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성지, 경북 .3] 만세운동의 구심점 ‘장터’

  •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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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27   |  발행일 2015-08-27 제7면   |  수정 2015-08-27
1919년 3월 영해(영덕)장터, 총부리 앞에 선 3천명 ‘한강이남 최대 구국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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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18일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해 3·18 독립만세운동기념탑’.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경북의 만세운동은 두 경로를 통해 확산됐다. 하나는 서울에서 3·1운동을 기획하던 인물들이 독립선언서를 지역으로 보내면서 시작됐고, 다른 하나는 서울에서 시위 대열을 목격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소식을 전하면서 일어났다. 첫 출발지였던 대구(당시는 경북에 해당)는 전자에 해당하고, 북부와 동해안 지역은 대개 후자다.

경북지역은 1919년 3월8일 대구 만세운동 이후 전역으로 확산됐다. 특히 5월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 만세운동까지 무려 두 달 동안 80곳 넘는 곳에서 90여차례 일어났다. 어느 지역보다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난 곳이 바로 경북이다.

독립운동사의 큰 축인 만세운동의 구심점은 ‘장터’였다. 장터는 자연스럽게 많은 인원을 모을 수 있고, 뜻을 나누고 힘을 결집시킬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었다. 지금의 ‘광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경북지역 역시 장터를 중심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그중 영덕의 영해시장은 만세운동의 성지로 꼽힌다. 3월18일 영해 장날을 기점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에는 무려 2천~3천명의 군중이 모여 ‘한강 이남 최대규모’로 기록되고 있다. 기독교인과 축산, 창수, 병곡 지역의 민중이 합류해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그 서막은 교회 조사(助事)였던 김세영의 제의에서 시작된다.


서울 만세운동 목격한 교회 조사 김세영 제의로 시작
장날 군중 자연스럽게 합세하며 들불처럼 일어나

日帝 군대까지 동원해 실탄 쏘며 진압 나섰지만
순식간에 병곡·창수·지품면 등 인근 마을로 전파

지역 유지·양반세력도 적극 주도하며 동참 독려
영덕공립보통학교 학생·주민들 경찰서 습격하기도


◆ 서울서 목격한 구국의 바람

1919년 3월12일, 봄은 아직 마을로 들어서지 못한 듯했다. 군불을 넣지 않으면 어느샌가 한기가 들면서 몸이 저절로 옹송그려졌다. 하지만 김세영과 권태원은 온기 없는 방에서도 추운 줄 모르고 대화에 집중했다. 영덕 지품면의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인 김세영은 신학교 입학을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가슴에 폭풍이 일었다. 그러던 중 평양의 신학교가 만세운동으로 인해 휴교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바로 짐을 꾸려 영덕 본가로 돌아온 터였다. 그러곤 지금 기독교 구세군 정위(正尉) 권태원을 만나고 있었다. 김세영이 단도직입했다.

“우리도 만세시위를 벌이세. 더 뜨겁고 더 강하게 말이네.”

“이르다뿐이겠는가. 우리도 나서야지.”

하지만 김세영은 다음날인 13일 일경의 예비검속으로 몸이 묶이고야 말았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권태원, 정규하, 박의락 등은 15일 다시 모여 거사를 서둘러 궁리했다.

“18일, 성내리 영해시장이 어떻겠는가? 장날인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일 테고, 장터인 만큼 시위에 좋은 조건도 없지 않은가.”

뜻을 모은 이들은 곧바로 동지규합에 나섰다. 예수교 신자들이 대거 참여 의사를 밝혔고, 영덕지역의 명문가였던 권(權)·남(南)·박(朴)·이(李)·백(白)씨 문중의 양반들도 함께하기로 약조했다.

◆ 장터에서 일어난 저항의 함성

마침내 18일 영해면 성내리 영해시장. 장날의 시장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전에 약속한 대로 시위에 참석하기 위한 비장한 발걸음도 있었고, 그저 일상을 나누러 들른 심상한 발걸음도 있었다. 이러저러한 발걸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급속하게 불어나 수천 명의 인파를 이루었다. 정규하는 벅찬 가슴을 다독이며 준비해온 작은 태극기를 예수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나누어 주었다.

