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영화 ‘내부자들’안상구役 이병헌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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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20   |  발행일 2015-11-20 제40면   |  수정 2015-11-20
“손없는 안상구, 드 니로 헤어스타일로(영화 ‘케이프 피어’) 센 느낌…촬영땐 손가락 하나 못 움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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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같은 곰’. 영화 ‘내부자들’의 언론사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는 자신을 친형처럼 따르는 정치 깡패 안상구(이병헌)를 그렇게 칭한다. 나름 머리를 굴린다고 생각하지만 한 수 뒤를 생각지 못하는 안상구는 그가 보기엔 수가 훤히 보이는 하수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기존 이미지를 벗고 속물적이고 경박스러운 캐릭터로 돌아온 이병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행동대장처럼 강하게 보였던 안상구를 허술하고 유머러스한 인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사건 위주로 긴박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안에서 관객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안상구가 담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웃음을 유발하는 엉뚱함, 찌질한 모습이 많이 보였으면 했다.” 여기에 “무섭도록 똑똑하지만 동시에 멍청한 인물”이라는 우민화 감독의 보충설명까지 더해지면 안상구 캐릭터의 윤곽은 대충 그려진다.

‘내부자들’은 정·재계와 언론 간 유착으로 이루어진 기득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안상구와 검사 우장훈(조승우)이 파헤치는 범죄드라마다. 안상구는 몰래 빼낸 비자금 파일로 거래를 준비하다 발각되고, 이 일로 손목이 잘린 폐인이 되어 버려진다. 안상구는 그런 자신에게 “복수를 할 기회”라며 접근한 우장훈과 멋진 그림을 만들어간다. 바로 이 영화가 흥미롭게 다가온 지점이다. 탄탄한 이야기와 이에 걸맞은 배우들의 앙상블이 유난히 돋보였던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은 전라도 사투리를 차지게 구사하는 경박한 양아치로 완벽히 변모했다. 의수를 착용한 마른 몸과 퀭한 얼굴에서 번뜩이는 독기 어린 눈은 이제껏 그가 맡아온 역할들과도 확연히 구분된다. 그렇게 이병헌은 자신만의 연기적 열정과 이상을 위해 또 한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 무엇보다 장난기 가득한 천진한 모습과 불같이 끓어오르는 분노의 크로스오버라는 극한의 두 얼굴을 보여준 그의 연기는 역시나 명불허전이다. 오랜만에 인터뷰 자리를 마련한 이병헌과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찌질한 모습 많이 보였으면 했다
조승우와 첫 만남…호흡 잘 맞아

알파치노와 친분…대여섯번 식사
안알려진 대부 촬영 에피소드 들어

할리우드에서 위상 달라진 것 없다
인종차별 때문에 울컥한 적도 있어
어느 스타는
시선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래도 끝까지 부딪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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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캐릭터로 돌아왔다. 안상구를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나.

“안상구는 기본적으로 깡패인데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진다. 그리고 굉장한 영화광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영화 대사들을 인용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다양한 직업군뿐 아니라 1990년 초부터 현재까지 20년간의 안상구의 다양한 모습이 비쳐진다. 비주얼적인 부분 또한 굉장히 많은 변화가 있는데, 한때 조폭으로 최고의 지위를 누리다가 나락에 빠져 독기를 품은 모습까지 감정상태의 폭이 굉장히 커서 여러 가지로 변화된 모습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안상구 감정의 중심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에 대한 복수심이다. 그 감정상태를 늘 유지하며 접근했다.”

▲그래선지 오른쪽 손목이 없는 장발의 안상구는 처음 모습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힘들고 불편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액션을 할 때도 오른손을 쓸 수 없다는 갑갑함이 있었다. 그래도 촬영 중 오른쪽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면 안 되니까 장갑 안에 이를 고정시켜 놓는 장치까지 넣었다. 사실 나이트클럽에서 일할 때의 안상구는 감독님이 원하던 모습이다. 손목이 잘리고 배신을 당한 후 첫 등장하는 나이트클럽 신에서 감독님이 굉장히 센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영화 ‘케이프 피어’의 로버트 드 니로 사진을 보여주며 꼭 이 헤어스타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모습에 맞게 살을 좀 뺐고 분장효과로 조금 퀭한 느낌을 주었더니 지금처럼 센 느낌이 나더라.”

