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역에선 처음 수림사진문화상 선정…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재갑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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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15   |  발행일 2016-01-15 제37면   |  수정 2016-01-15
“아빠 집에 언제 와? 촬영 나가는 내게 아이가 물을 때 가장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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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째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과 아픈 역사의 현장을 카메라로 기록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재갑씨. 올해 4월 대구에서 베트남민간인학살 관련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목소리
죽을 때까지 대변하고싶어

다큐 사진을 잘 찍으려면
사전답사와 공부가 중요

대구지역 사진계가
폐쇄적이고 불통이라지만
대구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카메라와 내가 일치될 때
좋은 사진이 나온다
내 사진엔 내가 들어가 있어
때로는 그림자로
때로는 내 손과 팔을 넣는다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4월 대구에서 전시회 계획

SLR카메라보다 스마트폰의 화소수가 더 높은 시대. 누구나 다 사진을 찍고 프린트할 수 있는 이 편리한 시대에 전업 다큐멘터리 사진가보다 배고프고 힘든 직업이 있을까. 그럼에도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재갑씨(50)는 뚜렷한 ‘결’을 가진 채 30년 이상 일관된 주제로 사람과 세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카메라는 혼혈인, 식민지의 잔영, 강제징용, 전쟁의 상흔 등 늘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과 역사의 현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지난해 9월 역량 있는 사진가와 사진계 공로자를 발굴해 지원하는 제2회 수림사진문화상에 선정됐다. 그가 공모한 적도 없는데 주최 측에서 지금까지 그의 작업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대구에 적을 두고 사는 사진가로 수림사진문화상에 선정된 작가는 그가 처음이다.

▶사진의 주제가 무겁다.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대구에선 더 그렇지 않은가.

“거북해하고 불편해하는 것 같더라. 주제가 그래서 그럴 거다. 혼혈인, 전쟁의 상흔, 망자 등 내가 만나는 사람은 다 상처를 가지고 있다. 난 그의 소리를 대변하고 그 사람의 상처를 안고 가야 한다. 죽을 때까지 할 것이다. 대구에선 그런 사진을 하는 환경이 잘 안 된다. 그런데 서울에선 50년 동안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더라.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대구에서 활동할 것 같다. 페이스북에 그런 다짐의 글을 올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 주었다. 그런데 타이틀을 걸고 하고 싶다.”

▶어떤 타이틀인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하는 유일한 게 하나 있다. 오래도록 혼자 하는 건 누구보다 잘 한다. 그게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했다. 집사람이 일을 한다. 아내가 없으면 지금의 나도 없다. 정말 고맙다. 촬영하러 나갈 때 아이가 ‘아빠, 집에 언제 와?’ 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왜 우울한 사진을 찍는가.

“빛으로 빚을 갚고 싶다. 대학에 다닐 때 많은 친구들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죽거나 다쳤다. 그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다. 사진으로 그 빚을 갚고 싶다.”

▶당신에게 있어 사진이란 무언가.

“사진은 삶이다. 살아있음을 느낄 때는 내가 촬영을 하거나 작품을 발표할 때다. 카메라는 역사와 사회, 문화를 기록하는 도구인데 만년필 같은 것이다. 성격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편이다. 하지만 카메라만 들면 전투 모드로 바뀐다. 사진은 말과 흥과 도(道)라고 생각한다. 찍을 이유가 없으면 나는 찍지 않는다. 다큐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사전답사가 중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모르면 찍을 대상에 정통한 활동가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한다. 사진 찍는 사람이 글 쓰는 사람에 비해 사전조사를 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소재가 고갈돼 더 이상 찍지 못 하게 된다. 처음 사진을 할 때 사진이 대상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차츰 나와의 싸움이란 걸 깨달았다. 이젠 나보다 주변과의 싸움이 더 중요하다는 걸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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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사진은 어떤 것인가.

“다큐멘터리는 기록과 예술의 경계에 있다. 대상에 대해 해석을 하고 나의 시선으로 주제를 제시해야 한다. 크로핑(사진의 필요한 부분만 남겨두는 것)은 그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저널 사진은 한 장에 모든 걸 담고 기록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 훌륭한 사진가는 소재와 주제를 뛰어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대구는 과거 사진의 수도라 불릴 만큼 사진 하는 사람이 많았고 훌륭한 사진인도 많이 배출됐다. 지금은 서울로 다 빠져나갔는데.

