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령길 25-1은 이상화의 맏형인 이상정 장군 옛집… 앞길을‘이상정 골목’으로 부르자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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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17   |  발행일 2015-04-17 제34면   |  수정 2015-04-17
백부의 집에 살다 1923년 이사
20150417
다문협동조합이 운영하고 있는 바보주점은 이상정 장군의 고택이다. 고택 앞 골목길을 ‘이상정 장군 골목’으로 부르면 의미가 깊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시인 이상화가 늘 앞서 회자된다. 그 많은 인물 중에 대구시 달서구에 ‘상화로’란 도로명이 존재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상화에겐 상정(첫째), 상백(셋째), 상오(넷째) 등 3명의 친형제가 있다. 맏이인 상정은 독립운동가로, 상백은 사회학자와 체육인으로, 상오는 수렵인이자 동물학자로 모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들 3형제는 달서구 대곡동 산9번지에 함께 잠들어 있다.

이상정(1897~1947)은 국내보다 중국에서 장군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현 서성로 13길 7-16)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부친 이시우가 사망하는 바람에 우현서루 설립자 백부 이일우의 고택(중구 서성로 1가 44번지)에 살다 1923년에 지은 한옥(중구 계산동 2가 90번지·현 약령길 25-1)으로 이사를 온다. 이 한옥에선 현재 다문협동조합이 바보주막을 운영하고 있다.

이상정은 백부 밑에서 신학문과 한학을 배우다 15세 때 일본 도쿄 성성중학교를 마치고 미술학교와 상업학교를 거쳐 국학원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다. 그는 1917년에 귀국해 계성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한다. 2년 후 3·8대구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당시 계성학교 교사였던 백남채, 김영서 등은 만세운동에 가담해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그가 대구만세운동에 가담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상정은 이후 신명, 오산,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서양화 개인전을 열어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로 불리기도 했으며 서예에도 능했다. 그는 국내에서의 평범한 삶을 접고 23년 북만주로 망명해 2년간 민족교육을 하다 독립무장운동에 투신한다. 그는 중국에서 이연호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중국 국민당정부 서북국민연합총사령관 펑위샹의 참모로 활약하며 상하이와 난징에서 국민당정규군으로 항일전쟁을 했다. 32년 흥사단에 가입한 그는 윤봉길에게 폭탄을 구해주기도 하는 등 임시정부요인과 교류했다. 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충칭육군참모학교 교관을 역임하고 39년 김구, 김규식과 더불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임돼 신한민주혁명당을 조직해 중앙위원으로 활약한다.

41년 중국 육군유격대학 교수를 거쳐 이듬해 화중군사령부 참모로 난징전쟁, 한코우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운다. 42년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로 선임된다.

태평양전쟁이 종결됐을 때 그의 계급은 중국군 중장이었다. 그는 연합군 동경진주 중국군사령부 참모로 임명됐으나 상하이 교민의 요청으로 중국인에게 박해받는 교민의 신변보호에 전력투구하다 47년 모친상으로 대구에 왔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두 달 뒤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대구시민장으로 치러졌다.

위클리포유는 그의 고택(약령길 25-1) 앞길을 ‘이상정장군 골목’으로 명명하길 제안한다. 인근 이상정 고택 서편에 상화고택과 서상돈고택 등이 있어 의미도 깊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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