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저력 우리는 대구경북인] 항일 渡滿행렬 안동서 첫 재현

  • 이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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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2-28   |  발행일 2015-02-28 제2면   |  수정 2015-02-28
[대한민국의 저력 우리는 대구경북인] 항일 渡滿행렬 안동서 첫 재현
추산 선생의 손자 대곡문중 종손 권대용씨가 도만행렬을 준비하면서 선생을 추념하고 있다. <예미정 제공>

추산 권기일 선생 후손들
103년 만에 소달구지 상황극
“祖父 기막힌 심정 느껴져”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길에 오른 항일 도만(渡滿)행렬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100여년 만에 28일 안동시 정상동 예미정 별채에서 처음 재현된다.

안동문화원(원장 이재춘)이 주최하고 <사>문화동인(대표 원유록)이 주관하는 이 행사는 신흥무관학교 최후의 1인으로 기록된 항일순국지사 추산 권기일(權奇鎰·1886~1920) 선생의 가족들이 103년 전(1912년 3월2일) 종갓집을 버리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역사적인 도만에 나선 당시의 처절했던 모습을 그대로 복원, 퍼포먼스 형태로 재현한다.

도만행렬은 추산이 조부(권헌봉)에게 하직 인사를 드린 후 노모와 부인, 동생 가족 등 식솔들이 소달구지에 이삿짐을 싣고 고향마을을 떠나는 장면을 상황극으로 꾸몄다. 마을주민 200여명과 문화동인 회원, 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원 50명 등 모두 250여명이 참가해 한복 차림으로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이삿짐은 소달구지 2대에 궤짝과 이불, 가마솥, 돗자리 등 당시 사대부집 가재 도구와 함께 만주에서 새 삶터인 황무지를 일굴 곡괭이, 쟁기, 호미 등 농기구로 꾸려졌다. 당시 사대부 집안의 종손이 항일투쟁을 위해 망명길에 오르면서 천석지기 종중재산을 처분하고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직접 농사도 불사하겠다 했던 처절한 마음가짐을 보여준다.

추산 가족들은 구미 해평면 지역으로 이사를 간다며 삼엄한 일경의 감시를 따돌렸으며, 땅거미가 질 무렵 횃불을 밝히고 소달구지로 안동을 떠나 김천지역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신의주를 거쳐 만주 서간도지역 통화현 추가가 일원에서 미리 도만한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과 합류한다.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추산 선생의 손자 대곡문중 종손 권대용씨(67)는 “100년 전 종갓집을 비우고 만주 독립운동에 나선 할아버지의 기막힌 심정이 그대로 와 닿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면서 “행사를 통해 후손 세대들이 악독했던 일제의 만행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안동=이두영기자 victory@yeongnam.com

[대한민국의 저력 우리는 대구경북인] 항일 渡滿행렬 안동서 첫 재현
안동시 임하면에 위치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비밀결사 광복회를 이끈 경북인들’ 기획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

비밀결사 광복회 이끈 경북인의 혼 한눈에
내일부터 안동서 기획전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http://www.815gb.or.kr)은 96주년 삼일절을 맞아 3월1일부터 8월15일까지 ‘비밀결사 광복회를 이끈 경북인들’이라는 주제로 기획 전시전을 개최한다.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독립운동가들은 국외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섰다. 국내 지사들은 일제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광복단(풍기), 민단조합(문경), 조선국권회복단(대구), 달성친목회(대구) 등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의병전쟁을 계승한 단체와 계몽운동을 계승한 단체로 양분돼 활동했다.

1915년에 대구에서 결성돼 100주년을 맞은 광복회는 의병계열의 풍기광복단과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광복회는 만주 독립운동기지를 지원하고, 독립전쟁 수행을 그 목표로 삼았다. 경북인들은 상덕태상회(대구)·대동상점(영주)·삼달양행(단동)을 조직, 광복회의 주요 자금처이자 연락거점으로 운영했다. 또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제의 세금 수송 마차를 털었고, 전국의 친일부호를 공략하기도 했다.

1918년 1월 하순부터 광복회 회원들이 체포되기 시작해 총 사령 박상진(경주), 경상도지부장 채기중(상주), 임세규(영주), 강순필(상주) 등은 사형 순국했고, 많은 회원들이 고초를 겪었다.

광복회는 1910년대 무단정치가 자행되는 암울했던 시기에 의협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또한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알렸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광복회는 광복단결사대·주비단으로 이어졌으며, 이들의 의협투쟁 방략은 이후 의열투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안동=이두영기자 victor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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