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조영래, 그는 누구인가…출생부터 타계까지 43년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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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2-11   |  발행일 2015-12-11 제34면   |  수정 2015-12-11
신천 용두방천서 멱감고 앞산 놀러다녀…대구서 나고 초등 4학년까지 살아
조영래! 시대를 밝힌 사람, 뿌리는 대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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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 변호사가 태어난 대구시 중구 대봉동 309번지 일대. 그가 살던 옛 단층 기와집은 사라지고 상가빌딩이 들어섰다. 이곳에 조 변호사의 생가였음을 알리는 동판을 설치하자는 의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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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 3학년 재학시절,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한 조영래 변호사(동그라미 안)가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있다.


◇ 유·소년기
현재 캠프헨리 북쪽 담 건너편
중구 대봉동 309번지에서 출생
말수가 적었고 또래보다 성숙
어머니가 사준 세발자전거 분해
물고기와 놀려고
어항에서 꺼냈다가 죽이기도

◇ 고교·대학 시절
경기고 3학년때 한일회담 반대시위 선두에서 대오를 이끌다 처벌받아
서울대 법대 2학년때는
삼성사카린밀수 성토하다 정학 처분
손학규·김근태 등과
3선개헌 반대 등 학생운동 이끌기도

◇사법연수원·변호사 시절
민청련 사건 배후 지목 6년간 수배
이 기간 전태일평전 쓰고 노동자삶
1983년 법률사무소 개업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등을 맡아
인권·노동·민주주의 발전 큰 기여
88년 ‘민변’ 출범에도 주도적 역할


▲유·소년기=조영래는 1947년 3월26일 대구시 중구 대봉동 309번지에서 조민제·이남필 부부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셋, 아래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하나 있다. 309번지는 현재 대봉네거리 남서편 모퉁이 일대로 ‘서울김밥’(중구 대봉동 309-11)을 비롯해 아크릴가공 전문점(309-11), 피아노사 등이 붙어있다. 한때 아크릴 가게는 대덕탕이 있던 자리다. 조영래의 바로 아랫동생 조성래 목사는 309번지 주택은 단층 기와집이라고 했다.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조영래 평전에 따르면 감나무가 있던 제법 큰 적산가옥으로 나온다. 이곳은 현재 캠프헨리 북쪽담벼락 건너편이다. 지금은 복개돼 도로가 됐지만 이곳엔 대구천이 흘렀다.

부친 조민제씨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청송에서 1942년 대구로 와 미강유 비누공장을 했다. 어릴 적 유치원에 다니기도 했던 조영래는 부친의 사업 실패로 잠시 가족과 떨어졌다. 그는 부친·큰누나와 함께 서울로, 어머니와 동생들은 봉덕동으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곧 서울에서 다시 만난다. 조영래는 4학년 때까지 대구초등을 다니다 1957년 서울로 이사를 해 수송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조영래는 유년시절 어머니가 사준 세발자전거를 분해하거나 어항 속 물고기와 같이 놀기 위해 물고기를 꺼냈다가 죽인 적도 있다. 또래와 다르게 범상치 않았다고 한다. 그가 4학년 때 같은 반 반장이던 김철 전 숙명여대 교수는 “영래가 얼굴이 통통하게 생겨 인상적이었다. 똑똑했지만 영재는 아니었다. 말수가 적었고 또래보다 성숙한 소년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래 집에 놀러가기도 했는데 마당에 대나무와 정원이 있어 중상류층 정도의 가정형편은 됐다고 기억한다. 영래와 신천 용두방천에서 멱을 감기도 하고 앞산에 놀러가기도 했다. 영래가 대학 때 등산을 좋아했는데 어릴 때 자연친화적으로 자라서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김철 교수는 이후 경북중·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서 조영래를 재회한다. 1982년 김 교수가 숙명여대 법대를 창설할 때 조영래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청소년기=서울로 간 조영래는 당시 전국의 수재들만 간다는 경기중·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65년 서울대에 전체수석으로 입학했다. 두 남동생(성래·중래) 역시 경기고를 나와 각각 서울대 상대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수재였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그는 고교시절 입주 과외를 하며 학비를 보탰다. 고3 때 그는 두 번의 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는 64년 3월 학생회 학술부장으로서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경기고 학생 1천여명은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시위를 벌였다. 플래카드에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드냐’라고 적었는데 조영래가 착안한 것이었다. 조영래는 선두에서 대오를 이끌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처벌을 받았다. 또 한 번은 고3 때 공납금을 제때 못내 성래(경기중 3)와 함께 학교게시판에 이름이 붙었는데 조영래가 이를 찢어버려 이틀간 정학을 당했다. 고교시절 그는 룸비니회, 변론반, 농촌연구반 같은 동아리에 가입해 나름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서울대 법대 및 대학원 시절=서울대 사상 최고 성적으로 수석입학한 그는 법대 재학시절 고시공부보다 사회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두 차례의 근신과 정학을 당했다. 1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 데모에 참여했다 3개월 근신처분을 받았으며 2학년 때 삼성사카린 밀수 성토대회를 주도하다 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는 형사법학회·민사법학회 같은 엘리트학회 대신 사회법·노동법학회에 가입하고 전형적인 법대생들과 달리 다양한 친구를 사귀었다. 안경환 전 교수는 조영래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소위 ‘KS(경기고·서울대 법대) 마크’의 소유자임에도 전형적인 KS와는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법대 시절 손학규·김근태 등과 함께 3선개헌 반대를 비롯한 각종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1969년 졸업한 그는 코리아헤럴드 기자 수습을 하다 그만두고 법대 대학원에 입학한다. 이후 12년 만에 석사학위를 딴다. 70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전태일 분신사건을 접한 뒤 서울대 법대 교정에서 추도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전태일 열사 서울대 법대학생장(葬)을 주선하고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이후 전태일 유족과 평화시장 노동자, 장기표, 시민사회단체 등과 접촉을 넓혀갔다.



