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간신’ 민규동 감독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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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5-22   |  발행일 2015-05-22 제37면   |  수정 2015-07-10
“‘간신’에 육체의 탐닉 없다…노출 많지만 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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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던 걸까. 민규동 감독이 다소의 부담감을 뒤로 하고 연산군을 다시 스크린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궁금했다. ‘간신’은 조선왕조 최대의 피의 역사를 써내려간 연산군 시대를 담았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을 통해 나름의 장르적 미학을 확보하고 있는 민규동 감독의 일곱째 장편영화이자 첫 번째 사극이다.

새로울 게 없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그의 창작적 의지와 열정을 잘 알기에, 익숙하다 못해 식상하기까지 한 연산군 이야기를 사극의 출발점으로 택한 그의 의도가 궁금했다. 역시나 민규동은 치열한 권력 다툼의 혼란속에서 연산군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했던 희대의 간신 임숭재와 조선 팔도의 1만 미녀를 강제 징집했던 사건인 ‘채홍’에 주목했다.

민규동은 “실록은 항상 왕의 시점으로 되어있는데 간신의 시점으로 보면 또 다른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것 같았다”며 “실제 기록에 기초해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 간신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영화 속 간신들을 통해 권력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양한 공간과 인물을 통해 늘 강렬한 화법을 고민하고, 시도해왔던 민규동이다. ‘간신’은 그 외연을 넓힐 수 있는 시험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지점에 놓여있다. 무엇보다 영화의 한 컷, 한 컷에 당시의 시대상황을 재해석하고, 이를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와 이야기로 완성해낸 솜씨는 정말 놀랍다. 영화적 상상력과 에로티시즘 미학으로 진정한 승리를 이룬 민규동 감독을 주목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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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어릴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항상 모던한 얘기, 당대의 이야기만 하게 되더라.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하겠지라는 심정이었는데 채홍사라는 소재를 알고 거기에 엄청난 간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연산군은 워낙 많이 다뤄졌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는데 운평으로 강제 징집된 1만명에 달하는 여인에 대한 행적은 거론조차 안됐을 만큼 터부시되고 무시됐다. 중세의 여자들이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뤄졌는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채홍사는 연산군 행적중에 가장 문제가 많은 지점이었다. 그의 몰락을 가져온 이 중요한 지점이 왜 그동안 표현이 되지 못했을까. 그 문제제기에서 ‘간신’이 시작된 것 같다.”

▲첫 사극이다. 녹록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사극을 연출해 본 다른 친구들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극 연출을 권유하라고 하더라. 영원히 산산조각이 날 만큼 힘들어서 죽을 거라고 하면서.(웃음) 찍어보니까 물리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장르더라. 일단 돈과 시간이 엄청나게 필요하고 연출에 방해되는 요인이 너무 많다. 촬영순서도 연출의 리듬이 아니라 외부적인 상황에 좌우된다. 옷 갈아입는 데 몇 시간, 분장에 몇 시간씩 할애한다. 그런데도 스태프들은 사극은 이렇게 찍어야 한다고 그러는 거다. 저항할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어 애는 타는데 수염이 떨어졌다고 배우를 데려가질 않나.(웃음) 감독과 배우 사이에 방해되는 요소들이 굉장히 많은 장르구나 생각했다. 사극을 정말 너무나 편하게 잘 찍으시는 이준익 감독님이 존경스럽더라. 정말 감독이 가지고 있는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내게 만든다. 감독이라면 한 번은 꼭 거쳐가야 할 장르라는 생각이다.”

▲극 중 여자가 다뤄지는 방식이 파격적이다.

“에로틱한 부분은 여성들을 다룰 때 항상 조심스럽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방식을 찾았는데 이번에는 왕의 폭정에 희생되는 여자들의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고 가감없이 보여주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간신’을 단순히 야한 영화로 포장해 대중의 호기심을 갖게 만들기에는 중세의 홀로코스트적인 상황에 놓여있던 여자들의 상황이 그러질 못했다. 그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폭력의 역사를 인정하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정말로 혹독한 시기였다. 그런데 그게 중세였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유럽이든 아시아든 당시의 관습법을 보면 왕과 사람이 아닌, 왕의 소유물로 존재되었던 시대였으니까.”


