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성지, 경북 .4] 유공자 이인술옹이 말하는 ‘그날의 기억’

  • 백승운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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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9-03   |  발행일 2015-09-03 제8면   |  수정 2015-09-03
“선생님이 몰래 불러 보자기 속 뭔가를 내놓더라고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본 게 그때가 처음…
열여섯 나이였지만 충격이었지, 눈물이 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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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에 생존해 있는 3명의 독립유공자 중 한 분인 이인술옹. 그는 일본 유학시절 현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상처는 굳은살처럼 박혀있었다. 단단하게 굳어 깊고 선명했다. 허연 맨살을 갉아먹은 작은 흉터처럼 보였지만, 맹수의 이빨 자국처럼 날카로웠다. 그것은 목숨 따윈 버릴 수 있다는 결사의 상징이었다. 암울한 시대와 맞서 싸운 훈장처럼 보이기도 했다. 뚝뚝 떨어지던 핏물은 멈췄지만, 깊고 단단하게 박힌 상처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증거하고 증명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의 고문이 얼마나 혹독한지 몰라. 옆구리를 칼로 푹 찔러서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였지. 그 때 생긴 상처가 지금도 이렇게….”

이인술옹(90·포항시 오천읍, 前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장). 그는 현재 경북에 생존해 있는 3명의 독립유공자 중 한 분이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 현지에서 태극기를 돌리며 항일투쟁에 나섰다. 혹독한 고문을 견뎌야 했고 참혹한 옥살이를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나라를 되찾겠다’는 신념이 그를 버티게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날의 기억’을 듣기 위해 지난달 31일 포항 오천읍 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 태극기를 처음 본 잊을 수 없는 그날

“영덕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했어. 그런데 하루는 선생님이 나를 몰래 불러. 그러고는 곱게 싼 보자기를 꺼내더니, 뭔가를 주섬주섬 내놓더라고. 태극기였어. 일장기가 아닌 우리나라 국기를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어. 어린 나이였지만 충격이었지. 눈물이 날 만큼….”

그때가 열여섯 되던 해였다. 서당 선생님은 어린 이인술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기백이 있고 언행이 반듯한 그가 남달라 보였던 터였다.

태극기는 누렇게 색이 바래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정겹고 아늑한 느낌이었다. 냄새도 나는 듯했다. 어머니의 삭은 젖냄새 같기도 했고, 검게 그을린 구들장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 같기도 했다. 햇볕이 스며든 논밭에서 피어오르는 흙냄새처럼 아련하고 푸근했다. 고향의 냄새였고, 내 나라 내 조국의 향기였다. 그 향기가 온 몸으로 스며들었다. 벅찬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아프고 서러웠다. 풀과 숲과 강과 바다와 바람과 꽃이 있지만 ‘내 나라’가 아니었다. 그 땅을 밟고 걷고 뛰어다니며 살아가지만 ‘내 조국’이 아니었다. 나라 잃은 설움은 그런 것이었다.


“선생님이 준 태극기 품고 日 유학길 올랐지만
날 기다린 건 차별·폭행과 나라 잃은 설움뿐…
학생조직 만들어 韓人거주지 ‘태극기 배포’ 투쟁
고문 혹독…창자 튀어나올 정도로 옆구리 찔러”


“지금도 절대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 선생님은 그날 그 낡은 태극기를 꼭 쥐어주면서 ‘조국’과 ‘독립’을 이야기했지. 그러면서 일본에 가더라도 ‘내 나라, 내 조국’을 절대 잊지 말고, 독립운동에 나서라고 당부했어.”

당시 그는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후 현해탄을 건넜다. 선생님이 쥐여 준 태극기를 가슴에 품은 채였다. 혹시라도 들킬까봐 옷 속 깊숙이 감추었다. 천을 겹겹이 덧대서 바느질을 하고, 그 속에 태극기를 몰래 숨겼다. 그리고 열여섯 되던 그해,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 수산학교에 입학했다.

◆ 폭행과 차별뿐인 일본 유학생활

일본에서의 학교생활은 처음부터 고난이었다. 일본인 상급생들은 ‘마늘 냄새 나는 조센징’이라며 구박하기 일쑤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돈이 없어 담배를 상납하지 못하면 죽을 만큼 맞아야 했다.

“고향 집에서 가끔 용돈을 보내 와. 그 돈으로 담배를 사서 상납해야 했어. 두들겨 맞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지. 한 반에 한국인 학생이 5~6명 있었는데 전부 다 마찬가지였어.”

일본인 학생의 폭행은 계속 이어졌다. 새벽에도 한국인 학생들이 있는 기숙사로 몰려와 때리고 달려들었다. 일본인 사감은 그 장면을 목격하고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이 이런 거구나. 그때 뼈저리게 느꼈지.”

차별도 심했다.