▲백윤식, 조승우와의 첫 호흡이다. 연기톤이 다른 두 배우와의 만남인데 어땠나.

“그래서 나도 걱정을 했다. 과연 어떤 호흡일지 상상이 안 됐다. 그런데 예상외로 승우와는 첫 만남부터 아주 좋았다. ‘와! 이 친구와 내가 호흡이 되게 잘 맞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내 애드리브를 순발력 있게 받아주는가 싶더니 승우 역시 생각지도 못했던 애드리브를 치는 거다. ‘어쭈, 이것 봐라’하면서 서로 신나게 대사와 리액션을 주고받았다. 승우와는 그런 재미가 있었다면 백윤식 선생님은 정말 예상할 수 없는 리액션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액션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선생님의 연륜과 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런 두 사람과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촬영 현장이었다.”

▲조승우는 당신의 연기에 대해 극찬을 하더라.

“오히려 나는 승우가 대단한 연기자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 영화에서 제일 좋아하는 신이 이강희와 우장훈이 취조실에서 맞닥뜨리는 장면이다. 절대 웃기는 장면이 아닌데 나는 보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팽팽한 기싸움을 하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낼 수 있는지 놀라웠다. 절로 헛웃음이 나오더라. 연기에 관해서는 백윤식 선생님이야 두말하면 잔소리고 난 이번에 승우의 연기를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다. 그에 비하면 난 사투리에 약간의 자신감이 생긴 것 정도다.”(웃음)

▲최근 할리우드 영화 ‘미스 컨덕트’와 ‘황야의 7인’의 촬영을 마쳤다. 알 파치노, 덴젤 워싱턴 등과 호흡을 맞췄는데 또 다른 느낌이겠다.

“영어로 연기를 하니까 그들이 (연기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잘 모르겠다. 순발력에 감탄한 적은 있지만 오히려 한국 배우들을 보면서 놀란 적이 더 많다. 그래도 알 파치노는 대단하더라. ‘미스 컨덕트’가 저예산 영화인데 그가 촬영 전에 무대에서 리허설을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감독에게 요구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 파치노가 요구하니까 감독도 어쩔 수 없이 뉴올리언스에 있는 극장을 하루 빌렸다. 그런데 그 극장이 어마어마하게 큰 오페라 극장이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으니까 잔뜩 긴장해서 갔는데 알 파치노가 한 신을 가지고 대사도 바꿔가며 다양한 연기를 보여주는 거다.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떨까 하면서. 저런 열정과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존경스러웠다. 애드리브를 15분가량 막힘없이 하는 것을 보면서 ‘이래서 전설적인 배우구나’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알 파치노와 개인적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알 파치노는 내가 아는 분과 친한 사이였고 대여섯 번 정도 같이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만나면 그분의 재미난 영화계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한번은 영화 ‘대부’를 찍을 때의 에피소드를 장황하게 말하는데 현실감이 없는 거다. 그렇지 않겠나. ‘대부’는 전세계 영화인들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고 지금껏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일화를 나에게 얘기해 준 거다. 얼마나 신기했겠나.”

▲이번 영화에서 아쉬웠던 부분이라면.

“캐릭터적으로 좀더 재밌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게 그렇고, 특히 잭 니콜슨의 ‘차이나타운’을 오마주한 첫 장면이 편집돼 아쉬웠다. 개인적으로는 안상구의 유머러스함과 그가 영화 마니아라는 점을 보여줘서 좋았던 장면이다. 아무튼 그 장면까지 포함된 완성본의 러닝타임이 3시간40분 정도 되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만약 디렉터스 컷이 나오면 꼭 보길 바란다.”

▲결과물에는 만족하나.

“물론이다. 나는 정말 좋았다. 승우 역시 좋았던 모양이더라. 시사회가 끝나고 승우가 맥주를 사들고 우리집을 방문했다. 그는 자기 것에 대해서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가 출연한 뮤지컬을 보고 우리가 재밌다고 말하면 ‘에이, 뭐가 재밌어요’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선 ‘형, 이 영화 정말 재밌더라’ 그러는 거다. 의외였다.”

▲평소 친분관계가 있나.

“전에는 전혀 몰랐고 이번 영화를 통해 친해졌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은 보는 것 같다.”

