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寶庫 청송 .11] 우리말 교육에 평생을 바친 이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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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31   |  발행일 2015-08-31 제12면   |  수정 2015-08-31
‘童心 천사주의’ 여지없이 깨버린 아동문학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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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현서면 덕계리에서 태어난 이오덕은 우리말 교육에 평생을 바쳤다. 맨 오른쪽은 안동 대성초등학교 교장 시절 아이들과 함께한 이오덕. 당시 학교 신문 ‘대성’을 발행했다. <출판사 양철북 제공·영남일보 DB>

#1. “자기 삶을 정직하게 쓰라”

“글쓰기 교육을 뭣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합니까”라고 누가 물으면, 이오덕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아이들에게 인간교육과 민주교육을 실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로 그게 되겠습니까.”

“잘 가르쳐야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글쓰기 교육은 기껏 어른의 글을 흉내내는 ‘백일장’식 기교만 가르쳤어요. 그런 폐단을 없애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정직하게 쓰는 걸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 역시 처음에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열심히 자기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시가 됩니까”라며 쑥스러워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오덕은 이에 “자기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일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차츰 아이들은 글짓기 시간이면 신이 나는 듯했다.


신춘문예 동화·수필 당선 등단
환상·탐미·기교성만 존중하는
1970년대 아동문학 신랄 비판

글짓기 용어 대신 글쓰기 주장
번역·일본말투 잔재 걸러내려
우리글·문장 바로쓰기 책 펴내

안동 권정생과 편지 왕래하며
12세差 뛰어넘어 평생 동지로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이렇게 쓴 시들을 이오덕은 차곡차곡 모았다. 그리하여 1978년 농촌어린이들의 시모음집 ‘일하는 아이들’과 79년 산문집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가 보리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시모음집에는 160명의 아이들이 쓴 시가 5부로 나뉘어 272편이나 실렸다. 화가 오윤의 판화가 표지를 장식했다.

“아버지하고/ 동장네 집에 가서/ 비료를 지고 오는데/ 하도 무거워서/ 눈물이 나왔다./ 오다가 쉬는데/ 아이들이/ 창교 비료 지고 간다/ 한다./ 내가 제비보고/ 제비야/ 비료 져다 우리집에/ 갖다다오, 하니/ 아무 말 안 한다./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 나는 슬픈 생각이 났다.”

‘일하는 아이들’에 실린 3학년 정창교의 시다. 1970년 6월13일에 썼다고 밝혔다. 또한 이런 시도 있다. 1969년 당시 2학년이던 김종철이 쓴 ‘촌’이다.

“우리는 촌에서 마로 사노?/ 도시에 가서 살지./ 라디오에서 노래하는 것을 들으면 참 슬프다./ 그런 사람들은 도시에 가서/ 돈도 많이 벌일게다./ 우리는 이런데 마로 사노?”

이 작품집이 나오자 아동문학계는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때까지 동시 속의 아이들은 곱고 천사 같은 존재였는데, 그러한 ‘동심 천사주의’를 여지없이 깨버린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시는 생기가 느껴지고, 감동을 자아냈다. 이 때문에 “이 작품들 가운데는 아이들이 쓴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오덕은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 그대로 아이들의 시다. 자신의 절실한 감정을 정직하게 쓰라는 나의 가르침이 이런 꽃봉오리들을 키워낸 것이다.”


#2. 작문교육은 농사짓기와 같아

이오덕은 1925년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해인 ‘5’와 마을 이름 첫 자 ‘덕’을 합해 ‘오덕(五德)’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단다. 아버지 이규하는 일하면서 공부하는 ‘지식인 농사꾼’이었던 것으로 이오덕은 회상했다.

주일학교 동화 선생님한테서 동화 구연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1933년 화목 공립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이 해 어머니의 타계로 누나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조용한 성격으로 여러 사람 앞에 나가서 말하기를 부끄러워했다. 다만 글을 잘 썼으며, 염소 키우기를 좋아했다. 1943년 영덕공립농업실수학교를 졸업, 성적이 우수해 군청 직원으로 특채됐다. 이후 교사가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교사가 되기로 결심, 독학을 해 44년 교원시험에 합격했다. 청송 부동초등학교에 부임한 뒤 86년 명예퇴직 때까지 교사, 교감, 교장으로 재직했다.

