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금 내놓아 주목받은 파키스탄 출신 귀화 한국인 김강산 오션산업 대표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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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7-03   |  발행일 2015-07-03 제36면   |  수정 2015-07-03
유창한 경상도 사투리…“다문화가정도 한국사회에 도움된다는 것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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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산씨가 오션산업 사무실인 경산시의 한 아파트 앞에서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그는 100만달러 수출탑을 달성한 기업인이다.


아버지 사업 돕다 한국인 아내 만나
2011년 귀화…장모 姓따라 김씨로 해

무슬림은 테러만 하는 집단 아니다
경북 시군 장학금 전달 끝나면
호남 등 전국 154개 시군 확대 계획

한국말은 살면서 자연스럽게 익혔다
서울서‘아지메 물좀 주이소’ 했더니
물은 안주고 웃기만 하더라

경북도-펀자브주 다리역할 하고싶어

한국은 단일민족국가인가? 아니다. 어떤 민족이든 100% 순혈 민족은 없다. 한민족도 실상 유구한 역사 속에 핏줄이 섞이고 혼합됐다. 우리의 역사와 성씨의 유래가 그걸 증명한다. 같은 언어와 문자, 같은 문화적 관습은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특히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들로부터 탄생한 ‘단일민족, 한 핏줄’ 이데올로기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구성원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동인이 됐다. 2014년 통계로 한국의 전체 다문화가정 자녀는 약 20만명이다. ‘한국=단일민족’이라는 등식은 이제 깨졌다.

김강산 <주>오션산업 대표(34)는 파키스탄의 명문가 출신이다. 김 대표의 파키스탄 이름은 ‘배살’이었으나 2011년 한국으로 귀화해 경산 시민이 됐다. 그는 파키스탄을 비롯해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 등지에 중장비를 수출하고 있다. 성공한 기업인이기도 한 그가 지난 달 경주시와 상주시에 각각 1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메르스와 IS 때문에 중동국가와 무슬림이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가운데 그를 만났다. 유창한 경상도사투리에다 건장한 체격, 서글서글한 눈매가 눈길을 끌었다.

▲장학금을 여러 번 전달했던데.

“나 역시 한국에 살고 있는 다문화가정의 일원이다. 한국 정부가 힘들게 사는 다문화가정에 여러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다문화가정이 받기만 한다는 이미지로 고착될까봐 염려스럽다. 한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문화가정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국민으로서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또 무슬림이 테러만 일삼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란 것도 몸소 실천하고 싶었다. 경주와 상주 이외에도 칠곡, 성주, 청도에도 전달했다. 처가가 있는 고령엔 200만원, 내가 살고 있는 경산에는 300만원을 전달했다.(웃음) 기부금액은 총 3천만원 정도 될 것 같다. 앞으로 능력이 된다면 경북도내 23개 시·군에 다 전달하고 싶다.”

▲23개 시·군에 나눠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코란에 ‘사다카 자리야’란 말씀이 있다. 살아서 복을 받아 살지만 죽어서도 복을 받으려면 선행을 쌓으라는 뜻이다. 예컨대 학생이 10만원의 장학금을 받았다면 그 학생이 커서 10만원 이상의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복은 준 만큼 되돌아온다. 23개 시·군에 각각 하는 것은 처음이다. 남들이 하지 않은 것을 하고 싶다. 경북이 끝나면 호남에, 그리고 전국 154개 시·군에 100만원씩 전달할 마음을 먹고 있다. 직접 찾아가서 전달하고 싶은데 북한에도 하고 싶다. 남과 북이 통일되면 전 세계 국가 가운데 강한 나라가 된다. 전 세계 지식인과 바이어들이 통일 코리아를 찾을 것이다. 그야말로 넘버원이 된다.”

▲한국에 귀화하기 전에도 선행을 쌓았나.

