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39] 강릉 창녕조씨 명숙공 종가 ‘질상’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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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2-17   |  발행일 2015-12-17 제22면   |  수정 2015-12-17
허리 펼 날 없이 품앗이 한 ‘질꾼들’ 위해 정성스레 차린 농한기 잔칫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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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창녕조씨 명숙공 종가가 운영하는 식당 ‘서지초가뜰’에서 손님에게 차려내는 질상. 옛날 마을 일꾼들에게 정성을 다해 차려내던 질상을 그대로 내놓고 있다.

농경시대에는 농사를 짓는 일이 제일 중요하고, 농사꾼이 누구보다도 소중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농사꾼에 대해 예전처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우리나라는 농사 중에서도 논농사, 즉 모를 심고 벼를 수확하는 일이 핵심이었다. 예전의 벼농사 농부들은 모를 심고 김을 매서 벼가 별다른 손길 없이도 잘 자라게 되는 시점까지는 허리를 펼 날이 없었다. 이렇게 벼농사가 일단락된 때 잠시 찾아오는 농한기에 마을 일꾼들은 한자리에 모여 풍성한 음식을 마련해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인심 후한 종가에서는 솜씨와 정성을 다해 풍성한 음식상을 차려 마을 일꾼들을 대접했다. 강릉의 창녕조씨 명숙공 종가의 ‘질상’은 그 대표적 사례다.

포식해·씨종지떡·영계길경탕 등 푸짐
고된 논농사 마무리한 뒤 기력 보충…
총각에 ‘판례떡’ 주는 일꾼 성인식도

종부 최영간, 사라진 질상문화 부활 꿈
종택 일꾼들 거처 개조해 음식점 개업
‘문지방 넘는 사람 한결같이 대접’ 실천

◆일꾼들의 잔칫날 ‘질 먹는 날’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의 창녕조씨 명숙공 종가 주변 마을은 대부분 같은 성씨들이 살던 집성촌이었다. 농사일도 마을 집집마다에서 차출된 일꾼들이 모여 힘을 합해 품앗이로 했다. 품앗이를 함께 하는 일꾼들을 질꾼이라 했다. 25명 정도 되었다.

모내기도 질꾼들이 순서를 정해 집집마다 돌며 하는데, 다 끝내려면 한 달 가까이 걸렸다. 모내기를 하고 모가 뿌리를 내린 뒤 김매기를 몇 차례 하고 나면 벼가 왕성하게 자라기 시작한다. 그러면 잠시 일손을 쉴 수 있는데 7월 초순쯤 된다. 이때 날을 잡아 질꾼들이 명숙공 종가에 모여 잔치를 했다. 모심기를 비롯해 그동안 해온 품앗이 계산 등 결산을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날 점심때 질상을 차리는데, 집집마다 각기 음식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종가에서 술과 떡, 영계탕, 밥 등 대부분을 차려냈다.

명숙공 종가의 9대 최영간 종부(70)는 26세에 이 종가로 시집왔는데, 그 이듬해에 특별한 장면을 목격한다. 그해 여름, 질꾼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질 먹는 날’이었다.

종택 마당에 질꾼들이 모인 가운데 품앗이 결산 등 회의를 마친 후, 당시 88세의 조인환 종손이 종가에서 7세 때부터 잔심부름을 시키며 키워온 20세 총각을 질꾼들 앞에 세워놓고 선군(질꾼 우두머리)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부탁했다.

“내가 이 아이를 그동안 키워왔는데, 이제 헌헌장부가 다 되었네. 나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자네에게 이 아이를 부탁하네. 잘 인도하고 돌보아주며 좋은 질꾼으로 만들어주길 바라네.”

선군은 “예, 잘 알겠습니다. 눈여겨봤는데 가래질 솜씨도 좋고 해서 훌륭한 질꾼이 될 재목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총각은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함지에 담긴 판례떡을 그릇에 담아 어른 상과 선군 상에 올렸다. 그리고 대나무 꼬치에 판례떡인 송편을 세 개씩 꿰어 질꾼들에게 하나씩 주고 술도 한 잔씩 따라 올렸다.

종부는 멀리서 본 이날의 풍경이 너무나 감동스러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조부가 존경을 받는 유학자이자 종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남의 집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워왔고, 그 총각을 선군에게 맡기며 고개를 숙여 진심을 다하는 모습이 가슴 깊이 새겨졌던 것이다.

