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박의 전기 바이올린 제 손으로 만들었습니다①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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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29   |  발행일 2016-01-29 제33면   |  수정 2016-01-29
■ 대구·경북 이색 악기의 선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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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세계 최초로 단일 마이크를 이용한 일렉 아코디언을 제작해 국내 특허는 물론 PCT 세계특허를 취득한 일렉 악기 전문 제작자 유재업씨. 그가 자신이 개발한 전기해금 ‘아랑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90년대 후반 경기도 김포 대원악기의 지원을 받아 개발한 전기바이올린은 한때 유진 박이 즐겨 연주했다. 작은 사진은 유진 박이 96년 12월 KBS 열린음악회에 출연해 유씨가 제작한 한반도 모양의 전기바이올린을 갖고 연주하는 모습.

‘대원악기’에서 일렉악기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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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박 기획사 매니저 찾아가
“우리 악기 시연해 달라” 요청
유진박 “좋아 보인다 해 보자”
노이즈 없는 바이올린‘대만족’
전국 투어 콘서트에 항상 사용

IMF 외환위기 한 해 전인 1996년 12월 KBS 열린음악회. 괴짜스러운 해외파 바이올리니스트의 사운드에 객석은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비틀스 멤버 존 레논 풍의 낯선 사운드. 미국 악기제조회사인 제타(ZETA)에서 만든 전기바이올린의 증폭된 일렉트릭 사운드였다.

주인공은 바로 유진박. 유진박 신드롬으로 인해 국내에도 클래식 악기 일렉트릭화에 신지평이 열린다. 바이올린 하나로도 능히 콘서트를 할 수 있는 시대가 개막된다. 유진박은 96년 뉴욕 줄리아드음대를 졸업했지만 본인은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지 않았다. ‘전기(일렉트릭)’란 단어를 꼭 붙여달라고 주문했다.

그날 누구보다 집중해서 유진박의 연주를 분석한 사람이 지금 대구에 살고 있다. 바로 국내 1호 일렉 악기 전문 제작자 겸 아코디-E 대표 유재업씨(57)다.

유씨는 당시 경기도 김포에 있는 일렉 악기 전문회사인 ‘대원’에서 일렉 악기 개발자로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한 모델이 유진박한테 딱 맞을 것 같았다. 바로 대원이 야심 차게 내민 일렉 바이올린과 첼로 시리즈 브랜드인 ‘스트라우스(Straus)’ 모델 중 한반도 모양으로 특별하게 디자인된 일렉 바이올린 DVFE-505이다. 당시 서울에 있던 유진박 전속 기획사의 매니저를 찾아갔다. 유씨는 매니저에게 “이 악기가 국내 기술로 개발된 첫 일렉 바이올린”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매니저는 “한국제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면서 그의 제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순간 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한국인이 한국 기술을 믿지 않고 제품도 보지 않고 거절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면서 “일단 제품을 시연해보고 유진박이 싫다면 그때 나도 양보하겠다”고 각을 세웠다. 두 사람이 언쟁하는 와중에 유진박이 들어왔다. 매사에 쿨하고 자유롭고 오픈마인드인 유진박은 매니저와 달리 그의 바이올린에 관심을 보인다. 대뜸 “바이올린이 좋아 보이니 바로 시연해보자”고 했다. 유진박은 그 모델에 대만족했다. 당시 유진박이 사용하고 있던 전기바이올린은 이런저런 노이즈가 심했다. 그런데 스트라우스는 노이즈가 거의 없었다.

스트라우스 전속사용료 명목으로 3천만원이 유진박 기획사에 지급되고 대신 그가 개발한 대원의 일렉 악기를 유진박 공연 무대 뒤에 전시하게 된다. 유진박은 전국투어 콘서트에 항상 그의 악기를 사용했다. 이후 대구KBS방송총국 개국 60주년 기념 유진박의 소년소녀가장돕기 자선음악회도 그가 기획·연출한다. 그 공연을 위해 그는 바이올린 6대, 비올라 2대, 첼로 2대, 콘트라베이스 1대로 구성된 전국 첫 전자현악단인 ‘스트라우스 일렉트릭 앙상블’을 창단하고 단장을 맡는다. 99년 8월23일 대구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유진박과 함께 세계 최초 전자현악단 공연을 올렸다. 당시 언론조차 ‘설마 대구에서 세계적인 일렉 악기를 개발하고 연주단까지 창단했을까’라며 반신반의했을 정도였다.

봉화 출신인 그는 봉화고의 악대부 악장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그의 삶은 뒤죽박죽 엎치락뒤치락의 노정이었다. 78년 계명대 음악대 기악과에 입학해 유능한 트럼페터의 길을 연마했다.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2위로 입상도 했다. 하지만 대학교 재학 중에 너무 이른 결혼을 하는 바람에 생계의 압박이 심했고 결국 음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악기를 접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업체에 들어가서 인테리어 관련 일을 하며 밥벌이를 했다. 하지만 건축공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인테리어 일도 무용지물일 것 같았다. 그래서 86년 계명대 건축공학과에 편입을 한다. 음대 동기들 사이에 화제였다. 그는 학창시절 전축을 자작할 정도로 손재주가 비상했다. 당시 담당 교수는 음대 출신이 건축학을 공부하는 건 무리라고 그의 앞날을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건축에 잘 적응했다. 대구시 주최 미술대전 건축 부문에서 특선으로 입상돼 대구시장상을 받아 주위를 놀라게 한다. 내공을 키워 모 건설회사에 입사했지만 건설계에 만연한 구조화된 비리에 절망하고 사직서를 내고 다시 백수가 된다. 먹고살기 위해 대구시 북구 3지구 근처에서 횟집을 열었지만 전 재산을 홀라당 날린다. 신용불량자 신세였다. 빚쟁이 때문에 대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눈물을 삼키면서 자식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서울로 야반도주한다. 호구지책으로 공사장의 날품팔이가 된다. 일이 없는 날에는 소주병과 벗하면서 세상을 잊었다. 노숙자 바로 직전 단계의 처량한 신세였다.

하지만 영원히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현재 경북도립교향악단 사무국장이자 그의 계명대 기악과 선배인 이상대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재주를 썩히고 있는 걸 안타깝게 여겨 대원악기로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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