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술과 음식 이야기 .40] 모악산 수왕사 석씨가문 ‘송화백일주’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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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2-31   |  발행일 2015-12-31 제22면   |  수정 2015-12-31
산중서 수행하다 병 찾아든 선승들 치료 위해 빚어 마시던 ‘곡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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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백일주 양조 전수자인 벽암스님이 수왕사에서 송화백일주를 증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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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 중인 송화백일주 원료주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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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백일주에 들어가는 재료들. <조의주씨 제공>

불교 계율 중 가장 근본이 되는 다섯 가지를 ‘오계(五戒)’라고 한다. 이 오계는 처음 출가해 승려가 된 사미(沙彌)와 재가(在家)의 신도들이 지켜야 할 것이라 하여 ‘사미오계(沙彌五戒)’ ‘신도오계(信徒五戒)’ 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불교의 모든 계율에는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오계의 내용은 ①생명을 죽이지 말라(不殺生) ②도둑질을 하지 말라(不偸盜) ③사음하지 말라(不邪淫) ④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⑤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이 오계를 유교의 오상(五常)과 대비하기도 했다. 특히 억불정책이 시행되던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 오계와 유교의 윤리덕목인 오상이 서로 위배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오계를 잘 지키면 유교의 이상인 덕치국가도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오상인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순서에 맞추어서 ‘불살생·불투도·불사음·불음주·불망어’의 순으로 오계를 짝맞춘 것이다.

이 오계는 불교도이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실천윤리이므로 승려들은 당연히 오계를 지키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승려들도 ‘모든 약 중에서 제일가는 것’이라는 의미의 ‘백약지장(百藥之長)’으로 불리는 술을 건강을 치료하는 약으로 먹어야 할 경우가 있다. 승려들은 이럴 때 술을 ‘곡차(穀茶)’라고 부르며 마셨다. 승려사회에서도 간혹 필요에 의해 이런 곡차를 빚어 마셨는데, 그중 하나가 완주 모악산 수왕사의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다.

◆ 모악산 수왕사에서 1천년 넘게 전해온 ‘곡차’

많은 고승과 도인을 배출한 호남의 명산 모악산(794m). 이 산 정상 아래 자리한 수왕사(水王寺)는 ‘물왕이 절’로도 불린다. ‘수왕(水王)’은 ‘물의 왕’이니, 물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수왕사 설천에서 나는 물은 수왕사의 최고 자랑거리이기도 한다. 이 좋은 물을 사용해 빚어오던, 이 절 주지에게 대물림으로 내려온 술이 송화백일주다.


신라 때 제조비법, 절 주지에 대물림
벽암스님 맥 이어 식품명인 1호 지정

솔·댓잎 들어간 알코올 16도 발효주
증류한 후 송홧가루·산수유 등 넣고
100일간 저온숙성·여과과정 거치면
투명한 노란빛 띠는 38도 藥酒 완성


곡차는 선승들에게 필요한 약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얼음장 같은 산중 냉골마루나 바위에 앉아 수행을 하다 보면 몸에 병이 찾아든다. 고산병, 위장병, 냉병, 영양결핍 등을 막고 치료하기 위해 곡차를 마셔왔다. 술은 절에서 금기이지만 한편으로 수행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현재 수왕사 주지 벽암 스님(66·속명 조영귀)이 빚으며 그 맥을 잇고 있는 송화백일주도 그런 곡차였다. 송화백일주의 역사는 1천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고 하니, 석씨(석가모니) 가문의 대표적인 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 때 부설거사 도반 승려인 영희와 영조가 함께 수왕사에서 수행하다가 헤어지면서 그리운 회포를 달래기 위해 송화곡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불교 사화집에 기록돼 있다. 또 조선시대 명승 진묵대사(1562~1633)가 수왕사에서 참선수행하면서 기압에 의해 발생하는 고산병과 혈액순환 장애 등을 치유하고 예방하기 위해 수왕사 주변의 약초와 꽃을 재료로 사용해 곡차를 빚어 1주일에 서너 모금씩 선식으로 마셨다는 기록이 수왕사 사지에 전한다.