판례는 어린 아이가 자랐을 때 한 사람의 어엿한 일꾼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을 말한다. 성인식인 관례가 있듯이, 판례는 일꾼 성인식인 셈이다. 판례 때 특별히 하는 떡을 판례떡이라 했다.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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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상에 오르던 영계길경탕(위)과 씨종지떡.

◆귀한 음식 아낌없이 내어 정성을 다해 차린 질상

질꾼들을 위해 차려내는 질상은 종가에서 차려내는 음식상 중 가장 풍성하고 화려했다. 판례가 있을 때는 판례떡까지 더해져 더욱 풍성해진다. 고된 농사일을 일단락한 뒤 기력을 보충하고 여름을 건강하게 나도록 풍성한 보양식으로 차린다.

질상에 오르는 대표적 음식으로 씨종지떡, 영계길경탕, 포식해 등을 들 수 있다. 씨종지떡은 모판에 뿌리고 남은 볍씨를 빻아 만든다. 일부러 질상을 차리기 위해 볍씨 용도의 나락을 넉넉히 보관해두었다가 볍씨로 쓰고 남은 것을 사용했다. 이 종가의 볍씨 보관 독은 사람이 들어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씨종지떡에는 쑥과 호박, 밤, 대추, 곶감 등이 들어간다. 맛도 좋고 보기에도 좋다.

영계길경탕은 봄에 부화해 그동안 자란 영계를 수십 마리 잡아넣어 만든다. 그리고 도라지와 인삼, 대추, 감자, 호박, 수제비 등이 들어간다. 영계삼계채는 닭살을 찢어 오이·인삼 채와 함께 넣고 참기름, 붉은 고추, 풋고추, 깨를 넣고 무쳐 낸다. 그 위에 통 인삼 두 개를 얹어 마무리한다.

포식해는 제사상에 올렸던 대구포, 명태포, 오징어포 등을 모아 엿기름과 양념에 재운 뒤 찰밥과 고춧가루를 섞어 발효시켜 만든다.

그리고 판례가 있을 때 만드는 판례떡은 밤, 팥, 강낭콩 등을 소로 넣어 빚는 송편이다. 쑥, 치자, 해당화로 삼색을 내었다. 세 가지 색깔은 축하의 의미를 담고 있다. 판례떡 송편은 일반 송편보다 훨씬 크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잡채, 각종 전, 묵은 김치, 무선, 묵, 옥수수범벅 등이 질상에 올랐다.

질상과 함께 명숙공 종가의 중요한 음식으로 못밥이 있다. 못밥은 질꾼들이 모내기를 할 때 그들을 위해 차리던 것이다. 모내기 기간(한 달 정도) 차려내던 음식이다. 이때도 시루떡, 백설기, 도라지자반, 쇠미역 부각, 묵은 김치, 팥밥, 두부, 미역국 등을 정성 들여 아낌없이 차려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질꾼들이 종가에 모여 모 심는 순서를 정하는데, 이를 ‘질 짠다’라고 했다. 이때도 풍성한 음식을 차려낸다.

이 종가의 가양주는 송죽두견주로 진달래꽃과 솔잎, 대나무잎, 꿀 등을 사용해 담근다.

◆종택은 질상을 그대로 내놓는 식당으로

이런 질상 문화도 최영간 종부가 시집온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종부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마련해 동네 주민들과 나눠 먹으며 모두가 한 식구같이 위해 주는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또한 질상에 올리던 음식이 잊히는 것도 아쉬워 1997년 강릉시농업기술센터의 지원 속에 질상 음식을 되살려 일반인에게 선보이는 사업을 준비, 1998년 못밥과 질상을 메뉴로 하는 식당 ‘서지초가뜰’을 개업했다. 종택의 일꾼들 거처인 초가를 기와집으로 확장·건립해 음식점으로 개업한 것이다.

음식 재료는 거의 모두 무농약 유기농으로 농사를 지어 사용한다. 종부는 시조부가 생전에 이야기한 ‘이 집 문지방을 넘나드는 사람 누구에게나 어머니의 마음으로 한결같이 대하며 살면 잘 살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지초가뜰에는 평일에도 손님들이 가득했다. 종택이 있는 마을은 ‘서지(鼠地)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서지는 쥐가 곡식을 물어다 갈무리해 두는 땅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종택 뒤에는 대나무 숲이 있는 야산이 두르고 있고, 앞쪽에는 들판이 이어지는 골짜기가 펼쳐져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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