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거창 원도심 창조거리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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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29   |  발행일 2016-01-29 제37면   |  수정 2016-01-29
오래되었다 그러나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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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의 명동이라 불렸던 옛 본정통. 쇠퇴기를 거쳐 옛 원형을 유지한 창조거리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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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 건축된 자생의원. 등록문화재 제57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거창 근대의료시설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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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에 지어진 최남식 가옥. 등록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창의 명동’이라던 거리
건물은 원형을 유지해 보수
길 다듬고 가로등을 세우고
전주 없애고 전깃줄 지중화
그리고 복합공간으로 부활
거리는 중앙시장으로 연결

창조거리와 시장 사이에는
거창 근대의료시설 효시 자생의원
네덜란드풍의 ‘최남식 가옥’ 눈길

허리가 잘록한 홈스방 코트를 입은 숙녀가 또각또각 걸어가고 저마다 멋을 낸 청년들이 우르르 골목으로 사라진다. 실크해트를 쓴 신사가 저기서 걸어오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자전거가 저 멀리로 달려간다. 이제는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를 이 거리에서 본다. 아, 환영이다. 즐거운 환영이다.

◆거창의 명동이라 불렸던 거리

경남 거창의 한가운데 위천천 변의 골목 안에 낮은 건물들이 서로 바라보는 좁은 거리가 있다. 일제시대 본정통이라 불리던 거리, 거창의 원도심이다. 없는 가게가 없었고 의원과 약방도 많았으며 사람들의 활기가 넘쳐흐르던 거리. 그 은성했던 시절은 1970년대와 80년대까지 이어졌고, 그때 이 거리는 거창의 명동이라 불렸다 한다.

사람들이 떠나고 상권이 이동하면서 거창의 명동은 서서히 쇠퇴해 갔다. 길은 갈라지고 깨지고, 전주는 기울고, 건물들은 낡아가고, 가게는 비워졌다. 쇠락한 거리에는 좋았던 시절에 대한 집단의 기억들만이 쌓여있었지만, 그래도 골목골목마다에는 올올한 집들이 훈기를 내며 여전히 자리했다. 몇 해 전, 그 기억들을 공유하고 감응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낡은 보물 상자를 열듯, 이 거리를 새롭게 열었다.

거리의 골격은 지금도 옛날 그대로다. ‘다듬고 보존하고, 통하고 이으며, 창조하고 성장한다’가 거리 재생의 기본개념이었다. 건물들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깔끔하게 변모시켰다. 누덕누덕했던 길을 다듬고 고풍스러운 가로등을 세웠다. 전주를 없애고 엉망이던 전깃줄을 지중화했다. 옥이 수선, 형제 완구, 양장 맞춤, 화인 패션, 진보당, 구두수선, 삼오슈퍼 등 조막만한 가게들이 예쁘게도 앉아 있다. 제각각 개성 있게 간판을 내걸었지만 질서가 있다. 130여 개의 간판 중 저 혼자 으스대며 나선 얼굴은 없다. 이렇게 440m의 옛 중심가는 ‘창조거리’라는 이름으로 새로워졌다.

창조거리 한가운데 ‘창조발전소’가 자리한다. 창조거리 조성을 위한 전진기지이자 거창 사람들의 문화, 교육, 동아리 활동 등이 이루어지는 복합공간이다. 창조발전소에서는 여러 아이디어를 계속적으로 창출해 낸다. 상상공작소, 오픈스튜디오, 도떼기시장, 다문화 장터, 음악제, 평생학습 동아리와 함께하는 러닝마켓(learning market) 등 매년 새로운 아이템으로 시끌벅적한 거리를 만들고 있다.

◆거창한 거창시장

창조거리는 거창 중앙시장으로 이어진다. 시장은 꽤나 크다. 조선시대 말부터 합천, 함양, 산청 등 인근 지역의 장꾼들이 몰려들던 5일장으로 군 단위로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규모였다 한다. 상설시장이 된 것은 1968년으로 지금은 전통 5일장이 공존하는 서부경남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이다.

곡물거리, 생선거리, 순대거리, 한복거리, 신발거리, 채소거리 등 골목을 누비는 재미가 있다. 순대거리는 특히 이름나 있고 그 중에서도 피순대가 가장 명물이라 한다. 40년된 태백상회, 30년된 대성신발, 50년 전통의 동아철공소도 아직 영업 중이다. 철공소 앞에 언제나 서 있는 포니2 픽업트럭은 시장통의 명물이다. 25년이 훌쩍 넘은 트럭은 아직도 현역으로 거리를 누빈다. 시장 상인들이 주축이 된 놀이패도 있다. ‘타!타!타악!’이라는 타악 퍼포먼스 팀으로 특이하게 남미 타악기를 연주한다.

거창시장 주차장은 옛날 ‘거창 극장’이 있던 자리다. 벽면에 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 맨발의 청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영화 포스터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극장은 ‘거창읍민관’으로 개관해 영화관으로 운영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수많은 사람의 심장을 울렸던 공간이었다. 지금은 때때로 시장의 축제마당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 근대건축, 옛 자생의원과 최남식 가옥

창조거리와 거창시장 사이 골목에 오래된 병원 건물이 있다. 광복 이후 1954년에 건축된 ‘자생의원’으로 거창 근대의료시설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 건물이다. 서울대 의대 1회 졸업생이던 고(故) 성수현 원장이 50년 넘게 운영한 병원이었다. 의원동, 주택동, 병동이 동일 구조와 일체화된 지붕으로 엮여 있는데, 최근에 정비를 마쳐 멋스럽고 정대한 모습이다. 거창군은 지금 이곳을 근대의료박물관으로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거창읍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와 거창 박물관을 지나면 색다르게 생긴 집 한 채를 만난다. 1947년에 네덜란드의 전원주택을 모델로 지은 ‘최남식 가옥’으로 눈이 많이 내리는 거창의 특성에 맞게 지붕의 기울기가 크다. 최남식 선생은 일제 말기부터 농민운동을 벌여온 지역의 귀한 어른이었다고 전한다. 지역의 문화재에도 관심이 컸던 선생은 1983년 꾸준히 모아온 문화재들을 내어놓고 박물관 건립 운동을 벌였다. 1988년에 건립된 거창박물관은 그 결과다.

거창군에는 110여개의 동아리 단체가 활동하며 공동체의 중추적 역할을 한다. 시장 상인들의 놀이패만 봐도 이들의 공동체적 애정과 역량을 느낄 수 있다. 그리 멀지 않은 어제, 이 소도시에서 평생을 의사 선생님으로 살았던 사람이 있었고 지역의 역사를 차곡차곡 모아 하나로 집결시킨 어른이 있었으니, ‘거창한 거창’이라 당당히 외치는 오늘은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88고속도로 거창IC로 나가 거창군청 방향으로 간다. 거창교 건너 군청 로터리에서 우회전해 거창병원 골목으로 들어가면 된다. 창조거리와 거창시장이 만나는 곳에 공영 주차장이 있다. 주차료는 30분에 300원, 초과 15분당 150원으로 저렴하며 시장에서 물건을 구매하면 무료 주차권을 받을 수 있다. 자생의원은 창조발전소 인근에 있으며 최남식 가옥은 거창박물관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길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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