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남의 차마고도 기행] 람인70년대차는 새로 조성한 차밭에서 채취한 찻잎으로 부드러운 풍미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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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6-26   |  발행일 2015-06-26 제35면   |  수정 2015-06-26
[김현남의 차마고도 기행] 람인70년대차는 새로 조성한 차밭에서 채취한 찻잎으로 부드러운 풍미가 특징
수람인칠자병차70년대 보이차(왼쪽)와 내비 모습.

복록공차와 함께 윈난성의 봉산에서 생산된 대표적인 보이차가 ‘수람인칠자병차70년대(水藍印七子餠茶70年代:이하 람인70년대)’이다. 58년부터 시작된 생산량의 증가와 66년의 문화대혁명은 보이차 생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야생의 노차수(老茶樹)는 품질이나 생산 효율이 떨어진다고 여겨져 대부분이 벌채 되었다. 50년대의 복록공차를 만들 당시의 찻잎은 야생의 노차수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찻잎을 채취하였다. 람인70년대는 새로 조성한 차밭에서 채취한 찻잎으로 잎이 많이 달리며 크기가 조금 작기 때문에 부드러운 풍미를 가지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복록공차는 민영의 다장(茶莊)에서 만든 것이지만, 람인70년대의 것은 당시 국영 다창이었던 맹해다창의 제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작은 민영 다장에서 만들었다고 추측된다. 50년대 후반부터 민영의 다장은 자유롭게 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자, 일부의 민영 메이커는 국영 공장의 하도급을 받아서 차를 계속 생산했다. 순녕다창(順寧茶廠:그 후 봉경다창(鳳慶茶廠)으로 개명)은, 1938년 봉산에서 창업을 하고 홍차를 만들었다. 이 메이커가 맹해다창으로부터 하도급을 받고 람인70년대를 만들었다고 추측된다.

람인70년대의 내비(內飛:찻잎에 묻힌 네모진 종이)에 ‘서쌍판납다이족자치주맹해 다창출품’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맹해다창에서 만든 인쇄지만, 포장이라든지 기술적인 면에서 문제가 좀 있다. 일반적으로 내비는 찻잎 밖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지만, 람인70년대는 찻잎 속에 파묻혀 있다. 무엇인가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내비의 사진은 차를 부셨을 때 꺼낸 것이다.

또 람인70년대의 직경은 약 23㎝이며, 중량은 만들어진 당시는 400g이다. 같은 시기의 다른 병차는 약 19㎝, 360g이다. 70년대 생산된 것으로는 가장 큰 보이병차이다. 게다가 압연이 느슨하기 때문에, 해가 거듭될 때마다 병차의 몸집은 커지고 있다. 맹해다창에서는 1970년대에 많은 종류의 병차를 만들었지만, 이러한 형태와 이러한 압연을 한 보이병차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람인70년대’는 90년대 초기 홍콩에 있던 것을 대만의 수집가가 매입을 하고, 2005년에 곤명의 소매점으로 건너갔다가 2007년 10월에 상하이에까지 이르게 된다. 복록공차와 같이 ‘람인70년대’도 타이 방콕의 차 상인이 매입을 한 기록이 있다. 생산된 절반 정도가 방콕의 차 상인의 창고에, 나머지 절반이 홍콩 차 상인의 창고에서 보관된다. 방콕에 있었던 것은 한시적이었으며, 대부분은 다시 홍콩 차 상인이 매입을 한다. 방콕의 것과 홍콩의 것은 포장지의 인(印)자의 색이 조금 다른 것과 7장 1조의 대나무 껍질로 포장을 하는 방식에서 방콕의 것은 갈대로 묶었고, 홍콩의 것은 철사로 묶었다.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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