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33] 아동문학가 혜암 최춘해씨와 도서출판 그루 이은재 발행인

  • 김수영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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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6-30   |  발행일 2015-06-30 제23면   |  수정 2015-07-10
문학계 30년 선후배…‘문학 열정’에 서로 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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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선생이 10년동안 아동문학을 무료로 강의해온 도서출판 그루 사무실에서 혜암 최춘해 선생(왼쪽)과 이은재 발행인이 환하게 웃고 있다. 이지용 기자 sajahu@yeongnam.com

주변의 사람들을 한번 둘러보자. 가족을 빼고 30년 넘게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봐온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직장생활을 오래한 사람의 경우 직장동료 정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꾸준한 만남을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몇십 년간 꾸준히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깊은 인연인 동시에 좋은 인연이 아닐까.


◇ 혜암 선생에게 李 발행인은


“2001년부터 시작한 아동문학강의
강의실 못 구할 때 사무실 내주며
아낌없이 지원해 준 고마운 사람”


◇ 李 발행인에게 혜암선생은


“10년간 단 한번도 쉬지않고 수업
강의에 대한 책임감·애착에 감탄
직접 쓴 글 보여주며 문학 공부”


아동문학가 혜암 최춘해 선생(84)과 도서출판 그루 이은재 발행인(70)은 1983년 처음 만난 뒤 지금까지 이처럼 꾸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3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이 발행인은 혜암 선생과의 만남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1983년 여름 어느 날이었습니다. 경북아동문학회의 전신인 경북글짓기교육연구회 발기인 모임을 제 사무실에서 가졌습니다. 그때 이오덕 선생님의 소개로 혜암 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경북의 한 초등학교 교감이라고 하셨습니다. 체구는 작으셨지만 뚜렷한 인상을 남겼지요. 차분한 성격에서 나오는 조용한 언어들이 편안하면서 친근했는데 마치 이웃집 아저씨처럼 느껴졌습니다.”

경북아동문학회는 그때부터 매월 첫째주 토요일마다 도서출판 그루에서 월례모임을 가지고 있다. 혜암 선생은 이 모임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그 모임은 아직까지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이들의 만남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 발행인은 2001년 봄으로 기억했다. 평소 말이 별로 없으시던 혜암 선생이 갑자기 찾아오셔서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그때의 대화에 대해 혜암 선생은 이렇게 설명했다.

“교사로 수 십 년간 일하다가 98년 정년퇴임했습니다.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어 고민하던 중 제가 문학공부를 오래했으니 이것으로 봉사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60대 초반에 아동문학을 시작했는데 교사이자 아동문학을 배운 사람으로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자연스럽게 아동문학을 가르치자는 답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2001년부터 10년간 아동문학 강의를 했습니다.”

혜암 선생은 아동문학을 무료로 가르치고 싶었지만 교육 공간을 찾기가 힘들었다. 복지관·도서관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자신의 계획을 밝혔지만 어느 곳도 장소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찾아간 사람이 이 발행인이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그를 찾아갔는데 이 발행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고민 한번 하지 않고 경북아동문학회의 모임도 여기서 하는데 아동문학 강의도 마음껏 하라고 답했다.

“워낙 여러 곳에서 거절을 당했다보니 이 발행인이 허락해주리라는 기대는 걸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하자마자 좋다며 얼마든지 쓰라고 하는데 너무 고마웠지요.”

그런데 공간 대여만이 아니었다. 매주 2회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수업을 하는데, 냉난방비 등의 전기료도 일절 받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직원들이 퇴근한 뒤 강의를 하기 때문에 문을 닫고 정리하는 등의 사무실 관리를 하는 야간 업무가 있는데, 이것에 대한 부담도 도서출판 그루에서 고스란히 안고 있다.

“도움을 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수료식에 주는 수료증과 상장 등도 모두 이 발행인이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고마움을 넘어서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늘 신세만 지는 것 같아….”

혜암 선생이 이렇게 말하자 이 발행인은 손사래를 치며 “내가 아니라 직원들이 수고를 하는데 이를 직원들이 수고라 생각하지 않는다. 워낙 오랫동안 하다보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이 발행인의 말에 따르면 직원들이 연로하신 데도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혜암 선생을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 야간수당을 반납하고 근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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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까지 10년간의 무료 강의를 통해 300명이 넘는 수료생을 배출한 뒤 혜암 선생은 그 강의의 강사 자리를 제자에게 물려줬다. 물론 장소는 그대로 도서출판 그루의 사무실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긴 세월을 함께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 이 발행인은 혜암 선생이 연로하신데도 불구하고 10년간 단 한번도 쉬지 않고 매주 2차례씩 수업을 꾸준히 해온데 대해 감탄했다. 수업을 하는 월요일과 화요일이 공휴일이라도 수업을 한번도 쉬지 않았다. 이에 대해 혜암 선생은 “휴일 수업때 출판사의 직원들이 나와서 근무를 해야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수강생들을 생각하면 휴강을 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혜암 선생의 강의에 대한 책임감과 애착이 강했다는 의미이다.

