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포항 영일 장기읍성과 소봉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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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3-27   |  발행일 2015-03-27 제38면   |  수정 2015-03-27
새들이 활공하듯 평화롭게 누운 산성
성 안의 마을 굴뚝선 연기가 피어나고
이따금 개짖는 소리 들렸다가 멈춘다
여진족과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아
전체 둘레는 1.3㎞…12개의 치성
마을 한가운데는 향교와 동헌터
송시열·정약용 선생 유배지로 유명
작은 봉수대가 있었다는 소봉대
섬은 방파제 생기면서 땅과 닿아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포항 영일 장기읍성과 소봉대
여진족과 왜구의 해안 침입에 대비해 쌓은 영일 장기읍성. 산성과 읍성의 역할을 했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가파르다. 오르막의 초입, 100년이 넘었다는 교회를 지나고 아래 마을이 저 멀리 보일 즈음 산은 긴박한 사선으로 떨어진다. 그 위로 하늘과 맞닿은 자리에 성벽의 가장자리가 보인다. 산마루에 쌓아올린 성벽이 산을 키워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곧 허물어진 듯 보이는 문이 열린다. 나무 한 그루가 파수꾼처럼 서 있고 그 뒤로 ‘배일대(拜日臺)’라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뒤돌아보니 멀리 희미한 산들이 가로누워 있다. 그 너머는 바다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포항 영일 장기읍성과 소봉대
장기읍성의 동문. 무너진 옹성 위에 ‘배일대’라 새겨진 바위가 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포항 영일 장기읍성과 소봉대
장기읍성 안의 마을.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포항 영일 장기읍성과 소봉대
영일 장기읍성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향교.

◆바다를 지키던 산정의 마을, 영일 장기읍성

영일 장기읍성은 고려 현종 2년인 1011년 여진족의 해안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처음 쌓았다. 처음에는 토성이었다. 그리고 성 안에 관아와 마을을 두고 언제나 바다를 지켜보았다. 그 뒤 세종 때인 1439년 석성으로 더욱 강건하게 쌓았다. 여진족은 세력을 키워 후금이 되고 청나라가 되었으며, 그때 동해안을 어지럽히는 자들은 왜구였다. 시계가 좋았다면 희미하게 누운 산 너머로 푸른 동해가 보였을 것이다.

성의 입구는 동문이다. 동문 외에도 서쪽과 북쪽에 문터가 남아 있다. 성벽 위에 오르면, 성은 산정의 굴곡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천천히 상승하고 평탄하다가도 깊이 떨어지고 날아오른다. 기류를 타고 나는 새의 활공 같은 느슨한 집중이다. 전체 둘레는 약 1.3㎞, 곳곳에 12개의 치성이 뻗어나가 있다. 서쪽으로는 산이 연이어지고 남쪽과 북쪽으로는 주변 마을이 멀다. 고립된 섬처럼 외로운 읍성이고 산성이다.

지금도 성 안 마을에 사람들이 산다. 마을을 둘러싼 공기가 조용하다. 이따금 개가 짖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멈춘다. 커다란 대숲들이 파도 소리를 낸다. 유실수에 꽃이 피었다. 바람은 잔잔하고 햇살은 따사롭다. 마을의 한가운데에 향교와 동헌 터가 남아 있다. 동헌은 면사무소로 이전해 보호하고 있다 한다. 향교는 문이 잠겨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몸을 치켜세워 슬쩍 들여다보니 꽤나 으리으리하고 깨끗하다. 매일 바다를 지켜보는 이도 관아도 이제는 없고 사람도 보이지 않지만,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고 창문 너머로 커튼이 살랑대고 텃밭이 가꾸어져 있다.

◆ 우암과 다산의 유배지 장기

섬처럼 고독하여 이곳은 유배지였다. 우암 송시열은 숙종 때 복상문제로 이곳으로 유배되어 약 5년간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주자대전차의’와 ‘이정서분류’ 등의 책을 썼고, 많은 시문을 남겼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우암을 통해 유학의 진수와 중앙정계의 동향을 접할 기회를 가졌고, 그로 인해 예절을 숭상하는 마을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우암 선생은 숙종 5년인 1679년 자신이 머물던 사관 안에 자생하던 느티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는 거제도로 떠났다 한다.

다산 정약용은 1801년 신유년의 천주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곳으로 유배되어 7개월 정도를 머물렀다 한다. 다산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의 삶과 고을 관리의 목민형태를 부옹정가,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오적어행 등 130여수의 글로 남겼다. 선생은 유배 도중 백서사건에 관련되어 그해 10월20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다.

우암과 다산 외에도 100명이 넘는 선비가 장기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들로 인해 장기에는 학문을 숭상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고, 서원에서는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다. 읍성 아래 장기초등학교 교정에는 우암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고목이 한쪽에 서 있고, 그 옆에는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가 나란히 서있다. 다산과 우암은 영일 장기읍성의 배일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포항 영일 장기읍성과 소봉대
소봉대. 풍광에 반한 많은 문인이 시를 남겼다.

◆ 소봉대

장기에 머물렀던 선비들이 자주 찾았다는 또 한 곳은 소봉대(小峰臺)다. 소봉대는 장기면 계원리에 딸린 조그만 섬으로 인근 복길 봉수대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작은 봉수대가 있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봉수는 무너져 흔적이 없고, 방파제가 생기면서 섬은 걸어서 닿을 수 있게 됐다.

낚시꾼이 많다. 붙박아 살아가는 사람은 없고 나고 드는 그들만 있다는 느낌이다. 옛날 궁벽한 갯마을이었을 적에도 어쩌면 풍광에 반해 나고 드는 문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도곡 이의현, 유하 홍세태 등 조선 중후기 선비의 작품이 기록으로 남아있고 특히 회재 이언적의 칠언절구는 소봉대 앞 시비에 새겨져 있다. ‘대지 뻗어나 동해에 닿았는데/ 천지 어디에 삼신산이 있느뇨/ 비속한 티끌세상 벗어나려니/ 추풍에 배 띄워 선계를 찾고 싶구나’ 오늘에도 절절이 파고드는 심상이다.

여행정보
포항 IC에서 구룡포 방향 31번 국도를 타고 간다. 구룡포읍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기면이다. 읍내를 관통해 장기교회 방향으로 올라가면 읍성이다. 읍성 바로 아래에 주차장이 있다. 장기면 을 지나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소봉대가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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