사극, 감독감각 극한으로 끌어내
감독이라면 한 번 거쳐야 할 장르

 

연산군 역할은 어떠냐?
주지훈에게 물으니 임숭재 선택
연산 역 김강우는 처음부터 반색

 

임숭재를 살려둔 것은
민초의 삶 살아보게 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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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이라서 에로티시즘 표현이 더 자유로워진 건 없었나.

“사실 영화에서 표현된 장면들이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로마황제처럼 절대권력을 가진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 부분에선 좀더 표현의 수위가 자유로운 건 있다. 여성끼리는 격투신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성적 욕망을 다투는 신이 아니었기에 동성애라는 지점의 고민은 없었고 다만, 둘이서 싸울 때 서로가 적이었다가 승부가 났을 때 서로 껴안고 왕의 칼에 맞서는 그 이미지. 여성들 간의 연대감과 유대감이 굉장히 중요했고 우리가 적이 아니고 끝내 살아남아서 왕에게 칼을 들이밀자고 각성하고 성숙해 있는 여자들, 그 여자들이 그렇게 성숙의 순간이 있다면 그 앞에 나오는 벌거벗은 모멸감의 순간들의 이유가 살 것 같았다.”

▲노출신이 많은 만큼 배우와 감독의 신뢰감이 더없이 중요해 보인다.

“배우는 항상 힘들고 어려운 존재다. 불안으로 영혼이 잠식당하기도 하고 너무 쉽게 관객들에게 추앙받고 또 손가락질로 한 번에 나락에 떨어지는 존재다. 특히나 여배우들의 노출에 있어서 우리 사회는 쉽게 낙인을 찍고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고 피해의식이 있다. 그렇다면 영화 속 노출의 정당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나는 물론 배우들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는 지점이어서 그 과정을 모두 콘티로 만들어 모든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어떤 것이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지 의견수렴을 거쳤다.”

▲여배우들과 그 부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간신’이 노출은 굉장히 많지만 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육체의 탐닉은 등장하지 않는다. 야한 것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관객들은 오히려 굉장히 슬프게 받아들일 것 같다. 배우들에게도 그런 정서적인 면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면 의미있는 퍼포먼스이고 보통의 배우들이 할 수 없는 용기있는 선택이자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얘기했다. 나 역시 노출신이 나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동성애를 다룬 ‘끝과 시작’도 있었지만 그건 단편이었고 노출이 없었다. 샬롯 갱스부르는 과감한 노출을 보여주는 데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반면 우리는 왜 찍기도 전에 항상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질까. 그 간극의 차이는 뭘까. 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를 가진 좋은 관객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는 그런 관객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 연기를 잘하는 게 중요하지 노출의 양은 중요하지 않다. 잘 해낸다면 쓰고 못하면 쓰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연기는 못하는데 노출이 나오면 보기 민망하고 착취당하고 있는 느낌이 들 테니까. 정말 신경이 곤두서고 생각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혹 배우들이 다른 배역을 원하지는 않았나.

“처음 (주)지훈씨에게 숭재 역을 주면서 ‘연산군은 어때?’라고 한번 툭 던져봤다. 연산군도 굉장히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굉장히 좋은 놀이터라고 생각한다며 한번 고민해보는 것 같더니 결국에는 숭재를 택했다. (김)강우씨는 처음부터 연산군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고 반색하더라. 이게 묘한 건데, 과거 ‘내 아내의 모든 것’ 캐스팅 당시 류승룡씨에게 카사노바 역할을 주었을 때 전 스태프가 반대했다. 카사노바라면 원빈 정도는 돼야지 왜 류승룡이냐는 거다. 여자 스태프들은 특히나 반대가 심했다.(웃음) 그런데 이번에 강우씨에게 연산군 역을 줬을 때는 모든 스태프가 다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말했다. 한번도 그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배우 자체가 나는 텍스트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간을 배우가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영화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렇게 보면 역할은 어느 정도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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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임숭재를 끝까지 살려뒀다. 어떤 연민이 느껴진 건가.