“그렇다. 사람은 죽으면 다 빈 손으로 간다. 힘든 이웃을 도와주고 선을 베풀면 기업도 알게 모르게 잘 된다. 이때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파키스탄에 계시는 아버지가 모범을 보였다. 가난한 가정 출신 남녀가 결혼식을 하기 힘들 때 합동결혼식을 열어주곤 했다. 마약퇴치 지원사업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어려운 분들에게 많이 나눠준다. 남들은 바보라고 하지만 아버지께선 그렇게 살아왔다. 나도 처음 귀화해선 조용하게 기부했다. 동생과 함께 동네 경로당, 노인회관, 복지관 같은 곳을 다니며 쌀, 라면 같은 것을 주었다. 사실 사진도 안 찍었다. 독거노인들이 외국인한테 이렇게 받아도 되겠나 하면서 등을 두드려 주더라. 무슬림은 사람을 죽이고 테러만 일삼는 집단들이 아니다. IS나 탈레반은 나쁜 사람들이다. 나는 한국에서 자원봉사자로 인정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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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면서 문제점도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한국에 오는 외국 여성은 대부분 20대인 반면 결혼하는 한국 남성은 혼기를 놓친 40~60대가 많다. 남성보다 여성이 오래 산다. 여성 혼자 살아남아 불쌍하다. 남편이 죽으면 더 힘들다. 그런 사람을 찾아가 쌀과 라면을 준다. 그들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오빠라고 부른다. 파키스탄이나 중동 여성은 없고, 동남아시아 출신이 많다. 앞으로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 2세, 3세 문제가 커질 것이다. 다문화가정을 꾸리고 있는 국가가 90개 이상이다. 다문화지원센터에서 한국어를 가르치지만 90개 나라의 말을 다 커버할 수 있는 전문강사가 부족하다.”

▲어린 시절 파키스탄에서의 삶이 궁금하다. 한국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파키스탄 펀자브주 와지르아바드시(市) 출신이다. 초·중·고교를 거기서 나왔다. 모라나 자파르 알리칸 대학에서 체육과 미술을 전공했다. 씨름과 레슬링의 일종인 카바디를 했다. 시 단위 카바디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배구, 축구, 육상 등 모든 운동을 좋아한다. 11명이 참가하는 줄다리기 선수도 했다. 6남매 중 장남으로 2006년 처음 한국땅을 밟았다. 아버지는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중장비 임대업을 했다. 주로 한국과 거래를 했는데 인터넷을 통해 직접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던 중 한국의 몇몇 회사와 연결돼 수입업체를 알게 됐다. 그 가운데 한 곳이 대구에 있는 업체였고 중개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지금의 아내다.”

▲어떻게 사귀다 결혼에 이르렀나.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 사진을 주고받았다. 나는 수입업체 대표이고, 아내는 공급업체 직원이었으니 거의 매일 화상통화를 했다. 화상통화를 하면서 한국말을 조금씩 배웠다. 아내가 영어학원 강사 출신인데 신뢰가 가더라. 2년 정도 그렇게 했더니 정이 들고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 한번 직접 대면하지 않고 아내한테 파키스탄으로 오라고 했다. 그게 2004년이다. 일단 와보고 결혼을 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라고 했다. 집으로 초대해 부모님께 인사를 시켰더니 부모님께서 좋아하더라. 그후 파키스탄에서 결혼식을 하고 몇 달 머물다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와서 어디에 살았나.

“장모, 처형, 처남과 함께 처가살이를 했다. 이후 20여일 머물다 파키스탄으로 가서 6개월 뒤에 다시 경산으로 와 아파트를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김강산이란 이름이 재미있다. 한국에 살아보니 어떤가.

“장모님 성을 따라 김씨로 했다. 김해김씨인데 시조가 인도에서 온 허황후가 아닌가. 옛날 인도와 파키스탄은 같은 나라였다. 아이들 이름도 김 이브라힘·이스마일·소피아라고 지었다. 강산이란 이름은 경산에 사는 형님같은 분이 지었다. 한국의 산과 강이 너무 좋더라. 파키스탄은 민둥산이 많다. 코란에 나오는 천국의 이미지가 한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특히 아침 햇살이 너무 멋있다. 파키스탄 TV퀴즈프로그램에서 전 세계에서 아침이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어딘가 하고 문제를 낸 적이 있는데 답이 코리아였다. 여러 나라를 다녔지만 한국사람처럼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이 없더라. 대부분 ‘야, 이리 온나’ ‘개안타’하면서 잘 대해준다.”

▲무슬림인가.

“그렇다. 종교가 인간을 편가르기해선 안 된다. 인간은 한 형제이고 한 뿌리에서 나왔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도가 다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기도는 하루에 5번 한다.(그는 인터뷰 도중 빈 방에 가서 기도를 했다) 매주 금요일에 대구시 달서구 죽전동에 위치한 이슬람사원에 간다.”