혜암 선생은 이 발행인의 성실하고 겸손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처음 아동문학 강의를 할때만 해도 지금처럼 그루의 사무실이 넓지 않았다. 대부분의 지역 출판사들처럼 영세해서 공간이 좁았다. 하지만 싫어하는 기색없이 늘 반갑게 맞아주었다. 게다가 만남이 거듭되면서 이 발행인의 사생활을 점점 깊이있게 알게 됐는데 이것이 사람을 더욱 감동시켰다.

이 발행인은 8남매 중에 일곱째로 태어났는데 집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농사일을 돕다가 배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일자리를 찾아다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인쇄일을 하게 됐다. 한 우물을 판다는 생각으로 출판 디자인도 어깨 너머로 배우는 등 다른 직업에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출판업에만 매달려왔다. 일 밖에 몰랐던 그의 성실성이 인정을 받으면서 일거리는 늘어났고 출판사는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자 이 발행인은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던 글쓰기와 학업을 이어가고 싶었다. 수필을 쓰는 것으로 본격 글쓰기에 매달리다가 시까지 쓰게 됐다. 94년 수필가로 등단한 뒤 2012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나무의 유적’이 당선되어 시인으로도 등단했다.

그는 학업에 있어서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줬다. 10여 년 전 중고등 과정의 검정고시를 시작으로 대학·대학원까지 졸업했다. 특히 대학원의 경우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과 고려대 인문정보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나왔다. 대학과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시를 독학으로 공부하던 그는 자신이 쓴 수필이나 시를 혜암 선생에게 보여주며 문학공부를 했다. 사실 혜암 선생의 문학 강의를 듣고 싶었지만 늘 일과 뒤늦은 공부에 쫓기던 그는 마음만 있고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다. 강의를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쓴 글을 혜암 선생에게 보여주며 일종의 개인교습(?)을 받은 셈이다.

“수필가로 등단한 뒤 혜암 선생님과 같은 문학의 길을 걷게 되면서 더 자주 뵙게 되고 문학계의 선배로서 더욱 강한 애정도 갖게 됐습니다. 선생님이 강의실을 좀 빌려달라고 하시는 것에 대해 바로 사무실을 쓰시라고 한 것도 같이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선생님이 좋은 일을 하시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발행인이 말하자 혜암 선생은 자신이 수업 시간에 가장 자주 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이 발행인이라는 말을 했다. 학업에 대한 미련으로 만학도로 대학원까지 나온 이 발행인이 수필가로 시인으로 등단하고 개인작품집까지 내는 등 배움에 대해 누구보다도 치열했던 것을 수강생들에게 수시로 들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산교육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도 먹고살기 바빠서 직장생활 외에 따로 배우는 것을 쉽게 시도하지 못하는데 이 발행인은 환갑이 넘어서 미처 못한 학업을 마무리했습니다. 늘 배움에 목말라 했고, 이 갈증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사는 것, 즉 잠 한숨 덜 자고 쉬는 시간 줄이는 것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평생의 꿈이었던 학업도 시인의 꿈도 이룰 수 있었지요.”

혜암 선생은 이 발행인이 바르게 살아온 삶의 본보기가 될 만한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아동문학을 가르치면서 수강생들에게 수시로 삶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데, 삶의 소중함을 제대로 일깨우게 하는 사람이 바로 이 발행인입니다. 문학도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문학을 배우고 창작활동을 하는 것은 결국 값지고 보람된 삶을 위해서 입니다. 이 발행인은 삶에 대한 뜨거운 애착을 가지고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지요. 특히 그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수강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나이가 어린데도 늙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이는 많은데도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젊은 사람이 있다. 늘 청년 같이 사는 사람들이다. 혜암 선생과 이 발행인을 취재하면서 이들의 나이를 잠시 잊어버렸다. 분명 외모는 노년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정신은 아직 삶에 대한 뜨거움이 느껴지는 청년, 그것이었다.

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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