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37] 논산 여흥민씨 가문 ‘왕주’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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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19   |  발행일 2015-11-19 제22면   |  수정 2015-11-19
명성황후 친정 가문서 빚은 ‘왕실주’…딸들에 대물림으로 제조법 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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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주에 들어가는 재료들. 왼쪽부터 솔잎, 구기자, 구절초.


가양주를 비롯한 전통주는 이름이 다양한데 주로 사용하는 재료에서 따온 것이 많다. 맛이나 빚는 방법에 따라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100일 동안 발효시킨다고 해서 별다른 이름 없이 그냥 백일주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경우와는 다른 이름의 전통주도 있다. ‘민속주 왕주’는 그중 하나다. 충남 논산에서 전통식품 명인 남상란씨가 빚고 있는 술이다. ‘왕주(王酒)’는 이름 그대로 왕실에서 마시던 술, 궁중술이라는 의미다. 이 술은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민씨 집안에서 궁중의 술 빚는 법으로 빚어 왕실에 진상하던 술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왕주는 조선의 역대 왕들에게 올리는 제례의식인 종묘대제의 제주(祭酒)로 지정되어 해마다 치르는 종묘대제 때 사용되고 있는 전통주이기도 하다. ‘왕주’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술이라 하겠다.

충남 논산으로 출가 남상란씨가 재현
1997년부터 종묘대제 봉행 祭酒 지정

알코올 도수 13도의 투명한 황금색 술
누룩에 매실즙 넣어 퀴퀴한 냄새 잡아

홍삼·구절초·구기자·산수유 등 가미
마시면 청혈해독·피로해소 약리작용

◆명성황후 친정 민씨 가문에서 빚어 왕실에 진상하던 술

남씨의 왕주 빚기는 최소 3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남씨는 친정어머니(도화희)에게 배웠고, 친정어머니 도씨도 자신의 친정어머니(민재득)로부터 배웠다. 민재득은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였다. 명성황후 친정은 경기도 여주인데 이곳에서 가양주를 빚어 왕실에 진상하던 것을 남씨가 논산으로 시집와서 재현한 것이다.

왕주는 이처럼 민씨 가문의 딸들에 의해 지금까지 맥이 이어져오고 있는 술이다.

남씨는 1967년 21세 때 결혼했는데, 남편 이용훈씨는 논산의 양조장 집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친정어머니가 술 빚는 것을 보며 자란 남씨는 이렇게 양조장 집 맏며느리로 들어와 술 빚는 삶을 살게 되었다.

“어렸을 때 외갓집에 가보면 12개의 대문을 가진 대갓집이었는데 광에 있는 술 단지에 술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소와 돼지 다리와 함께 술 향기 가득한 술 단지에 대한 기억이 또렷합니다. 외숙모가 부엌에서 술을 짜 마셔보라고 하기도 했지요.”

친정집도 술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 “친정에서는 어머니가 수시로 술밥(고두밥)을 쪄 누룩과 섞어 술을 빚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몰래 술밥으로 직접 술을 빚어보기도 했습니다.”

남씨가 왕주를 본격적으로 빚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그 전에는 남편이 양조장을 운영했으며, 남편의 동생 삼형제도 논산의 다른 지역에서 각기 양조장을 운영했다. 남씨는 그 전까지는 집안 제사 때나 귀한 손님에게 내놓기 위해 가양주로 빚어오다가 나중에 일반인에게도 선보이기 위해 왕주를 본격적으로 빚기 시작했고, 1991년부터는 왕주를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당시 토속주가 외면 당하면서 막걸리와 동동주를 생산하던 시댁의 양조사업이 큰 위기를 맞게 되자 남씨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왕주를 재현하고 생산해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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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국화, 솔잎, 구기자, 산수유, 매실, 홍삼 등 가미

왕주의 주 원료는 다른 전통주와 마찬가지로 찹쌀과 멥쌀, 누룩이다. 여기에 야생국화(구절초), 구기자, 오미자, 솔잎, 산수유, 가시오갈피, 매실, 홍삼 등을 가미한다.

