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서울 방학동 쌍문 역사 산책길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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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28   |  발행일 2015-08-28 제36면   |  수정 2015-08-28
대왕이 사랑했던 딸도 쫓겨난 임금도 흙무덤에 잠들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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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 강화도 교동에 있던 것을 1513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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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공주와 양효공 안맹담의 묘. 도봉산 시루봉 아래에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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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 은행나무. 수령 830년 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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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샘. 600여 년 전부터 인근 사람들의 생활 용수로 사용되어 온 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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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샘 공원. 원당샘을 복원하면서 생긴 물길과 연못을 공원으로 조성했다.



서울 도봉산 자락 아래에 도봉구 쌍문동과 방학동이 펼쳐져 있다. 그 일대의 산과 천과 공원과 역사적인 장소들을 이어 만든 것이 ‘쌍문 역사 산책길’이다. 김수영과 벽초 홍명희, 전태일, 함석헌 등이 살았고, 1960년대 중반에는 방학천을 따라 판자촌이 형성되기도 했던 산 아래 마을. 그곳에는 또한 세종이 사랑했던 딸 정의공주의 묘가 있고, 폭군으로 기억되는 연산군의 묘가 있고, 600여 년 전부터 인근 사람들의 생활용수가 되어 준 원당샘, 서울시 지정 보호수 1호인 천년 은행나무가 있다.

도봉산 시루봉 기슭 도로변
세종대왕의 둘째딸
장의공주 부부의 묘
길 건너 아파트 단지 언덕엔
어머니 비참한 죽음을 알고
미쳐 날뛰었던 연산군이
부인과 나란히 누워 있다

 

연산군 묘 맞은 편 마을
불이 나면 큰 변고 생긴다는
수령 830년 은행나무는
장대하고 시원스러운 모습이다


◆ 정의공주와 양효공의 묘

도봉산 시루봉 기슭, 2차로 도로가에 정의공주와 그의 남편 양효공 안맹담의 묘역이 넓게 구획되어 있다. 울창한 송림 앞 높은 단 위에 두 개의 봉분이 나란하다. 그 중 왼쪽이 공주의 묘다. 문인석이 엄중히 줄지어 섰고, 깔끔한 잔디밭에 조경수 하나하나가 나무랄 데 없이 다듬어져 있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둘째딸로 머리가 좋고 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변음토착(變音吐着)을 완전히 궁구하지 못하여 각 대군들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는데, 정의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가 곧 풀어 바쳐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 명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양효공 안맹담은 서예가로 이름이 높고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했으며 음악과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다. 그는 14세에 정의공주와 결혼했는데, 세종은 그에게 한강 가운데 있는 저자도와 낙천정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부부의 금실은 매우 좋았고, 세종은 특히 이들 부부를 아꼈다고 한다. 양효공은 세조 8년에 사망했다.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고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장경’을 간행했다 한다. ‘지장경’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연산군의 묘

정의공주의 묘역에서 길을 건너 주택가 안쪽으로 들어오면 아파트단지에 둘러싸인 작은 언덕이 있다. 그곳에 조선 10대 왕인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가 누워 있다. 왼쪽이 연산군, 오른쪽이 부인의 묘다. 그들의 묘소 아래에 딸과 사위의 묘도 함께 자리한다.

조선의 10대 임금, 연산군. 그는 즉위 직후 어머니 윤씨의 비참한 죽음을 알았다. ‘그날 수라를 들지 않았다’라는 짧은 기록은 그의 비통을 짐작하게 한다. 광기 어린 보복이 시작되었고, 그는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을 위해 저해되는 모든 것을 척결하는 데 전력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 해소하는 것 또한 강력한 왕권의 행사로 여겼고, 그 결과는 파탄이었다. 그는 12년에 걸친 치세 동안 두 번의 사화를 일으키고 극도의 폭정을 자행해 결국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왕이 아닌 군, 실록이 아닌 일기, 능이 아닌 묘. 이것이 당대에 내려진 그에 대한 평가다.

연산군의 묘는 일반적인 왕릉보다 규모나 격식이 초라하다. 그러나 비석과 상석, 향로석, 석등, 문인석 등 간소하나마 조선 전기 능묘 석물의 조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폐위되어 군으로 강봉된 그는 강화도 교동으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해 11월, 31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다. 6년 뒤, 폐비된 부인 신씨는 연산군의 묘를 강화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기를 청했고, 이듬해 그의 묘는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 나무와 샘이 있는 공원

연산군의 묘 맞은편 마을 한가운데에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높이가 24m, 둘레가 거의 10m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다. 이 나무는 수령이 830년 된,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 한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한 이 은행나무는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불이 날 때면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에도 나무는 불탔다고 한다. 나무 둥치 한쪽이 인공 발포제로 치료되어 있고 지팡이를 여럿 짚을 만큼 늙었지만 장대하고 시원스럽게 가지를 펼치고 있다.

은행나무 앞에는 샘이 하나 있다. 일명 ‘피양우물’이라 불렸던 이 샘은 600여 년 전 파평윤씨가 이 마을에 집단 거주하면서 그들의 생활용수로 사용했는데, 이후 수백 년 동안 인근 사람들의 식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이 일정한 수온을 유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물이 잘 나오지 않았고, 1979년에 이르러 마을 사람들이 원당천(元堂泉) 또는 원당샘으로 이름을 붙이고 가꾸기 시작했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2009년 결국 샘의 물은 흐르지 않게 된다. 원당샘은 2010년 복원되었고, 현재는 시중 판매되는 생수보다 미네랄 함량이 많은 물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원당샘의 복원 과정에서 과거에는 없던 물길이 생기고 연못도 생겼다. 이를 이용해 2011년 샘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했다. 원당샘 공원이다. 나무를 심고 꽃밭을 만들고 전통 연못과 정자 등이 설치되었다. 연못가에는 소년이 앉아 연꽃을 바라보고, 정자에는 소녀가 앉아 책을 읽는다. 쌍문 역사 산책길을 걷던 사람들도 한 차례 다리품 쉬어가는 평온한 공원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정보

쌍문역사 산책길은 총 4.6㎞로 2시간 가량 소요되는 길이다. 발바닥 공원에서 출발해 원점회귀한다. 산책길 전체를 걸으려면 지하철 4호선 창동역, 연산군 묘 일대로 가려면 1호선 방학역에 내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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