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자문 주진오 교수가 말하는 ‘암살’ 등장 인물 史實은…

  • 박진관
  • |
  • 입력 2015-10-09   |  발행일 2015-10-09 제36면   |  수정 2015-10-12
“영화 ‘암살’ 안윤옥은 대구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현계옥과 더 닮았다”
20151009
대구 출신 명기생 현계옥이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였던 현정건을 따라 중국에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했다.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안옥윤(작은 사진)이 독립운동가 현계옥의 이미지와 가장 가깝다는 설이 있다. 




■ 현계옥은?


빙허 현진건의 형 현정건과
20대 초반에 중국으로 망명
여성 최초로 의열단 가입
김원봉에게 권총 쏘는 법 배우고
상하이서 톈진으로 폭탄 수송
말 잘 탔고 종종 남장을 하기도
현정건 사망 후 사회주의자 돼
모스크바·외몽골서 활동하다 행방 묘연


20151009
주진오 교수
올 여름 한국영화계를 강타한 ‘암살’이 관객 1천200여만명을 동원함으로써 역대 7위를 기록했다. 이 영화가 개봉된 뒤 주목을 끌었던 여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이 실제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인가에 대한 설왕설래가 많았다. 지역 신문을 비롯한 여러 언론에선 저격수 안옥윤이 영양 출신 독립지사 남자현 열사(1873~1933)를 모델로 삼았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영화 ‘암살’에 자문을 했던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가 지난 달 10일 인문학모임 ‘두:목회’의 초청으로 대구를 찾아 ‘영화 속 진실’에 대해 강연을 했다. 주 교수는 “영화 속에 나오는 주연과 조연이 정확히 누구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다”면서 “영화를 만든 최동훈 감독이 사실에 근거해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것 같다”고 운을 뗐다. 그는 또 “ 최 감독이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생동감을 부여함으로써 영화가 대박을 터뜨린 계기가 됐다고 본다”고 했다. 주 교수는 영화에서 김원봉이 배를 타고 김구를 만나러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촬영한 곳은 저장성 자싱이지만 역사적으론 항조우란 사실이란 걸 제작자에게 조언해 영화 자막에 ‘항조우’를 삽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암살이 상업영화인데 다큐멘터리로 했으면 1천만 관객을 끌어들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주 교수가 언급한 영화 속 주요 실제 인물은 누구를 모델로 했을까.


◆안옥윤(전지현 분)=주 교수는 안옥윤이 남자현 열사를 모델로 했다는 사실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암살의 시대적 배경이 1930년대 초 중국 상하이와 경성인데, 그때 남 열사의 나이가 이미 60세를 넘었다고 했다. 남 열사가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란 혈서를 쓰고 일본 관동군사령관 암살을 기도하긴 했으나 대신 그는 대구 출신 당대 일류기생인 현계옥이 여주인공과 더 닮았다고 했다. 현계옥은 대구 출신 소설가 빙허 현진건의 친형인 독립운동가 현정건의 연인으로 그를 따라 20대 초반에 중국으로 망명해 여성 최초로 의열단에 가입했다. 독립군은 처음 현계옥이 현정건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것으로 판단했으나 조국독립에 대한 그녀의 열망과 진실을 알고부터 그녀를 동지로 대했다. 현계옥은 김원봉에게 권총 쏘는 법을 배우는 한편 폭탄제조 전문가인 헝가리 사람 마자르와 부부행세를 하며 상하이에서 톈진으로 폭탄을 옮긴 사실도 있다. 또한 의열단 제2차 암살계획인 황옥 경부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계옥은 말도 잘 탔으며 종종 남장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주 교수는 “현계옥이 당시 잡지 ‘삼천리’에 보도되곤 했는데 그녀가 상하이에 있는 한 사교계 클럽에서 워낙 가야금을 잘 타고 라트라비아타(춘희)처럼 노래를 잘 불러 한 서양인이 어떤 장면보다 인상 깊었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고 했다. 현계옥은 현정건이 독립운동 옥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사회주의자가 돼 모스크바와 외몽골에서 활동했으나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주 교수는 현계옥이 독립군을 위해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뒷바라지만 한 게 아니라 직접 총과 폭탄을 들고 싸웠던 안옥윤의 캐릭터에 더 맞다고 주장했다.

