닫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을 되돌아보았다.

그때부터 사회 한쪽에서 ‘귀농’과 ‘귀촌’이란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도시 밖의 공간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그들 대부분이 자기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세기 동안 우리가 고향을 화수분으로 해서 도시생활을 만들어 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시대 우리는 농촌에서 생산한 이익을 도시로 나가는 종잣돈으로 써버렸다.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를 부쳐준 농가의 부모는 빚더미에 앉게 됐다. 그 돈을 쓴 사람들은 부채를 갚지 않고 도시에 눌러앉아 있었다. 오늘날 농가 부채의 밑바탕에는 이런 원죄가 깔려 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농가에 대한 정부의 지원 대책에 대하여 도시인들이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은 이런 집단적 부채의식을 정부가 대신 해주고 있다는 위안감 때문이다.

도시로 떠나간 사람들이 쉽사리 시골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귀향을 가장 반대하는 사람이 부모라는 사실을 우리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도시로 보낸 자식만은 자기와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농사를 경제적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시골생활의 모든 것이 척박해진다는 것을 노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척박함에 자식을 몰아넣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들은 자식의 귀향을 삶의 실패로 생각하여, 귀향을 적극적으로 말리는 것이다.

이런 것을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골살이에 자신만의 가치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자신을 가장 확실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펼칠 공간으로, 자연과 호흡하는 공간으로 농촌을 바라볼 때 비로소 시골살이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내가 마흔이 넘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역이민을 선택하고 도시생활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실향민의 아들인 나는 나만의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야 하고, 그 고향을 토대로 후대와 연결될 수 있는 문화적 터전을 쌓아야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 수 있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나는 터전을 옻나무라는 식물에서 찾아냈다. 옻나무는 내 삶의 전환점마다 등장하는 존재였다. 그것은 나와 아버지를 연결해 주는 고리였고, 나의 청소년기를 지켜온 나무였으며 숱한 가능성을 지닌 나무였다. 그곳으로 나는 걸어 들어갔다. 거기에는 대구에서 터전을 닦은 옻에 대한 이해가 한몫했다.

◆옻을 들여다보다

대구·경북지역이 한국 옻식품 문화의 탄생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1970년대 말, 대구시 남구 대명동 안지랑이 일대는 전국 최대 옻닭 식당 집합소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대덕식당 자리를 중심으로 10여개 옻닭 전문점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옻 해장국을 비롯해 옻순 비빔밥, 옻칼국수, 옻토끼와 옻개 등 기상천외한 음식이 등장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식당들은 식품위생법과 레스토랑이란 새로운 형태의 외식문화가 등장하면서 하나둘 사라졌지만 한동안 잊고 있던 우리 음식 문화의 비밀 하나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옻이라는 특별한 식품을 만들어 먹는 민족이다. 비행기와 책상 빼놓고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중국인조차 먹지 못하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조리를 해 먹고 식당 메뉴로 개발해 일반인에게 팔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경상도 북쪽에서 시작되었다. 60년대 청송 달기 약수탕에 모인 사람이 그들이었다. 제대로 된 의료시설이 없던 시대, 달기약수터는 위장병 환자들의 순례지였다. 위장병을 앓는 사람은 버스를 타고 가서 약수탕 인근에 방을 얻어 놓고 병이 나을 때까지 며칠씩 머물렀다. 그들 중 일부는 약수에 옻을 넣고 닭과 함께 끓여 먹었다. 산업화가 안정되어 가던 70년대 중반 그것이 도심 한가운데 새롭게 ‘옻해장국’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음식의 등장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농촌을 떠나 도심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람들이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풍습이 생겨난 것이다. 가장 손쉬운 것이 바로 ‘새벽 등산’이었다. 시내에서 가까운 안지랑이 일대는 새벽 등산객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 등산로 입구에는 그들을 대상으로 한 식품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안지랑이 입구의 식당에 처음으로 옻 해장국을 등장시킨 사람은 나의 아버지였다. 이북(맹산)에서 사냥을 했던 아버지는 등산객 중에서 위장병을 앓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옻을 넣은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숙취와 새벽 등산 뒤의 허기에 시달리던 등산객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어 식당은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 음식은 불법이었다. 옻나무 속에 들어 있는 알레르기 물질로 인해 식품공전에는 옻나무를 식품의 원료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안지랑이 일대 숱한 옻닭집들이 사라진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외유를 끝내고 한국에 귀국할 무렵 옻의 식용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림청과 식약처가 대립 중이었다. 옻나무를 경제수종으로 지정한 산림청은 농가의 수익을 올리기 위하여 독성을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그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옻나무를 식용 원료로 등재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약처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먹지 않는다는 식물을 쉽게 허용할 수 없었다. 두 기관의 갈등은 ‘민속음식’이라는 편법을 이용해 타협이 되었다.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그 옻나무에서 발견했다. 남들이 잘 하지 않지만 불편해도 나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위해 생전 처음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대한민국 옻 1번지’로 급부상한 충북 옥천이다.

◆시골생활은 폭주 기관차

한국 사회에서 농사를 업으로 하는 시골생활은 실패를 목표로 달리는 ‘폭주 기관차’와 같다.

주 작물은 FTA 시대가 되면서 경쟁력을 상실하였고, 특용작물에 기댄 농업은 농사를 투기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만들어 낼 터전을 가지고 있지 못해 생긴 일이다. 귀농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나이 마흔을 넘긴 이들이란 것은 더 큰 문제였다. 그들의 시골이주는 지역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삶이 가지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주민의 시골은 기억 속에 있는 공간이다. 그것이 현실이 되어 부딪히면 시골생활은 끔찍한 상처로 남는다. 3년 이상 시골 정착률이 10% 미만이라는 것이 증거다. 시골로 돌아가기 위해 얻은 정보는 직접 생활하는 순간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날마다 각자만의 새로운 정보가 필요하고, 생활하면서 그것을 다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시골생활은 고통으로 다가오고 상처만 입은 채 되돌아갈 곳을 찾게 되는 것이다.

시골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삶의 공간이 바뀌면 삶의 형태도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시골이란 공간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익혀온 삶의 시선으로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는 일. 호기심으로 가득찬 삶이 되어야 단순한 시골살이에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삶은 다른 누구와 같을 수 없는 자기만의 삶이고 다른 이야기를 가진 드라마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나는 이집트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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