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38] 정읍 은진송씨 가문 ‘죽력고’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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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2-03   |  발행일 2015-12-03 제22면   |  수정 2015-12-03
“모진 고문에 만신창이 된 녹두장군…세 잔만 마시고도 몸 추슬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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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력고에 사용되는 재료인 죽력(가운데), 솔잎, 계피, 생강, 댓잎, 석창포 등.<송명섭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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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수액인 죽력 추출을 위해 청죽 조각을 항아리에 채우고 있는 송명섭씨. <송명섭씨 제공>


정읍 태인서 양조장 운영 송명섭씨
외조부 비법 이어받아 가양주 빚어
예부터 멍들고 병든 몸에 특효 명성

청죽 조각을 쪄 수액 ‘죽력’ 추출해
원료술 기주와 끓여 증류수 받으면
알코올 도수 30∼35도 약소주 탄생

전북지역 전통 명주로 이강주, 송순주, 송화백일주 등과 더불어 ‘죽력고(竹瀝膏)’가 유명하다. ‘죽력을 사용하는 약소주’라는 의미다.

‘죽력(竹瀝)’은 대나무에서 채취한 진액을 말한다. 수액 같은 기름인데 푸른 대나무 줄기를 숯불이나 장작불 기운에 쬐어 흘러나오게 한다. ‘죽즙(竹汁)’ ‘담죽력(淡竹瀝)’이라고도 한다.

죽력은 성질은 차고 독이 없어, 열담(熱痰)이나 번갈(煩渴)을 고치는 데 쓰였다. 한의학에서는 이 죽력을 이용한 죽력고를 빚을 때 생지황, 꿀, 계심, 석창포 등을 함께 사용한다. 특히 아이가 중풍으로 갑자기 말을 못할 때 구급약으로 사용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죽력고가 널리 유명해지게 된 것은 ‘녹두장군’으로 불리던 전봉준(1853~1895)과 관련된 이야기가 세간에 회자되면서부터였다.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이 쓴 ‘오하기문(梧下紀聞)’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내용이 있다.

‘전봉준이 관원에게 사로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지역 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고 죽력고를 가져가 마시게 했다. 전봉준은 그 죽력고 세 잔을 마시고는 몸이 나았으며, 수레 위에 꼿꼿하게 앉은 채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죽력고는 멍들고 병든 몸을 추스르는 데 특효인 명약주로 널리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맛은 달고 성질은 찬 죽력은 실제 심경(心經)과 위경(胃經)에 작용하며, 열을 내리고 가래를 삭인다. 담(痰)으로 인한 열로 기침할 때, 중풍으로 담(痰)이 성한 때, 경풍(驚風), 파상풍 등에 사용했다. 그대로 먹거나 졸여 엿처럼 만들어 먹는다. 환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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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정읍시 태인면의 은진송씨 가문 송명섭씨(태인양조장)가 생산한 죽력고.<송명섭씨 제공>

◆태인 은진송씨 가문에 전해 내려온 죽력고

죽력고는 대나무가 많이 나는 전라도 지역 여러 곳에서 예부터 빚어왔겠지만 지금은 태인의 은진송씨 가문 송명섭씨가 태인양조장(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392-1)을 운영하며 빚고 있는 죽력고가 유명하다.

송명섭씨의 죽력고 전통은 자신의 외조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읍시 태인면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외조부 은재송씨(1864~1945)가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비방을 모아 직접 술을 빚어 치료 보조제로 사용하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의 딸 은계정씨(1917~1988)가 송씨 가문으로 시집오면서 태인양조장을 경영하던 남편과 함께 죽력고를 빚으며 그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때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졌을 때 치료약으로 이 죽력고를 사용해 완치시키기도 했다.

송씨는 어머니를 도우면서 몸으로 체득한 죽력고 제조법으로 태인양조장을 운영하며 막걸리와 함께 죽력고를 주조하고 있다. 죽력고는 약이라는 법 해석으로 인해 1999년이 되어서야 술로 승인을 받고 일반 판매를 시작할 수 있었다. 송씨는 또 이 죽력고로 2003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6-3호로 지정되고, 농림수산부가 지정하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48호로도 지정됐다.