◆속사포(조진웅 분)=영화 속 속사포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등장한다. 염석진(이정재 분)이 속사포에게 암살 대원으로 가담하기를 권유하는 대사 가운데 “낙엽이 떨어지기 전에 압록강을 건너는 게 소원이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라고 한 것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인 독립운동가 김경천(본명 김광서) 장군(1888~1942)의 일기 ‘경천아일록’에 나온다. 일기 원문에는 ‘여름이 장차 끝나가고 초가을이 오려고 한다. 여러 유지들은 나뭇잎이 떨어지면 군사행동을 하기가 불리하니 어서 무기를 준비해 가지고 압록강을 한 번 건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나 지금의 형편으로는 압록강은 고사하고 개천도 못 건너가겠다고 생각한다’고 쓰여있다. 김경천은 대한제국 말기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해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으나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고 러시아 등지에서 무장활동을 한다. 그는 말년에 소비에트의 탄압을 받아 강제노역을 하다 사망한 불우한 애국지사다. 그의 시 ‘불쌍한 독립군’에 ‘영하 40℃ 시베리아 추위에 여름모자 쓰고서 홑저고리 밑빠진 메커리(짚신)에 간발하고서 벌벌 떨고 다니는 우리 독립군’이란 표현이 나온다.

◆염석진(이정재 분)=주 교수에 따르면 염석진은 염동진(본명 염응택)과 친일경찰 노덕술을 합한 캐릭터라고 했다. 염동진(1902~?)은 평양 출신으로 난징군관학교 뤄양분교에 입교한 뒤 장제스 휘하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첩보공작을 위해 만주에 밀파됐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돼 고문후유증으로 실명했다는 설이 있다. 그는 관동군 정보기관으로 전향해 밀정으로 활동하다 광복 후 평양에서 대동단을 조직해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항일의식을 고취했던 독립운동가 현준혁을 평양에서 암살한다. 그는 월남 후 백색테러단체인 백의사의 사령으로 여운형과 장덕수의 암살에도 간여한다. 그는 미군방첩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맹인장군’으로 행세하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 체포됐는데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한편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악질 친일 경찰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훈7등 종7위 훈장까지 받은 그는 광복 후 장택상의 비호로 반공경찰로 변신했다. 반민특위 위원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그는 감옥에 갔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투사’라는 별명까지 얻는 등 신임을 받아 경찰에 복귀한 뒤 대한민국 경찰에서 고위간부를 했다.

<!--ㅓ03M--><!--ㅓ04M-->

약산 김원봉 선생 고향 밀양엔 지금
83세 막내 여동생 학봉씨 거주
생가터 건물 매입 기념관 만들 예정
서훈 추진을 위한 서명운동도 벌여

◆김원봉(조승우 분)=‘암살’에서 재조명된 실제 인물은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이다. 약산은 영화를 통해 김구와 같은 독립운동가의 반열에 올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원봉은 단지 의열단 단장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김원봉은 밀양 태생으로 밀양보통학교를 나와 중앙고보를 거쳐 1916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3·1운동 후 의열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취임한다. 이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뒤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대장에 오른다.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제1지대장을 역임한다. 일본에선 그를 잡기 위해 역대 최고의 현상금 100만원(약 320억원)을 걸기도 했으나 한번도 붙잡히지 않았다. 광복 후 서울로 귀환해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하다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노덕술에게 체포돼 뺨을 맞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그는 이때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하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약산은 광복 후 여운형이 암살되고 신변 위협이 계속되는 혼란 정국에서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남쪽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그 여파로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죽임을 당하고 부친마저 외딴 곳에 유폐됐다 굶어죽는다. 그는 북한에서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위원회 상임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나 1958년 국제간첩 혐의로 숙청돼 사형을 당하기 전 자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북에선 국제간첩, 남에선 빨갱이로 몰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약산의 막내 여동생 학봉씨(83)가 밀양에 거주하고 있다.

약산의 출생지인 밀양에선 그를 기리기 위해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 주변을 김원봉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성지로 만들고 있다. 약산의 부조와 태극기 나무, 독립군 69명의 명패, 희망우체통 등을 설치하고 주변 담벼락과 벽면에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벽화도 그린다. 또한 약산의 생가를 매입해 김원봉기념관으로 만들 예정이다. 최필숙 <사>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사무국장은 생가 앞을 흐르는 해천을 의열천으로 바꾸고 지난 9월 초부터 약산의 서훈 추진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현재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선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특별전을 하고 있다. 김원봉으로부터 시작해 김원봉으로 끝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약산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밀양시의회에선 약산을 비롯해 아직 조명받지 못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서훈 신청과 생가 복원, 기념관 건립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글=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