오후 1시쯤 성성한 햇발 아래 정규하, 남여명, 권상호, 박의락이 나섰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절규인 듯 심장이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였다. 순식간에 2천여명의 군중이 모여들었고 태극기가 파도처럼 너울거렸다. 그렇게 만세소리와 더불어 시작된 행진은 영해주재소 앞에 다다를 즈음엔 3천여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주임순사 스즈키와 순사보 진익조 등이 당황한 기색으로 나와 있었다. 그들에게 군중이 호통했다.

“너희도 만세를 불러라!”

평소 같으면 어림 없는 일이었지만 군중의 기세에 눌린 순사들은 순순히 만세를 따라 외쳤다. 군중은 함성을 지르며 시장 일대를 한 바퀴 돈 후 다시 주재소로 돌아왔다. 순사부장이 나타나 해산을 명령했지만 시위 인파는 오히려 안으로 진입해 몽둥이와 돌로 사무실을 공격했다. 그때였다.

“총이다. 저들이 총을 가지고 왔다.”

그새 보고를 받고 달려온 영덕경찰서장 무의손을 비롯한 일경들은 날선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군중은 수가 많았고 기세도 등등했다. 이에 일경들은 위협을 느끼고 도주를 시도했지만 곧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승전보 같은 하루가 저물었다.

날이 바뀌어 19일이 되었다. 하룻밤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의 가슴은 여전히 달아오른 채였다. 만세운동의 기세 또한 조금도 덜어지지 않아서 아침부터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사방 드높았다.

하지만 일제도 더 이상은 당하려 하지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경 포항 헌병대 분대장과 헌병들이 도착했고, 오후 5시경에는 대구 보병 80연대에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됐다. 일경의 실탄이 군중을 향해 날아들었고, 마른 연기가 풀썩거리자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결국 8명이 순국했고,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뒤이어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 잇따랐다. 일경은 1차 검거작전으로 김세영 등 96명을, 2차 검거작전으로 남응하 등 74명을 붙잡아 재판에 회부했다.

◆ 들불처럼 번진 ‘대한독립만세’

영덕 성내리 영해시장의 만세운동은 순식간에 인근 마을로 전파됐다. 병곡면의 경우에는 18일 영해시위 직후 전개됐다. 이날 오후 4시경 김응조, 정규하, 박의락 등이 앞장선 가운데 400여명이 병곡면으로 움직여 주재소를 향해 돌진, 일경을 공격했다. 영덕면에서는 영덕시장 장날인 18일 금호리 예수교 북장로교회 조사 강우근을 중심으로 50여명의 교회신자들과 장을 보러온 사람들이 장터 한복판에서 만세를 외쳤다. 또 이튿날인 3월19일에는 영덕공립보통학교의 학생과 졸업생들이 지역 주민들과 합세해 영덕경찰서를 습격했다. 창수면에서도 19일 영양군의 유지였던 이종구 등의 주도로 10여명이 주재소를 파괴했다. 지품면 역시 19일 장날 주명우 주동 하에 장터에서 전개됐다. 남정면의 만세운동은 장사동 장날인 4월4일 정오 무렵 박명방 주도로 장터에서 전개됐다.

영덕지역의 만세운동은 18일 영해면 성내리 영해시장에서 시작해 19일과 21일 사흘에 걸쳐 집중적으로 전개됐다. 기독교인들의 기여도가 높았고, 지역 유지나 양반 세력 또한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동참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도 극심했다. 무력 진압과 탄압으로 발생한 사상자가 24명나 됐고, 총 204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또한 일제는 경찰 외에도 재향군인과 소방조원을 긴급 소집해 대응했고 강구항에 입항해있던 일본인 어부 60여 명까지 동원하기도 했다. 그만큼 일제가 느낀 부담감은 상당했던 것이다. 뜻은 모으고, 힘은 뭉치며, 마음은 나누는 우리네 장터의 힘이었다.

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경북독립운동사 Ⅲ-3·1운동’‘길 위에서 만나는 경북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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