“전국적으로 꽤 알려진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10여명 있다. 대구엔 글쎄다. 대구에서 사진을 하다 서울로 간 아까운 친구가 많다. 그들은 대구지역 사진계가 폐쇄적이고 소통이 잘 안 된다고 한다. 난 한 번도 대구를 잊은 적이 없다. 혼자 힘들고 어렵지만 대구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다.”

▶지난해 서울에서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이란 주제로 사진전을 했다. 주제의 의미가 무엇인가.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희생된 전쟁 피해자와 베트남민간인학살 관련 사진이다. 올해 3월엔 부산에서, 4월엔 대구에서 전시회를 열 것이다.”

▶지난해 몸이 아팠다고 들었다.

“인하대에 강의를 나가는데 지난해 6월 강의를 끝내고 일본에 가서 2주간 조선인 강제이주와 관련해 촬영을 갔다. 수업과 촬영에 신경을 쓰다 보니 구안와사가 와 매우 힘들었다. 마침 수림사진문화상 상금으로 500만원을 받았는데 병원비로 충당했다. 그 사건 이후 사진을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정리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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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언제부터 했나. 사진학과를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했다. 미술실 옆에 암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놀았다. 사진을 계속 하고 싶어 계명문화대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암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열심히 한 덕분인지 졸업할 때 수석을 했다. 졸업 후 광고사진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다큐멘터리로 돌아섰다. 군대 갔다 와서 광주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상명대 대학원에 진학해 다큐멘터리를 전공했다.”

▶첫 개인전은 언제 했나.

“1991년 대구 동아백화점 갤러리에서 ‘무대 위의 차가운 풍경’이란 주제로 사진전을 했다. 무대촬영을 의뢰받아 했는데 조명과 빛을 그때 알았다.”

▶30년간 한 우물을 판다는 게 쉽지 않다.

“사진을 하기가 매우 편리해졌다. 아날로그 환경에서 시작해 지금은 디지털로 변했다. 막말로 개나 소나 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다. 사진이 많아지고 더 쉽게 찍을 수 있으면 좋은 사진도 많이 나와야 하는데 그건 아니다. 카메라의 성능이 좋아지고 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찍는 건 사람이다. 아날로그 시대엔 기록을 했다면 디지털 시대는 기록에 덧붙여 기억을 해야 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가 중요하다. 사진계 안에선 그게 보이지 않는다. 사진에 집착을 하지 않으니 비로소 보이더라. 개념사진은 영악한 거다. 사진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사진을 먼저 찍고 거기에 맞춰 글을 입히니 앞뒤가 바뀔 수밖에. 목적이 불투명한데 어떻게 좋은 사진이 나오나. 대상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말로 사진을 찍게 된다. 그렇게 찍으면 기능인밖에 안 된다. 공부가 중요한 걸 처음 깨달았다. 프로세스가 간편해진 대신 생각과 공부를 더 할 수밖에 없다. 말발, 글발, 사진발을 키우기 위해 지역신문에서 객원기자를 한 적이 있다.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

▶90년대 ‘혼혈인 내 안의 또 다른 초상’이란 사진집을 냈는데.

“1991년 12월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는 작업이다. 윤수일도 찍고 인순이도 찍었다. 인순이가 해밀학교를 건립했는데 지난해부터 매달 1만원씩 후원한다. 혼혈인을 찍다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다. 주변과의 싸움이 중요하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난 지금까지 다섯 가지의 사진 주제를 가지고 있다. 혼혈인, 재일조선인, 한국내 일본 잔재, 베트남, 한국에 남아있는 독립후손가 작업 등이 그것이다. 사회, 역사, 문화가 항상 언급된다.”

▶‘잃어버린 기억’이란 사진자료집도 냈다.

“96년 2월부터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서울시청 같은 근대건축물을 찍다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약 3천500명의 민간인이 군경에게 학살당해 묻혀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12년간 작업한 사진을 묶어 2008년 사진자료집으로 냈다. 학살 당한 유족에 대한 작업도 병행했다. 광복 후 대구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아픈 기억이다. 대학원 졸업사진의 주제이기도 했다.”