“힘들었지만 공부 욕심이 많았어, 나라를 되찾으면 큰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지. 그런데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일본인 선생들은 인정해주지를 않아. 성적이 많이 오르면 노력상이라는 것을 주는데, 한국인 학생의 성적이 월등히 올라도 상은 일본인 학생 차지야.”

◆ 나라 잃은 설움…독립운동에 나서다

폭행과 차별에서 온 분노는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운동의 불씨가 됐다. 그것은 ‘분노’에서 출발한 ‘정당한 증오’나 마찬가지였다. 곧장 한국인 유학생 12명과 ‘학생 조직’을 꾸렸다. 그가 선택한 것은 몰래 숨겨 들여왔던 ‘태극기’였다.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일본 현지에 태극기를 배포하기로 했어. 지금 나라는 빼앗겼지만 우리 국기가 있고 되찾아야 하는 조국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지. 정신이 되살아나면 행동으로 이어지잖아. 그 정신의 불씨를 지피고 싶었던 거야. 내 청춘과 목숨을 바쳐서라도 빼앗긴 나라를 꼭 되찾고 싶은 마음이었지.”

등교 전인 새벽시간 혹은 수업이 끝난 오후 6시 이후에 그를 비롯한 유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기숙사 구석진 곳에 몰래 숨어들어 태극기를 등사해 나갔다. 잉크가 시커멓게 번진 태극기였지만 그 무엇보다 귀해 보였다. ‘태극기 등사’는 연일 계속됐다.

“그렇게 500장 정도를 만들었어. 그리고 학교 인근에 먼저 70~80장 정도를 뿌리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대상이 되고 말았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다. 일경은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결국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결국 오사카와 도쿄로 도망쳤어. 그때가 3학년때였지.”

그래도 그의 ‘태극기 배포 거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등사한 태극기를 책보따리에 숨겨, 한국인이 많이 모여있는 시장에 뿌리기 시작했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으슥한 밤중에 거사는 계속됐다. 태극기가 놓인 자리는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났고, 아늑하게 부풀어 올랐다. 습기 빠진 바람 속에서 이내 펄럭이며 거리를 떠돌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는 자신이 뿌리고 간 태극기를 한국인들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동해서 일어서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일본 현지에서의 독립운동은 고통과 슬픔을 모두 각오해야 했다. 고향 영덕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 때문에 수시로 경찰서에 들락거렸다. ‘아들이 있는 곳을 대라’며 가혹한 고문도 받아야 했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고향 소식에 그는 한없이 괴로웠다. 하지만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조와 정의를 버리고 목숨을 구걸하며 더럽게 타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로지 나라를 되찾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태극기 배포’를 중단할 수 없는 이유였다.

◆ 가혹한 고문과 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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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당시 입은 상처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인술옹은 “칼로 허벅지와 옆구리를 찔러 창자가 나올 정도로 고문이 가혹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뜻과는 달리 거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1944년 1월, 일경의 감시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붙잡혀 형무소로 끌려갔다. 고문은 가혹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콧구멍에 고춧가루 푼 물을 붓는 거야. 그러면 소리도 못 질러. 발가벗겨 놓고 채찍질하는 것은 예사고….”

일경은 그와 함께 태극기를 등사하고 배포한 동료들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쳤다. 심지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엮어 죄를 씌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입을 닫았다. 혼자 감당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문은 연일 계속됐다. 아침부터 시작된 고문은 멈출 줄을 몰랐다. 시퍼런 칼이 옆구리로 들어올 땐 ‘아! 이렇게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은 아득하고 가물거렸고, 시퍼렇게 멍든 눈은 뜰 수가 없었다. 몸은 축 늘어져 움직일 수 없었다. 찢어질 듯한 채찍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해와 달은 포개지고 갈라져서 저녁을 불러왔고 다시 아침이 되었다. 그러면 다시 고문실에 끌려가야 했다. 기절을 하고 나서야 차디찬 감옥에 누울 수 있었다. 등을 대고 누운 바닥은 서늘했고, 한기가 발끝에서부터 몰려왔다. 힘겹게 정신이 들었지만 몸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중에 잡혀온 동료들이 있었는데, 그렇게 고문을 받다가 2명은 결국 죽고 말았어.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쳐져.”

이후 그는 재판에 넘겨졌다. 판사는 어린 나이를 감안해 감형을 하려 했다. 하지만 재판장에 선 그는 단호했다.

“내 나라를 되찾겠다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되냐고 오히려 판사에게 항의를 하고 따졌어.”

그의 말에 재판장은 술렁거렸다. 결국 그는 감형은 고사하고 징역 2년의 중형을 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 8월 광복이 되면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에게 그토록 절절했던 ‘나라와 조국’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일까.

“요즘 젊은이들의 역사 인식을 보면 한숨만 나와. 이 나라가 어떤 나라야.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바쳐 되찾은 나라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라를 빼앗겼고, 어떻게 독립할 수 있었는지 너무 무관심해. 내 나라의 소중함과 내 조국의 가치도 모르고 어떻게 큰일을 할 수 있겠어. 나라가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글=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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