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헨리 먼로 브루엔 선교사의 일기·편지 ‘한국생활 40년’ 완역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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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0-02   |  발행일 2015-10-02 제33면   |  수정 2015-10-02
우리말까지 완벽했던‘푸른눈의 대구사람’
‘3·8대구만세운동때 일경 총격으로 3명이상 사망’기록
일제 만행 세계에 알리려 아버지에게 편지 보내기도
자전거·애견문화 처음 대구에 선보인 사람도 브루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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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헨리 먼로 브루엔의 초상사진. 키가 크고 잘 생긴 미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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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엔이 그의 한국어 교사 이내경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갓을 쓴 모습이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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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엔이 1900년대 초 김천지역에서 갓을 쓴 노인에게 쪽지복음을 전하고 있다.


헨리 먼로 브루엔은?

브루엔은 1874년 미국 뉴저지주 서밋에서 태어났다. 1896년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한 그는 3년 뒤 그의 부친과 조부가 졸업한 유니온 신학대를 졸업했다. 1899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사의 일원으로 그해 10월26일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에서는 아담스와 존슨이 이미 와서 선교를 하고 있었다. 브루엔이 대구로 오면서 대구는 독립적으로 스테이션(선교본부)을 구축할 수 있었다. 27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약혼자인 마르타 브루엔(부마테)과 결혼한 그는 슬하에 두 딸을 뒀다. 부마테는 제일교회 구내에 신명소학교를 세우고 1907년엔 동산 위에 신명여자중학교를 설립했다. 그녀는 대구·경북 근대교육의 어머니로 불리었으나 55세에 사망했다. 브루엔은 부인과 사별 후 4년 뒤 동산병원 간호사로 일하던 클라라 헤드버그(하복음)와 재혼했다. 그는 일제의 선교사 퇴거 명령으로 1941년 9월 미국으로 추방되기까지 대부분의 생활을 대구에서 보냈으며 1959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스에서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일기는 개인의 삶을 기록한 개인사(史)이면서 역사적 사료가 된다. ‘난중일기’ ‘열하일기’ ‘안네의 일기’ ‘당 투이 쩜의 일기’처럼 일기는 문학의 영역에도 속한다. 아쉽게도 20세기 초·중반 대구사람이 대구를 배경으로 쓴 일기와 다큐멘터리는 그리 많지 않다.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신문인 영남일보도 1945년에 창간됐으니 그 이전 대구·경북지역의 역사적 사건에 대해선 소상히 알 수 없다. 그런 가운데 대구의 일본 거류민 가와이 아사오가 쓴 ‘대구물어(大邱物語)’는 1904~1930년 당시 대구의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최근 대구·경북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헨리 먼로 브루엔(한국명 부해리) 선교사의 일기 ‘한국생활 40년’(전 5권)이 김중순 계명대 한국문화정보학과 교수에 의해 번역돼 완간됐다. 브루엔이 대구에 머물면서 기록한 일기와 편지, 선교보고서는 선교역사이면서 대구·경북의 근대향토사다. 이 책은 브루엔의 부인 C. H 브루엔이 남편의 유고와 여러 자료를 편집한 것을 편역한 것이다.

브루엔은 1899년 25세에 대구지역 선교사로 부임해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될 때까지 42년간 한국에서 생활했으며 활동지역 대부분은 대구와 경북이다. 그는 1915년 대구남산교회를 세우고 18년에는 대구YMCA의 전신인 교남기독청년회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김천, 선산, 성주, 왜관 등 경북지역에 개척한 교회만 56개다.

그가 일기를 쓴 시기는 대개 일제강점기와 중첩돼 있다. 특히 1919년 3·8대구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해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많이 담고 있다. 브루엔은 한국의 독립의지와 평화적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편지를 써 검열을 피해 위험을 무릅쓴 채 인편으로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기도 했다. 또 대구만세운동에 참가한 한국인이 일경의 총격에 의해 사망한 이가 3명을 넘었다고 증언했다. 지금까지는 김용해 청년이 만세운동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밖에 브루엔은 한국에 최초로 야구를 전했다고 알려진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을 비롯해 김학철, 김주호 등에게 야구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김경민 YMCA 사무총장은 “자전거도 브루엔이 대구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였고 애견문화도 그가 처음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대구부민은 브루엔이 타고 다녔던 자전거가 안경처럼 생겨 말처럼 빨리 다닌다고 해 ‘안경말’ 또는 ‘비거(飛車)’라고 불렀다. 당시 대구관찰사가 ‘서양인이 안경말을 타고 가면 길을 비켜주어 사고를 예방하라’는 방을 붙였다고 한다. 브루엔이 아꼈던 개는 ‘마크’라는 사냥개로 그가 가는 곳마다 관심의 대상이 됐다.

브루엔은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 몇 안 되는 선교사로 알려진다. 기독교 역사가 이재원 선생에 따르면 그는 성격 또한 소탈해 인간적 매력까지 갖추었으며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대구기독교계의 자치파 운동과 관련해 대립각을 세우기도 한다. 김 사무총장은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우호적일 수 있으나 당시 북미선교회는 한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라는 현실적 인식을 바탕으로 했기에 한국의 독립과 관련해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가 브루엔처럼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인을 대하고 이해하려는 선교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헐버트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나섰던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일부 선교사 가운데는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해 광산 채굴, 철도 건설, 벌목 등을 통해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다. 근대 선교사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한다. 분명한 건 근대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는 사실이다.

이번 호 위클리포유는 브루엔이 쓴 ‘대구생활 40년’을 소개한다. 일기와 편지를 통해 그가 대구와 대구사람을 어떻게 바라보았으며 당시 대구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글=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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