송씨는 “전통주는 어느 한 개인이나 가문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죽력고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한다. 죽력고는 옛날부터 곳곳에서 만들어왔고, 자신은 그 전통을 잇게 된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제가 우암 송시열 선생(1607~1689)의 27대 후손인데, 우암 선생이 죽력고를 드시고 ‘절미(絶味)하다’, 즉 맛이 매우 뛰어나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또 전북지역이 배경인 춘향전에도 상차림 중 죽력고가 등장합니다. 노랫가락 중 하나인 ‘의부가’에도 죽력고가 나오고, 정약용 선생도 죽력고를 너무 많이 만들어 대나무가 부족하니 고관대작들이 좀 자제하란 내용을 남겼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죽력고와 관련된 일화가 있고요. 즉, 죽력고는 이미 조선시대에 널리 퍼진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정치를 하는 분도 드셨고, 노랫가락에도 있고, 소설에도 등장하고 했던 그 술입니다. 지금도 아마 가양주로 죽력고를 빚는 집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죽력과 솔잎, 생강, 계피, 석창포 등을 넣어 빚는 증류주

죽력고를 빚기 위해서는 먼저 죽력을 뽑아내야 한다. 대밭에서 청죽을 잘라 와 마디마디 자르고 다시 여러 조각으로 쪼갠 뒤 항아리 안에 차곡차곡 채운다. 대나무를 담은 항아리는 땅에 묻은 단지 위에 거꾸로 얹고, 항아리 입구 사이를 물 먹인 한지로 메운 뒤 항아리 전체를 황토 진흙으로 발라 덮는다. 그리고 항아리 주변에 말린 콩대를 두르고 불을 지핀다. 왕겨도 함께 사용한다.

그러면 뜨거운 열로 인해 항아리 속에서는 대나무 수액이 빠져 나와 아래 항아리에 고이게 된다. 3~4일 걸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보리차 색깔의 죽력을 추출한다.

증류 소주인 죽력고를 빚기 위해서는 소주의 원료술인 ‘기주(起酒)’를 먼저 빚어야 한다. 기주는 통상적으로 빚는 전통주와 같다. 쌀로 고두밥을 쪄서 누룩과 물을 섞어 발효시키면 된다. 기주는 한 차례로 끝내기도 하고, 두세 차례 빚기도 한다. 거듭할수록 좋은 소주를 얻을 수 있다.

이렇게 빚은 기주는 3~5일간 숙성을 시킨 후 청주나 막걸리를 만들어 가마솥에 담아 안치고 불을 지펴 술을 끓인다. 이어 솥 위에 소줏고리를 얹는데, 이때 솔잎과 대나무 잎, 생강, 계피, 석창포 등을 죽력에 흠뻑 적셔서 소줏고리 안의 빈 공간에 가득 채운다. 그리고 소줏고리 위에는 냉각수 그릇을 올려 놓는다. 솥과 소줏고리, 소줏고리와 냉각수 그릇 사이의 틈새는 밀가루 반죽으로 붙여 기화된 알코올이 새어 나오는 것을 막는다.

이렇게 하여 기주 양의 30% 정도 되는 죽력고를 얻게 된다. 알코올 도수는 30~35도. 태인양조장 죽력고는 알코올 도수 32도다.

‘동국세시기’에는 ‘호서죽력고(湖西竹瀝膏)’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대나무와 연고가 있는 술이니 호서지방의 특주로 유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제조법에 대해 ‘증보산림경제’에서는 ‘대나무의 명산지인 전라도에서 만든 것이 유명하다. 청죽(靑竹)을 쪼개어 불에 구워 스며나오는 진액과 꿀을 소주병에 넣고 중탕하여서 쓰는데 생강즙을 넣어도 좋다’고 되어 있다.

옛날 방식 그대로 죽력고를 생산해내고 있는 송명섭 명인은 “술에 약재를 직접 넣지 않고 맛과 향을 간접적으로 우러나게 하는 것이 특징”이라며 “약주로도 알려진 죽력고의 ‘고(膏)’는 최고급 약소주에 붙이는 명칭”이라고 말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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