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시리즈 통·나·무] 경북 郡단위 첫 아너소사이어티 성목용씨

  • 명민준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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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18   |  발행일 2015-04-18 제6면   |  수정 2015-04-18
“이웃 돕겠다는 이들이 멸치떼처럼 몰려드는 세상 꼭 왔으면”
20150418
어린 시절 겪은 6·25전쟁과 지독한 가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냉혹한 세상은 지금의 성목용씨를 있게 만든 소중한 자산이다. 제법 굵직한 통나무로 자란 성씨는 젊은 날의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저는 멸치는 한 마리도 못 먹습니다.”

연매출 1천만달러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섬유업체 <주>삼진의 대표이사. 기초의회 의장까지 올랐던 전직 2선 군의원. 그외 각종 사회 및 봉사단체에서도 수장을 지낸 인물.


6·25전쟁후 지독한 가난 탓
능인중학교 장학생 입학 불구
학업 포기하고 생활 전선에

문방구·메리야스 공장 거쳐
재봉틀 한 대 들고 사업 시작
남보다 적게 먹고 적게 자며
연매출 1천만달러 회사 일궈

어려운 학생 꿈 이룰 수 있게
장학회 설립후 14년째 후원
매년 이웃에 생활용품 지원도


이처럼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60대 노신사가 시골길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은 고급 외제차를 몰고와서는, 조금은 엉뚱한(?) 식습관 얘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와 식중진담(食中眞談)을 나누기 위해 지난 6일 고령군의 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 나이에 걸맞지 않은 남다른 편식습관으로 첫 인상을 각인시켜준 것이다.

그는 식탁에 오른 멸치를 옆테이블로 치웠다. 그는 “어린시절 시골 촌구석에서 너무 어렵게 자라다보니 생선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20세 넘어서 처음 먹어봤는데 비려서 못먹겠더라”고 말했다.

기자의 다소 짓궂은 질문에도 웃음지으며 우문현답을 내놓을 줄 알던 노신사.

이번주 ‘나눔시리즈 통나무’에서는 경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1호 아너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회원인 성목용씨(68)를 소개한다. 경북 23개 시·군 중 군단위에서는 처음으로 나온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다.

성씨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고령군 멍더미(지금의 성산면 지역)의 한 집안에서 육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걸음마를 떼고 동무들과 소꿉장난을 시작할 무렵, 6·25전쟁이 터지면서 성씨 가족은 몇 없던 세간살이를 정리해 대구로 피란길에 올랐다.

몇개월 뒤 다시 돌아왔을 때, 경남 서북지역과 대구를 잇는 유일한 길이었던 ‘고령교’가 끊겨 있었다. 유독 위장병을 심하게 앓았던 성씨 아버지는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씨 어머니는 고민 끝에 끊겨버린 고령교를 대신해 들어선 나루터에서, 배를 타는 이용객을 상대로 밥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살던 집이라고는 나루터 주변에 있던 나무를 얹어, 그 위에 짚을 덮은 것이 고작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만 같던 성씨의 집은 실제로 몇해 뒤 홍수가 일어났을 때 떠내려 가버렸다. 다행히 가족 중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순식간에 집이 사라져버려 마당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

성씨는 “어린시절 너무 힘든 일을 겪어서인지, 고령에서의 기억은 여기까지가 전부”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고령에서는 더이상 먹고 살 길이 없다고 판단한 성씨 어머니는, 친정식구들의 도움으로 대구로 이주했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어도, 성씨는 공부를 곧잘하는 편이었다. 학교에 다닐 형편은 안됐지만, 다행히 성씨는 당시 명문으로 손꼽히던 능인중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버지의 병세는 더욱 나빠졌고 어쩔 수 없이 성씨도 학교를 관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이 겨우 열다섯. 그의 어린 어깨는 아픈 아버지와 병수발에 지친 엄마, 여동생에 짓눌릴 수밖에 없었다.

학업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기에, 성씨는 학교 옆 문방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매번 문방구를 찾는 학생들이 부러워, 꽁무니를 쫓아가다가 사장에게 혼나기도 일쑤였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성씨는 돈을 조금 더 벌 수 있는 메리야스 공장에 취업했다.

무엇이든 남들보다 빨리 익히는 것은 성씨의 남다른 특기였다. 3년간 재단 기술을 익힌 뒤, 성씨는 재봉틀 한대를 들고 혈혈단신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세상과의 첫 승부를 시작했다.

성씨는 “기껏해야 메리야스 몇 장을 파는 것이 전부여서, 갑자기 돈을 번 것은 아니다. 조금씩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아끼고 저축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남들보다 적게 먹고, 적게 자던 노력은 성씨에게 부(富)라는 보상을 안겨다 줬다.

그토록 꿈꾸던 고급 승용차에 몸을 싣고, 자신의 회사로 출근하던 평소와 다름 없던 어느 날, 성씨의 눈앞에 가난해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스쳐지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창 밖으로 보이던 학생에 투영된 ‘환상’이었다.

이 일로, 나름의 성공가도를 달려오는 동안 성씨는 그날 어려운 이웃을 잠시 잊었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 성씨의 반성은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적지않은 금액을 내놓고, 꿈을 이룰 것이라는 의미의 ‘성(成)’자와 아내의 법명을 딴 ‘보’자를 합쳐 2001년 ‘성보장학회’를 설립했다. 올해로 14년째, 지역의 어려운 학생들이 성보 장학회의 도움으로 꿈을 이어가고 있다.

성씨의 이웃사랑은 갈수록 깊어졌다. 매년 라면과 휴지, 쌀 등의 갖가지 생활용품을 준비해 주변이웃을 도왔다.

그런 그가 경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원 기탁을 제의한 것은 2013년. 성씨는 당시 “나름대로 성공해서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의 도움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그만두거나, 꿈을 이어가지 못하는 이웃들이 꼭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며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인사를 대신했다.

인터뷰를 마무리지을 때쯤, 성씨는 식탁 위에 놓인 멸치반찬을 집어 들었다. 성씨는 “이 작은 생명도 떼지어 다니며 서로를 도울 줄 안다. 여유가 생기면 주위에 어려운 이웃을 한 번쯤 도울 줄 아는 이들이 멸치떼처럼 몰려드는 세상이 꼭 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명민준기자 minju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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