“간신은 왕을 속여서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탐한다. 이게 간신의 기본 생태다. 난 그건 5분 안에 다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프닝부터 쿨하게 다 보여줬다. 왕을 속여서 200명의 신하를 숙청하고 왕위에 올라선 갑자사화의 주역으로 우뚝 섰던 자의 모습들 말이다. 그렇다면 이후 간신의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까. 이 지점에서 임사홍, 장녹수, 유자광 등은 전형적인 간신의 모습을 취하는데 숭재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큰 그림을 보면 연산군의 충실한 하수인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로 인해 크고 비대해진 괴물이고, 연산군조차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결국 둘 다 괴물인 거지. 간신을 기존의 방식대로 박제화시키면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임숭재가 왕을 돼지우리에 가둬놓는 장면은 그런 고심 끝에 만들어졌다. 연산군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인물인데 그에게 죄를 묻는다면 어떤 벌이 좋을까, 최악의 벌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돼지 속에 갇혀 미쳐가면 좋을 것 같았다. 임숭재 역시 거기서 자결을 시도하지만 쉽게 죽이는 것 보다 이름없는 백정으로 간신을 조롱하며 살아가는 민초의 삶을 살아보게 하고 싶었다. 임숭재가 일관되게 달리는 광기와 달리 사유화하는 모습을 보여준 지점이다. 그런데 그게 조금은 감독의 강박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그 점이 이 영화가 남긴 과제인 것 같다.”

▲다음의 영화적 관심사는 무엇인가.

“1949년도 해방공간 이야기를 액션 누아르 장르로 풀어낸 시나리오가 있다. 류승완 감독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된다. 사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장르는 SF다. 내가 ‘스타워즈’ 세대이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나 아이디어를 많이 공유하는 편이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로 데뷔를 했는데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엉뚱하게 여고생 귀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보고 신기해한다. 그런가하면 요즘은 역사의 거대한 운명 속에 인간성을 지켜낸 인물들에 관심이 간다. 그리고 주체적이지 못하고 억압받는 여자들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다. 내가 좀 그런 이야기들을 통해 위안을 찾는 편이다.”

▲동생이 제작사 수필름의 대표로 있다. ‘간신’도 그렇지만 매번 호흡을 맞추고 있다.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많이 이해해주니 좋은 점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고 말이 안 통하는 제작자가 없다.(웃음) 보통의 경우는 제작자가 감독을 무시하지 못하는데 가족이니까 그런 관계가 설정되지 않는다. 장단점이 동시에 존재하는 존재랄까. 하지만 나에겐 누구보다 든든한 힘이 되어 준다. 내가 단편영화를 할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제작비를 대주던, 생계대책도 없는 무모한 영화감독의 동생으로 고생을 참 많이 했다.”

▲당신의 창작 동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언제부터인가 사는 게 절박해지기 시작했고, 인생이 길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 영화를 만든다면 나와야 할 이유가 있는, 의미가 있는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쏟아지는 영화의 홍수 속에 그냥 아무렇게나 소비되는 영화가 된다면 거기에 열정과 시간을 바친 인생도 아깝고 에너지도 아깝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뭔가 새롭게 우리의 뇌를 자극하고 영감을 주고 저항군이 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나름 애써왔던 것 같다. 그게 창작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사람들이 좀더 새롭고, 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행복한가.

“궁극적으로는 행복하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 항상 고통스럽긴 하지만. 마치 갓난아이를 낳고 산통을 잊기도 전에 또 아이를 낳는 과정이랄까. 이를 즐겨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그래서 항상 내 자신에게 궁금했다. 난 언제쯤 즐기는 방법을 터득할지 말이다. 만약 그 방법까지 터득한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웃음)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김현수(프리랜서) dada24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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