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락의 풍수로 본 명당] 묘골 순천박씨 처가 발복 명당처, 마을 구성원에게 관직·명예·재물을 가져다주는 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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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17   |  발행일 2015-04-17 제36면   |  수정 2015-04-17
[박재락의 풍수로 본 명당] 묘골 순천박씨 처가 발복 명당처, 마을 구성원에게 관직·명예·재물을 가져다주는 지세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는 사육신인 박팽년·성삼문·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의 한 분인 취금헌 박팽년(醉琴軒 朴彭年)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박팽년은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해 성삼문과 함께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즉위하자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돼 처형당했다. 이때 박팽년의 며느리(성주이씨)가 멸문지화를 피해 유복자(박일산)를 임신한 채 친정인 성주로 피신해 와 이곳에서 터를 잡게 된다.

그후 박팽년은 1691년(숙종 17)에 복원됐고 1758년(영조 34)엔 이조판서로 증직, 시호는 충정(忠正)을 받았다. 당시 그의 아들과 며느리의 묘소는 합장되어 마을 안산 중턱에 모셔졌으며, 현무봉을 의지한 마을의 안쪽엔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육신사(六臣祠)와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이 1479년(성종 10)에 세운 별당인 태고정(太古亭)이 자리하고 있다.

후손들은 처음 사당을 지어 박팽년 선생만을 기렸는데, 현손인 계창이 제삿날 사육신들이 사당문 밖에서 함께 서성거리는 꿈을 꾼 뒤로는 나머지 분들의 제사도 같이 지냈다고 한다. 정부는 1974~75년 ‘충효위인 유적정화사업’을 하면서 육신사를 건립하고, 2003~2011년에 걸쳐 충절문을 세우고 전통가옥을 복원했다. 지금의 순천 박씨가 묘골에 터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성주 이씨의 가문을 잇기 위한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500여년간 가문이 이어질 수 있었던 묘골의 입지는 어떨까.

당시 성주이씨가 선택한 묘골은 거처에서는 외부를 조망할 수 있으면서 외부로부터 은신처를 이룬 곳이다. 팔공지맥의 내룡맥이 팔공산~가산~황학산~장원봉으로 이어져 오다가 금무산이 기봉해 주산을 이룬 뒤 그 중심룡맥이 뻗어내려 현무봉을 이룬 곳을 의지한다. 현무봉은 다시 개장해 좌청룡과 우백호를 뻗어내렸는데, 특히 백호자락은 마을입지를 225도 이상 감싸면서 가까이서 백호안산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입지는 완벽한 장풍국을 이룬다. 마을을 감싸는 지세에 의해 분출된 명당지기는 바람에 흩어지지 않으면서 오래도록 머물 수 있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마을이 존속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주변 사격의 형태가 좋다. 음택공간은 내룡맥이 입수한 곳에 좌향을 이룰 때 명당발복을 이루지만 양택공간은 보국을 이룬 지세에 의해 천기를 받는다. 이곳 현무봉은 토형체(관직과 명예), 좌청룡은 목형체(귀인과 공직자), 백호와 안산은 금형체(거부나 재물)를 이루고 있으므로, 마을 구성원에게 좋은 지기를 조응·반사·응집을 하는 지세다. 백호자락을 의지해 청룡을 마주한 박준규 의원 생가 터(A)의 좌향입지는 다선의 국회의원과 3선의 국회의장을 이룰 수 있는 강력한 지기를 받고 있다. 안산을 마주한 박두을(고 이병철 회장의 부인) 여사의 생가 터(C)는 재벌가를 탄생하는 거부의 지기를 받았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묘골 입향조의 선영터(B)는 백호안산국의 중심공간에 터를 이루고 있는데 마을의 입지와 같은 북좌남향으로 자리한다. 순천박씨 가문이 절손되지 않고 번성할 수 있도록 마을의 안산에 자리해 마을구성원을 지켜주는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온 가문이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도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박팽년의 불사이군(不事二君) 정신이나 가문을 잇기 위한 아녀자의 도(道)는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묘골이 현존하면서 명당지기를 분출시켜 준다는 사실을 반증해주고 있다. 국풍환경설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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