▲사법연수원 시절=1971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사법연수원 시절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1년6월의 옥고를 치렀다. 사건 공소장에 따르면 1971년 4월27일 시행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보고 앞으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 학생봉기를 통한 폭력혁명을 모의했다고 나와 있다.

1973년 만기출소한 그는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80년 1월까지 6년간 도피와 수배생활을 했다. 조영래는 수배기간 장기표로부터 전태일이 쓴 수기를 넘겨받아 전태일 평전을 썼다. 77년 11월, 그는 수배 중 전태일 열사 분신 7주기를 맞아 ‘저 처절한 불길을 보라. 저기서 노동자의 아픔이 탄다. 저기서 노동자의 오랜 억압과 죽음이 탄다.(하략)’는 내용의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이란 시를 지었다. 78년 11월 전태일 평전은 ‘불이여, 나를 감싸안아라-어느 한국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어판으로 최초 출간됐다. 저자는 金英琪·李浩培(번역)로 표기됐는데 ‘英’은 조영래이며 ‘琪’는 장기표다. 조영래는 10곳이나 은신처를 옮겨다니며 수배 기간 보일러기사 자격증을 비롯해 20여개의 자격증을 따고 노동자로 살아갔다.



▲변호사 시절=1980년 1월 수배생활을 끝낸 그는 그해 3월 사법연수원에 재입소한다. 이듬해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82년 연수원을 수료(12기)한 뒤 9월 김앤장 소속으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다. 만 7년의 짧은 변호사생활이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큰 업적을 남긴다. 그는 83년 6월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하고 부설로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뒀다. 85년 노동운동가이자 이론가인 박석운이 들어오고 윤종 현·천정배·김선수·박주현·김한주 등 서울대 법대 출신 변호사가 참여했다. 안 교수는 시민공익법률사무소 개설은 특권의 상징이 아닌 변호사가 시혜적 도움을 주는 미덕의 차원이 아니라 주인인 의뢰인에게 충실한 조력자가 되는 서비스맨의 임무를 다하자는 의미에서 설립됐다고 했다. 안 교수는 시민법률사무소 폐쇄 이후 한참 뒤 ‘사법서비스’란 용어가 등장했다고 밝혔다. 그는 조영래가 사법연수원 재입소 시절 공익변론을 사회개혁과 인권확장 수단으로 인식하고 원조격인 1960년대 미국 변호사 랄프 네이더가 전개한 공익법운동을 자주 언급했다고 회고했다.

시민공익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들은 서울 망원동 수재사건을 비롯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 본질적 인권문제에 대해 법률적으로 접근해 큰 성과를 냈다. 그의 용기와 열정으로 세상을 바꾼 대표적 사례가 남아있다.

84년 망원동 수재민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5년10개월이 걸린 이 사건은 우리나라 사법사상 초유의 대규모 집단소송이었다. 이 판결은 무책임한 행정에 대한 시민의 승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85년 6월 25세 여성 결혼 퇴직 관련 조기정년제 사건 변호를 맡은 조영래는 결혼하면 퇴직한다는 판결이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소송을 해 이듬해 7차례나 되는 긴 심리 끝에 승소했다. 성차별이란 인습의 장벽을 깬 여성인권의 승리였다. 86년 4월 그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시국사건 변호를 맡아 국가와 공권력, 사법부가 국민의 인간적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을 폭로했다. 그는 고문경찰관을 처벌받도록 했고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아냄으로써 독재정권의 종말을 앞당겼다. 이 밖에 상봉동 진폐증 사건을 변호해 승소함으로써 선구적 환경소송의 선례를 남겼다. 또 한겨레신문 압수 수색 취소청구 사건 변호를 맡아 편집국 압수 수색은 언론 자유의 위축과 민주주의 훼손을 가져온다고 설파해 언론사가 압수수색을 거부할 적법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그는 일반 민·형사 사건도 맡았으나 의뢰인을 직접 대면하고 사건의 추이를 설명하는 원칙을 지켰다. 의뢰인은 재판과 무관하게 그에게 무한한 인간적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1986년 대한변협 인권보고서 발간의 산파역을 하고 인권변호사들의 상설조직인 정법회를 창립하는 한편 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조영래는 많은 칼럼을 써 사회문제와 부조리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87년 대선 당시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해 심한 좌절을 겪었다. 88년 민주세력의 통합운동에 나서기도 한 그는 국제적 인권운동을 모색했다. 90년 봄 조영래는 미국 컬럼비아대에 유학해 인권법을 공부하다 폐암 3기 진단을 받고 그해 12월12일 4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그는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에 대한 추모열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추모 1주기를 맞아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가 발간되고 2주기에는 ‘조영래 변호사 변론선집-그 인권의 발자취’가 출간됐다. 또 2001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10주기 행사를 가졌고 2004년 서울대 법대가 선정한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이 돼 서울대 법대에 ‘조영래 기념홀’이 생겼다. ☞ W3면에 계속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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