▶‘새마을 근대생활 이미지’라는 사진전도 했더라.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을 때였다. 2002년 대구예술대와 경일대를 왔다갔다 하면서 강의를 했는데 대구 도심을 지나게 됐다. 돌담에 양철지붕 같은 건 사실 어울리는 풍경이 아니잖는가. 참 ‘기형적인 도시’라는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면도칼에 베인 것 같은 소름이 돋았다. 내가 본 도시를 느낌대로 찍었다. ‘그냥이즘’이라고 할까.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도시이미지를 형상화했다.”

▶2000년 ‘식민지의 잔영’과 2006년 ‘또 하나의 한국’이란 전시회도 했다.

“96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는 작업이다. 처음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적산가옥과 강제징용을 당했던 사람을 찍었다. 비평가가 당신은 왜 과거를 흑백으로 찍냐고 하더라. 그래서 현재와 미래는 과거에서 찾아야 하기에 흑백으로 찍는다고 했다. 사실 현재로 보이는 건 컬러인데 내 사진은 톤이 떨어진다. ‘또 하나의 한국’은 일본 내에 남아있는 강제징용과 원폭피해자의 흔적을 찍은 작품이다. 2011년 ‘상처 위로 핀 풀꽃’이란 사진집을 냈는데 식민지 잔영이 은유적으로 표현됐다. 재일조선인을 돕는 일본인도 있다. 일본엔 한국의 역사를 우리보다 더 잘 아는 지식인이 적어도 수만 명은 된다. 사진 작업을 하며 정말 놀랐다.”

▶베트남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

“치과의사인 송필경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표가 ‘잃어버린 기억, 경산 코발트광산’ 사진자료집을 본 뒤 연락이 왔더라. 그가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 베트남민간인 학살지역을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게 인연이 돼 7년째 베트남을 찍고 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경산 코발트광산학살은 연결돼 있다.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참전군인에 대한 이야기도 할 것이다. 참전군인을 먼저 찍었어야 했는데 순서가 바뀌었다. 베트남엔 한국군 증오비 2개를 비롯해 100여개의 위령비와 추모비가 있다. 한국군이 주둔한 마을은 거의 다 가봤는데 50여개의 비석을 찍었다.”

▶학살지역을 가보니 어떻던가.

“처음엔 호찌민 루트를 찍으러 갔다. 15박을 했는데 8일째 죽을 고비를 넘겼다. 베트남에 다녀오면 늘 몸이 아프다. 기감이 세다고 할까. 빈호아 마을 같은 곳에 가면 무척 우울하다. 누군가는 기록을 해야 한다. 한국사람은 그 사실을 잘 모를뿐더러 불편해 한다. 학살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참전군인도 피해자다. 그분들의 한도 들어줘야 한다. 삼촌이 베트남전 참전군인인데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카메라는 어떤 걸 주로 쓰나. 또 즐겨쓰는 렌즈는 무엇인가.

“80년대 니콘 F시리즈부터 지금의 디지털카메라까지 니콘을 애용한다. 렌즈는 대상에 가까이 가기 위해 20㎜ 광각을 애용한다.”

▶20㎜ 렌즈를 쓰면 왜곡이 심할 텐데.

“사진기자가 광각렌즈를 많이 쓰는데 난 저널사진을 찍지 않는다. 사진기자는 대단히 많이 움직이고 바쁘다. 거칠게 몸싸움도 많이 하는데 난 그럴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피사체에 차분하고 조용하게 접근한다. 오래된 역사는 시간의 궤적을 담아내야 하는데 어떨 땐 슬로셔터로 30분을 준 적도 있다. 시간을 축적하는 건 한을 담는다는 의미가 있다. 왜곡은 뷰포인트로 잡아주면 된다. 주로 물, 풀, 돌, 나무 등이 많이 들어간다. 사진 가운데 내가 들어가 있다. 어떨 땐 그림자로 어떨 땐 내 손과 팔을 집어넣는다. 카메라와 내가 일치될 때 좋은 사진이 나온다. 색체는 디테일하되 어둡고 톤이 낮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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