▲오션산업은 언제 설립했나. 또 사업은 어떠한가.

“처음엔 ‘저트 브라덜스’란 무역회사를 하다가 오션산업으로 바꿨다. 2013년 법인으로 했다. 내가 대표이사고 동생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파키스탄을 비롯해 중동, 아프리카, 러시아, 캄보디아에 현지 사무실을 두고 있다. 제47회 대구·경북무역의 날에 100만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다. 석산기계·플랜트·버스·덤프트럭·중장비·포클레인 등 한국의 중·고품을 수출한다. 실적이 안 좋았는데 올해 목표는 100만달러다.”

▲사업을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나.

“중국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중국제품의 가격이 1억원이면 한국은 2억원이다. 중국의 품질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 영업이 힘들다. 중국 것이 훨씬 싼데 왜 한국제품을 취급하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선 제조비와 인건비가 비싸다. 2011년에 귀화했는데 사업을 하다 실망한 적도 있다. 특히 신뢰가 깨질 때 마음이 아프다. 돈을 빌려줬는데 갚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찾아갔더니 힘들다고 하던데 어찌할 수 없더라. 경찰에 고소하지 않았다.”

▲무역하려면 외국어에 능통해야 하지 않는가.

“파키스탄어와 한국어는 좀 한다.(웃음) 그밖에 영어, 러시아어, 아프가니스탄어, 인도어, 아랍어 등을 한다.”

▲자녀들도 외국어를 잘 하겠다. 한국에서의 일상생활이 궁금하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인데 반장을 하고 있다. 원래 혼혈이 똑똑하다고 하더라. 술과 담배, 골프를 일절 하지 않는다. 주로 걷기를 하거나 풋살을 한다. 주말이면 사무실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한다. 외국인 근로자 관련 문제가 생기면 아는 사람을 통해 연결해 준다.”

▲한국 말은 물론 경상도사투리가 유창하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을 텐데.

“다 얼라(아이)를 위해 하는 거다.(웃음) 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 서울에 있는 식당에 간 적이 있는데 ‘아지메 물 좀 주이소’라고 했더니 아지메가 물은 주지 않고 계속 웃기만 하더라. 그래서 ‘물 좀 돌라카이 와 안 주는교’라고 했다. 처음엔 기분이 나쁘더라. ‘물 돌라카이 물도 안 주고 와 캅니까’라고 주인한테 항의를 했더니 사투리가 너무 우스워서 그랬다고 하더라. 한번은 부산에 갔는데 한국 반찬이 입에 안 맞아 깍두기 하고 밥만 다섯 그릇을 먹었다. 밥 공기도 너무 작았다. 옆에 같이 먹던 선배가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라고 하기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영화에 나오는 대사였더라.”

▲‘유쾌한 김강산’이라고 불러야겠다. 삶의 지표 같은 게 있나.

“하하하. 고맙다. 힘들게 살아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공부도 잘했는데 경찰을 하려다 돈도 못 벌 것 같아 사업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알라신이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에서 번 돈은 여기에서 쓰여져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파키스탄 속담에 신랑신부는 하늘이 정해준다는 말이 있는데 아내도 동의를 한다. 퍼주기를 좋아한다. 아내는 유니세프 회원이다.”

▲파키스탄은 어떤 나라인가.

“정이 많고 의리가 있는 나라다. 빵이랑 카레가 주식이다. 돼지고기와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한국에는 약 1만3천명의 파키스탄인이 살고 있다.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국경쪽은 불안하지만 다른 지역은 평화롭다. K2 산이 파키스탄에 있는데 히말라야산맥과 연결돼 있다. 파키스탄에는 한국에 있는 청년회, 부녀회 같은 조직이 없다. 그런 것을 조직하려고 한다.”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파키스탄과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못 하는 민간외교를 하고 싶다. 경북도와 파키스탄의 펀자브주가 자매결연을 했으면 좋겠다. 펀자브주의 인구가 1억명이다. 지하자원은 많은데 기술력이 부족하다. 한국과 교류를 하면 경제적, 문화적으로 상호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면 죄인이 된다.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 건강한 몸으로 지내게 해 달라. 알게 모르게 실수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

▲한국의 어떤 곳을 여행했나.

“영업을 하러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다. 울릉도, 제주도, 남해 등을 돌아봤다. 그중에서도 고향 경산이 제일 좋더라.”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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