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11] 버림받은 땅 우토로

  • 이은경
  • |
  • 입력 2015-11-24   |  발행일 2015-11-24 제6면   |  수정 2022-05-19 09:58
日이 숨기고 싶은 강제노역 마을…가난·차별 속 잊혀진 존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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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들로 빼곡한 우토로 마을의 전경. 토지소유분쟁에 휘말리면서 우토로 마을은 개발이 중단된 채 시간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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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마을 철조망 너머는 일본 육상자위대 기지다. 강제 징용된 우토로 주민들이 땅을 파 흙을 퍼다 날라 만든 비행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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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토로 주민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인 우토로 동포생활센터 ‘에루화’

일본 교토부 우지시 이세다초 우토로 51번지. 이곳에 일본 내 마지막 조선인 징용촌, 우토로 마을이 있다. 70여년 전 시작된 재일 한국인들의 끝나지 않은 망향의 삶이 이어지는 곳이다. 교토에서 긴텐쓰선을 타고 이세다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면 우토로 마을을 만난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 채 15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 작고 조용한 마을에 65가구 17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서 낳은 자식들이 손자를 볼 때까지 그들은 잊힌 존재였다. 그들은 묻는다. 우리가 모두 늙어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인가.

조선인노동자 1300명 합숙마을
해방 후 보상도 못 받고 방치돼

20여년 걸친 토지소유권 분쟁속
재일동포 1세는 단 2명만 생존
후손 170여명도 상당수 고령자

“우리 모두 늙어 죽기만 기다리나”
日, 아무런 행·재정적 지원 안해

주민들 우물물 쓰고 홍수 시달려
주거환경 개선 5년 이상 걸릴 듯

◆강제 징용된 조선인 징용촌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38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했다. 1939년에는 국가총동원법에 기초해 국민 징용령을 실시하고 노동력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100만여명의 조선인이 강제징집되었다.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조선소, 히로시마의 야스노 발전소, 오사카의 우토로 등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마소처럼 일했다.

우토로 마을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1년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목적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1천300여명의 집단 합숙을 위해 건설된 곳이다. 삼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함바집의 10㎡ (3평) 크기 정도의 방 하나에 한 가족이 살았다. 삼나무 껍질을 얹은 지붕은 금세 구멍이 뚫려 비가 샜다. 합판 한 장이 전부인 벽은 틈이 많아 겨울엔 추위가 혹독했고 여름엔 단열이 안 돼 찜통이었다. 여자들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일꾼들의 밥을 하고 아이들을 키웠다. 남자들은 비행장 공사장에 가서 땅을 깎아 활주로를 닦고 비행기 격납고를 지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그러다 광복이 됐다. 우토로 주민들은 북과 장구를 치며 잔치를 벌였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비행장 건설은 중단됐고, 조선인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돈 한 푼 돌려받지 못한 채 실업자로 전락했다. 집에 갈 뱃삯이 없어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여기서 살다 죽는 게 소원이지

우토로는 태평양 전쟁 당시 비행장을 건설하던 일본국제항공공업의 소유였다. 이후 미군이 진주하며 전범 재산 해체 작업이 벌어졌지만, 일본국제항공은 한국전쟁의 특수를 입어 미군 트럭을 생산하는 신일국공업으로 부활했다. 이후 1960년대 마을 토지 소유권은 비행장 건설업체를 인수한 닛산차체로 넘어간다. 닛산차체는 주민들의 토지 점유를 묵인했지만 도로·상하수도 등 시설 설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1987년 닛산은 경영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주민들 몰래 우토로 땅을 제3자에게 매각했고, 소유권은 서일본식산으로 넘어간다. 1989년 서일본식산은 주민들에게 퇴거를 요구했다. 주민들이 소송을 냈지만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주민들에게 퇴거명령 확정판결을 내린다. 우토로마을 사람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돼 노역에 시달린 후 아무런 보상을 받지도 못하고 방치됐을 뿐만 아니라 터전까지 빼앗기게 됐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숨기고 싶어했던’ 이 마을에 어떤 행·재정적인 지원도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태반이 아직도 우물물을 길어 쓰고, 마을엔 하수도 시설이 설치되지 않아 비만 오면 물에 잠긴다. ‘경제대국 일본에서 이런 빈곤과 배척이 있다니 충격’이라고 유엔 인권위원회의 보고서는 적고 있다.

당장 땅을 사지 않으면 내쫓길 위기에 처한 우토로. 2005년 우토로 국제대책회의가 결성되고, 모금과 정부의 지원으로 어렵사리 마을의 땅 2만1천여㎡(6천400여평) 가운데 6천600여㎡(2천여평)를 매입해 고비를 넘겼다. “한국이 미국처럼 강대했으면 일본놈들이 우리한테 이러겠어"라고 억울해하던 주민들은 처음으로 모국에 대한 고마움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우토로 주민들의 80%는 ‘대한민국’ 국적이다.

하지만 이들이 피땀 흘려 지은 집들이 철거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우토로의 한국인들은 3분의 1로 줄어든 땅에 공동주택을 지어 함께 살게 된다. 5년 후인 2020년 전체 입주를 목표로 조만간 단계적인 철거와 임시 이주가 시작된다. 낡고 초라하지만 마을의 역사가 담긴 풍경도 곧 사라진다.



◆우토로의 새로운 마을 만들기

우토로 마을의 대부분은 60세 이상의 재일동포 1·2세들이다. 평생을 차별과 가난에 맞서 싸우며 살아온 이들의 소원은 소박하다. “내가 앞으로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나. 그냥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는 게 소원이지.”

20여년에 걸친 우토로의 길고 힘든 토지 소유권 분쟁이 이어지는 동안 우토로의 많은 재일동포 1세들이 세상을 떴다. 1999년 320여명이던 주민은 170여명으로 줄었다. 1940년대부터 우토로를 지켜온 1세대는 2명만이 생존해 있다. 2012년 말 조사 결과를 보면 주민 158명 가운데 65세 이상 고령자는 57명(36.1%)이었다. 우토로에 40년 이상 거주한 세대는 80%에 달했다.

우토로 마을은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지난해 일본 국토교통성·교토부·우지시가 참여하는 ‘우토로지구 주거환경 개선검토 협의회’는 우토로에 공영주택 60가구 및 도로 건설, 상하수도 시설 정비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마치즈쿠리’(민관 협치 마을 만들기) 기본구상을 발표했다. 기본구상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설계 작업을 거쳐 본격적인 공사가 완료되기까지는 최소 5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글·사진= 일본 교토에서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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