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23> 감문국의 전설 ③ 애인고개(개령면 신룡리∼대광동 길목)

  • 손동욱
  • |
  • 입력 2015-10-07   |  발행일 2015-10-07 제13면   |  수정 2021-06-17 15:08
공주는 ‘함께 도망가자’던 첫사랑 적국 병사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20151007
김천시 개령면 신룡리의 애인고개. 신라 청년과 사랑에 빠진 감문국 공주가 이 고개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전설이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김천시 개령면 신룡리에서 대광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은 ‘애인(愛人)고개’로 불리고 있다. 김천의 읍락국가 감문국의 공주와 신라 청년이 사랑에 빠졌는데, 상사병에 걸린 감문국 공주가 이 고갯마루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23편은 적국의 청년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나눈 감문국 공주에 대한 이야기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상상력을 전설에 덧대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봄날 몰래 궁궐 빠져나온 공주
신라와 국경 접한 고갯마루서
청년 도움으로 다친 발목 치료

그후 둘만의 미래 약속했지만
약정한 날 고갯길 은행나무 밑
그가 남긴 손수건만 덩그러니…

 

 

◆ 외로운 감문국 공주

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따라 푸르스름하게 새벽빛이 번져오는 시각이었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인적 없는 들길에 돌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꾼에게 내몰리는 짐승마냥 바쁜 걸음을 서두르는 이는 뜻밖에도 묘령의 처녀였다. 해맑은 피부에 빼어난 미모를 갖췄지만 그동안 남모를 고초를 겪은 탓인지 수척한 뺨에 불안과 수심의 그림자가 짙게 어린 모습이었다.

들길을 가로지르자 하얀 모래밭이 나타났고, 곧 억새풀이 듬성하니 우거진 사이로 맑게 흐르는 강물이 앞을 막았다. 아래쪽으로 가면 그녀가 자주 건너다니던 돌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쪽으로 둘러갈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결심한 듯 치마를 걷어 올린 채 차가운 새벽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강물을 건너자 다시 강변을 따라 논밭 사이로 난 들길이 기다랗게 이어졌다. 그녀는 가쁜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서둘러 들길을 가로질렀다. 조금 지나면 인근 고을사람들이 곤한 잠에서 깨어날 시각이었다.

그녀가 이처럼 이른 새벽길을 도망치듯 나서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녀는 현재의 김천지역을 지배하던 감문국의 공주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얼굴이 예쁘고 총명하여 양친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러나 왕비였던 어머니가 원인 모를 병으로 세상을 뜬 다음에 부친은 후비를 맞아들였고, 자연히 그녀는 뜬구름처럼 외로운 신세로 성장해갔다.

마음 의지할 곳 없던 그녀에게 자연은 유일한 벗이 되었다. 내성적이고 다소곳한 성품에다 유난히 감수성이 뛰어난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궁궐 뒤편의 연못이나 갯버들이 우거진 강변, 혹은 철따라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들판에 나가기를 즐겼다. 당시 국경엔 불길한 전운이 감돌고, 군사력을 배가한 신라가 가야와 이웃한 감문국을 호시탐탐 넘보고 있다는 불길한 소문이 들려왔지만 그녀에겐 먼 나라의 얘기나 다름없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봄이 오면서 감문국 산하에 아름다운 꽃들이 앞 다투어 피어났고, 그녀는 오전부터 시녀 하나만을 대동한 채 답답하게만 여겨지던 궁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강과 계곡, 들판과 하늘, 구름과 바람, 풀꽃과 나무가 빚어내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인적 드문 들판을 정처 없이 쏘다녔다.

 

◆ 신라 청년과 사랑에 빠지다

그렇게 얼마를 다녔을까. 서편 하늘에 해가 뉘엿한 것을 보고 궁궐로 돌아가려고 길을 서두르던 그녀는 고갯마루에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발목을 삐고 말았다. 어찌 일어서보려 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치미는 통증을 견디기 힘들었다. 궁궐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나와 있었다. 계속 통증을 참으며 걷기도, 그렇다고 비슷한 또래의 시녀 등에 업혀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던 시녀가 궁궐로 사람을 부르러 떠난 사이에 문득 고갯마루 저편에서 훤칠한 남자가 다가왔다. 스물 남짓한 젊은이로, 단아한 용모에 특히 눈매가 서글서글했다.

청년을 쳐다본 공주는 불현듯 마음 한 구석에 바윗덩이 같은 게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마음의 격정이었다. 청년 역시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제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는지요?”

그녀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청년은 부친에게 약간의 의술을 배운 바 있다며 그녀에게 발목을 보여줄 것을 부탁했고, 염치불고하고 내민 그녀의 아픈 발목을 어루만져 통증을 없애주었다. 다친 발목이 나았다는 기쁨보다 청년의 손길이 닿은 살갗의 느낌이 더욱 그녀를 황홀하게 했다.

“내일 다시 여기서 그대를 기다려도 될는지?”

머뭇대던 청년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지 못한 약속

연분홍 꽃비가 분분하게 흩날리는 어느 봄날, 그렇게 그녀의 미칠 듯한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공주와 청년은 고갯마루 으슥한 곳에서 뜨거운 만남을 이어나갔다. 사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고갯마루는 신라와 감문국이 국경을 마주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사람들 왕래가 없고, 민가와도 떨어진 호젓한 장소이기도 해서 두 남녀가 은밀한 사랑을 나누기에 적당했다. 게다가 청년은 국경을 경비하는 신라국의 병사였기에 더욱 그랬다.

두 사람의 서로를 향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어쩌면 맺어질 수 없는 극단적인 신분 차이가 젊은 두 사람을 더욱 불타오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동쪽 산자락이 아침노을에 붉게 물들 즈음에 그녀는 청년과 사랑을 속삭이던 장소인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익숙한 몸짓으로 야산 숲속의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로 들어갔다. 문득 그녀는 은행나무 밑둥치의 작은 곁가지에 묶인 감빛 손수건을 발견했다. 그것은 평소 청년이 지녔던 것으로, 그녀를 기다리다 남기고 간 징표가 분명했다.

그녀의 얼굴에 기쁨과 안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빛이 차례로 스쳐갔다. 만약 그녀가 낯선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왕의 귀에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격노한 왕명에 의해 별궁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또한 그녀를 가엽게 여긴 시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처럼 몰래 새벽길을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은행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기선 아래쪽 고갯마루길이 잘 내다보였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일은 꿈에도 잊지 못할 청년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리하여 닷새 전에 약정했던, 먼 나라에 가서 오순도순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키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치미는 허기를 애써 참으며 청년이 나타날 고갯길을 눈이 아프도록 지켜보았다. 

 

박희섭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 기획:김천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