쌀로 고두밥을 쪄 뜨거울 때 누룩을 섞은 후 완전히 식힌다. “뜨거울 때 누룩을 섞는 것은 잡균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친정에서부터 배운 것입니다.”

이것을 술독에 넣고 물과 엿기름을 혼합해 그늘에서 발효시킨다.

다음은 덧술이다. 쌀로 고두밥을 찌고 누룩을 섞어 완전히 식힌 다음 밑술과 함께 술독에 넣는다. 이때 야생국화와 매실, 솔잎, 산수유, 구기자 등을 가루로 빻거나 절단해 첨가한다. 잘 섞은 후 참나무 숯과 말린 고추 몇 조각을 띄워 봉한다. 이렇게 해서 그늘에서 100일 정도 발효시킨 후 술을 걸러 완성한다.

왕주는 세 번 정도 여과한다. 이렇게 몇 번 여과해야 맑은 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량 생산을 위해 숙성 탱크를 사용하지만, 옛날에는 50여개의 항아리에서 왕주 익는 향기가 진동했다.

좋은 술맛을 위해 특별히 공을 들이는 것은 누룩 개발이다. 왕주에 사용하는 누룩에는 매실이 들어간다. 매실은 누룩 특유의 퀴퀴한 냄새를 제거하는 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누룩을 누룩답게 하는 구수한 향기는 그대로 남는다. 배양누룩과 매실과즙 혼합물에 효모를 접종해 발효시키는데, 누룩 냄새가 90% 제거된다고 한다.

냉동여과 기술도 중요하다. 왕주를 1차 여과해 영하 3~4℃에서 72시간 동안 교반기로 돌린 후 다시 여과한다. 특유의 향과 맛을 유지하면서 깔끔한 맛을 내기 위해서다. 저온살균 처리기법을 이용해 유통기한도 2년으로 늘렸다.

왕주는 싱싱한 굴로 만든 굴전이 좋은 안주로 꼽힌다. 신선한 고기로 지져낸 육전 역시 어울리는 안주다. 논산을 대표하는 탑정저수지의 민물고기 요리도 왕주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안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붕어찜을 권하는 사람이 많다.

◆1997년부터 종묘대제 제주로 올라

이렇게 완성한 왕주는 밝고 투명한 황금색을 띤다. 알코올 도수는 13도. 왕주만의 은은하고 절묘한 향과 부드러우면서도 혀끝을 감도는 감칠맛이 일품이다. 끈적한 진기가 약간 있으면서도 뒤끝은 깨끗하다.

이런 왕주가 처음 출시됐을 때 인기가 매우 좋았다. 사람들이 양조장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이 왕주는 1997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대제의 제주로 공식 지정되었다. 남씨는 그 전인 1980년대 중반부터 종묘대제 헌주로 제공했는데, 1997년에 종묘대제 제수 봉행 전담자인 이형렬씨(중요무형문화재)가 왕주를 제주로 지정한 것이다. 남씨의 시댁이 전주이씨 집안이란 점도 작용했다. 남씨 남편은 효령대군파 23세손으로 매년 종묘대제에 참석해왔다.

1997년은 남씨가 전통식품 명인 13호로 지정된 해이기도 한다. 왕주의 전통과 우수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남씨의 왕주 맥은 그 아들 삼형제가 함께 이어가고 있다.

남씨는 각별한 향과 여러 약재 덕분에 몸에 좋은 효능을 많이 가진 것이 왕주의 특징이라고 강조한다.

구절초는 두통을 낫게 하고 눈과 귀를 밝게 하며 몸이 마비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고, 청혈해독의 약리작용도 있어 고혈압 방지에도 효능이 있다고 한다. 구기자는 독이 없고 뼈와 근육을 튼튼히 하며 피로해소와 정력증진에 특효가 있고 위장, 신장, 간장, 심장 등 주요기관의 병을 치료하는 데 약효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잎은 보혈, 강장, 진해 등의 기능이 있어 중풍, 동맥경화증, 당뇨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홍삼과 매실도 그 효능이 널리 알려져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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