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기차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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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7-27 07:57  |  수정 2015-07-27 07:57  |  발행일 2015-07-27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기차여행

낡은 역사의 쾨쾨한 냄새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곧 다가올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개찰구에서 표를 펀칭하고 플랫폼으로 들어간다. 기차는 대개 정시보다 5∼10분 정도 늦게 도착한다. 아이는 엄마의 도움을 받아 자력으로는 오르기 버거운 발판에 겨우 발을 딛고 기차에 오른다. 긴 기적 소리와 함께 기차가 출발한다. 아이는 잠시 창 밖을 보다가 이내 통로 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드디어 홍익회 판매원이 밀차를 밀고 들어온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꼭 잡으며 그 쪽을 보라고 말한다. 엄마는 알았다는 눈짓과 함께 엉성한 나일론 망에 든 삶은 계란과 귤을 한 줄씩 산다. 약봉지처럼 접은 신문지를 풀어 헤치면 나오는 소금에 계란을 찍어 먹는다. 정말 맛있다. 귤로 입가심을 한다. 엄마의 기분에 따라 사이다 한 병을 덤으로 얻어먹을 수도 있다. 부모 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어린 시절의 기차 여행이다.

7월 중하순 무렵, 역 광장은 고교생과 대학생들로 붐빈다. 밀짚모자에 배낭을 짊어진 젊은이들이 무거운 텐트와 각종 야영 장비,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등을 들고 광장에 모인다. 누군가가 땅바닥에 퍼질고 앉아 기타를 치면 모두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완행열차가 시가지를 벗어나 시원한 녹색의 들판과 울창한 산 속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해변으로 가요’ ‘고래사냥’ ‘아침이슬’을 합창한다. 무엇이 그렇게 서럽고 울분을 참을 수 없는지, 그들은 서러움을 모두 버리고 삼등삼등 완행열차를 타고 동해 바다로 간다며 바락바락 소리 지른다. 같은 칸에 탄 어른들 중엔 조용히 하라는 분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잔잔한 미소로 그 모습을 지켜본다. 간혹 같이 박수를 쳐 주기도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참 어려운 결정이지만, 어느 날 그냥 훌쩍 기차를 탄다. 창 밖을 바라보며 정현종의 시구를 꼭꼭 씹어본다. ‘기차는 움직인다. 움직이는 건 가볍고, 움직이는 근심은 가볍다’ 머물러 있으면 근심 걱정이 자신을 파괴할 것 같아, 너무 힘들고 견딜 수 없어서, 움직여 보는 것이다. 까닭도 없이 하고 있는 일이 싫고, 같이 있는 사람이 싫고, 자기 자신마저도 싫어질 때, 기차를 탄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하나같이 선하고 아름답다. 그 이유는, 풍경 자체도 아름답지만 스쳐지나가며 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멀리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우리는 때때로 가까운 것들과 잠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떠나는 것이다.

여행은 지겨운 일상에서 일단 벗어난다는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 그토록 힘겨운 일상에서 벗어나 객지를 떠돌다보면 보면 어느 순간 떠나온 일상이 다시 그리워지게 된다. 이것을 재충전이라 부른다. 우리 모두 직장이 싫고, 학교가 싫고, 학원이 싫고, 공부가 싫을 때, 기차를 타고 훌쩍 떠나보자. 일단 떠나면 새로운 것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것을 느끼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만물이 우리를 유혹하는 여름이다. 한번쯤 그 유혹에 굴복해 기차를 타보자.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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