송화백일주와 유사한 송화주에 대한 기록은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최한기의 ‘농정회요’, 서유구의 ‘임원십육지’ 등에도 나와 있다.

진묵대사의 제조법을 잇고 있는 송화백일주는 그 전통과 가치를 인정받아 1994년에는 송화백일주 양조 전수자인 벽암 스님이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1호로 지정받기도 했다.

◆ 진묵대사 제사상에 올리는 술

송화백일주는 통밀로 만든 누룩과 고두밥에 오곡(보리, 콩, 조, 수수, 팥)과 솔잎, 댓잎을 넣어 발효시켜 발효주를 만든 후 이 술을 증류해 만든다. 20일 동안 발효와 숙성을 거친 알코올 도수 16도 황금색 발효주는 ‘송죽 오곡주’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내놓고 있다.

송화백일주는 이 발효주를 증류하고 숙성시켜 완성한다. 증류한 술에 송홧가루와 산수유, 오미자, 구기자, 국화, 당귀 등을 넣고 100일 동안 저온 숙성한 후 다시 여과과정을 거쳐 알코올 도수 38도의 송화백일주를 완성한다. 술은 투명한 노란빛이다. 첫맛은 쌉쌀하고 뒷맛은 달콤하다. 송화와 솔잎 향이 나는 것은 물론이다. 정말 몸에 좋을 것 같은 기운이 확 느껴지는 술이다.

수왕사에서는 송화백일주를 빚어 진묵대사 기일(음력 10월28일)의 제사상에 올린다. 수왕사에는 진묵대사를 모시는 조사전이 있다.

정유재란 때 불탄 수왕사를 중창한 진묵대사는 ‘작은 부처’라 불린 고승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기도 했다. 호남에는 그의 기행과 이적에 관한 설화도 많이 남아있다. 진묵대사는 ‘곡차’라 하면 마시고, ‘술’이라 하면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면모를 읽을 수 있는, 호탕하기 그지없는 그의 시를 한 수 소개한다.

‘하늘은 이불로, 땅은 방석으로, 산을 베개 삼아 누우니(天衾地席山爲枕)/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며, 바다는 술동이로다(月燭雲屛海作樽)/ 맘껏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大醉居然仍起舞)/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이네(却嫌長袖掛崑崙)’

송홧가루가 들어가는 송화백일주는 오래 두고 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3년 정도 숙성했을 때 맛과 향에서 가장 원숙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12세에 출가해 17세 때부터 수왕사에 머물면서 술을 빚어온 벽암 스님은 1992년 수왕사에서 멀지 않은 모악산 아래(완주군 구이면 계곡리)에 아예 술도가(송화양조)를 차렸다. 송화백일주의 맥을 제대로 잇기 위해서다. 1998년 민속주품평회 대통령상을 받았고, 2007년에는 대통령의 설 명절 선물로 선정됐다.

“송화백일주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꽃을 주 원료로 담근 후 100일 동안 소나무 밑에 묻어둔 보약입니다. 그리고 제가 빚는 이 술은 350여년 전부터 수왕사에서 빚어왔고, 제가 12대 전수자로 그 주조비법을 잇고 있습니다.”

벽암 스님의 말이다. 그는 “좋은 송홧가루와 솔잎 채취가 중요한데 그 포인트는 채취 시기다. 솔잎은 산꼭대기 소나무에서 한 번 수분이 빠진 늦가을에 따고, 송화는 꽃이 완전히 피기 직전에 따야 한다. 그리고 잘 마른 송홧가루는 수분이 들어가지 않도록 특별히 밀봉 보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송화백일주에는 과일이나 횟감이 안주로 제격이라고 한다. 송화백일주의 명맥은 벽암 스님의 속가 아들로 그 전수자인 조의주씨가 잇고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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