▲배우로서 지금 한국영화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같은 테두리 안에 있으면 우리의 특징이나 특성을 잘 모르게 된다. 객관적으로 접할 기회가 있다면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서 ‘변화가 있구나’ ‘어떤 게 한창 사람들에게 이슈가 되고 있구나’를 느끼는데 그 테두리 안에 있으면 모른다. ‘내부자들’과 같은 사회성 짙은 영화들이 최근 많이 제작됐다. 한국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그런 영화밖에 만들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한때 일본영화들을 보면서 ‘왜 일본은 탐정영화들이 많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보면 사회고발 영화들이 몇 년 동안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건 단순한 유행이기보다는 씁쓸한 측면이라고 본다. 이런 영화가 대세가 된 건 그런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나도 이런 소재의 영화는 처음이고 그래서 새롭게 느껴진 부분이 있지만 한편으론 불편했다. 이 유행이 빨리 지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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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후반의 나이다. 연기적으로 예전보다 풍부해졌다고 느껴지는 게 있다면.

“그렇게 되기를 갈망한다. 지금도 풍부한 감성연기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감성을 100% 이해하지 못할 때다. 특히 미국 배우들과 연기를 하다 보면 그들이 똑같은 상황에서도 매번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나 스스로에게 실망한 적이 많았다. 물론 문화적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문화나 언어의 벽이 있더라도 그들의 연기가 새롭게 다가오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럴 때가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으니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감정상태가 전과는 달리 많이 풍부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연기를 하다 보면 할리우드 스타일과 국내 연기 스타일이 서로 섞이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렇게 섞이게 되면 이도저도 아닌 게 된다. 물론 외국영화를 찍을 때는 한국적인 것을 일부러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슬플 때나 즐거울 때 우리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반면 한국영화에 미국적 느낌을 보여주는 건 아직 위험할 것 같아서 자제하는 편이다.”

▲‘지. 아이. 조’로 처음 할리우드에 진출했을 때와 지금의 당신 위상에는 어떤 변화가 있나.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미국인들은 여전히 나를 켄 정(한국계 미국 배우)으로 안다. (웃음) 여전히 그들이 나를 잘 모르고 내가 그들보다 더 작은 트레일러를 사용한다. 또 먼저 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다만 이제 그런 것에 익숙해졌다는 게 다를 뿐이다.”

▲할리우드를 향한 목표가 있다면.

“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가소로울 수 있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날고 기는 프로들의 세계로 왔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사실 같은 연기자이지만 그런 점에서 핸디캡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 문화적인 차이도 그렇고. 그래서 내가 저들을 이겨볼 거야 하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래도 끝까지 한번 해보고 싶고, 부딪쳐 보고 싶다.”

▲이방인으로서 서러움도 분명 있었을 것 같다.

“인종차별 때문에 울컥하고 발끈한 적이 있다. 잘 알려진 할리우드 스타인데 나와 시선을 마주치기를 꺼리더라. 악수를 청했는데도 그냥 지나쳐서 뻘쭘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알 파치노를 포함한 몇몇 배우들은 친근하게 대해줬다. 특히 촬영 현장에서 만난 알 파치노의 아우라는 대단했다. 자다가도 누가 건드리면 나올 정도로 대사를 달달 외웠는데 그와 마주한 순간 숨이 안 쉬어지더라. 그러다보니 말이 제대로 안 나오고 대사가 떠오르지 않아 버벅댔다. 그래서 한국에서처럼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갈게요’라고 말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조용해지는 거다. 알고 보니 걔네들은 컷을 안한다. 아예 못 쓰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중간에 실수를 해도 보통은 끝까지 간다. 그런 나를 위해 알 파치노가 옆에서 복화술을 하듯 ‘틀려도 계속해, 계속해’ 그러는 거다. 결국 다섯 번의 NG 끝에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엉뚱한 상상과 호기심이다. 그러다 보면 관찰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특이한 버릇이 있는 사람을 보면서 그 버릇이 왜 생겼는지 유추해볼 수 있고, 그런 호기심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고 생각한다.”

▲내년 촬영계획은 어떻게 되나.

“국내영화 두 편과 미국영화 한 편 정도 촬영할 예정이다. 지금껏 맡아보지 못한 역할이라 기대가 크다.”

▲최근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어떤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보나.

“그렇게는 생각 안 한다. 아직 끝났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앞으로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는 배우 이병헌으로 더욱 열심히 잘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게 나를 사랑해주시는 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호호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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