1955년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을 시작하다가 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한국일보에 수필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는 특히 글쓰기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작문교육은 농사짓기와 같아”라고 늘 말하곤 했다. 그래서 학생들이 쓴 작품들을 두고 한 해의 수확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특히 교육현장에서 쓰는 ‘글짓기’라는 용어를 ‘글쓰기’로 고쳐 쓸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아이들의 건강한 시 정신을 옹호해 기존의 아동문학을 ‘유아독존의 심리 세계만을 희롱하여 이국적인 것, 환상적인 것, 탐미적인 것, 혹은 감각적인 기교만을 존중하는 경향’(시정신과 유희정신, 1977)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1983년 교사들을 모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었다. 글쓰기 교육운동과 우리말 연구에 힘쓰기 위해 퇴임 후 우리말 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1992년 ‘우리문장 바로쓰기’와 1995년 ‘우리글 바로쓰기’(전3권)는 번역 말투와 일본 말투의 잔재를 지적하고 걸러내기 위해 집필한 것이다.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1965), ‘시정신과 유희정신’(1977) 외에 ‘삶을 가꾸는 글쓰기교육’(1984),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1993), ‘우리말 바로쓰기’(1990), ‘문학의 길 교육의 길’ 등 50권 넘는 저서를 남겼다. 한국아동문학상(1976), 단재상(1988),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상(1999), 은관문화훈장(2002)을 받았다.

1995년 정착한 충북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무너미 마을) 자택에서 2003년 8월25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마을에 무덤과 시비가 있다.


#3. 동화‘몽실언니’의 작가 권정생과 각별한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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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일직교회 앞에 선 젊은 시절의 이오덕(왼쪽)과 권정생. 둘의 우정은 이오덕이 죽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계속됐고, 한국 아동문학 역사에 남는 작품들을 일구어냈다. <출판사 양철북 제공>

이오덕과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교우는 문인들 간에 두고두고 얘기가 된다.

1973년 1월18일. 이오덕은 안동의 일직면에 내려 다시 오리를 걸어 조탑마을의 일직교회를 찾아갔다. 진흙탕 길이 질척해서 애를 먹었다. 교회 한 쪽의 숙사에서 권정생이 나와 그를 맞았다. 숙사 안의 그의 방에 들어갔다. 방 한 쪽에 책들이 가득하니 꽂힌 게 인상적이었다. 방 안에는 이불과 간단한 자취 도구 같은 게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 그 방에서 둘이 같이 자면서 이오덕은 권정생이 살아온 많은 얘기를 들었다. 무엇보다 권정생이 자신을 외톨이라 부르는 게 마음을 찡하게 했다.

“원래부터 외톨이였습니다. 출생지가 남의 나라(일본)였던 저는 지금까지 고향조차 없는 외톨박이로 살아왔습니다. 아홉살 때 찾아온 고국 땅이, 왜 그토록 정이 들지 않았는지요. (…) 소외당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고국은 나에게 전쟁과 굶주림, 병마만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위에 몸서리쳐지는 외로움을 (…) 그러나 메말라진 흙 속에 물 한 방울 찾을 수 없어, 여지껏 목말라 허덕였습니다.”(1973년 2월8일 편지에서 권정생이 쓴 글)

당시 이오덕은 문경의 김룡초등학교 교감으로 있었는데, 그해 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발표된 동화 ‘무명저고리와 엄마’의 작가 권정생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이 만남 이후 두 사람은 12살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평생 동무요 동지로 지냈다. 아동문학의 스승과 제자 사이이기도 했다. 두 사람 간에는 자주 편지들이 오갔다. 권정생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바람처럼 오셨다가 제(弟)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마음 놓고 제 투정을 선생님 앞에서 지껄일 수가 있었습니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공동기획=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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