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천 도남동 완귀정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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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4-29   |  발행일 2016-04-29 제37면   |  수정 2016-04-29
마당서 보면 단층, 천변서 보면 2층 누각…독특한 건축 美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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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안천 절벽 위에 자리한 완귀정. 인종의 왕세자 시절 스승이던 안증이 을사사화 이후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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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완귀정, 왼쪽이 식호와. 완귀정은 임란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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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귀정 뒤편은 누마루 형식으로 북안천에 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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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협문과 안채 대문 사이 면벽하고 있는 뒷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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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못의 건립 과정을 기록한 비석. 오른쪽이 보물 제 517호인 청제비, 왼쪽이 청제중립비다.
조선 인종의 세자시절 스승이던 안증
등극 1년 안돼 승하하자 태실지 낙향
북안천 언덕 살림집 겸 정자 짓고 은거

거북 등껍데기처럼 그 안 쉬이 안보여
남명의 詩 등 정자에 걸린 10여개 현액
좌우 樓를 둔 형식의 식호와도 볼거리

나무들 물 마시고 햇빛 삼켜 살찌는 소리만 들린다. 100m 남짓한 짧은 길. 큰 길에서 단지 몇 걸음 만에 적막 속이다. 오른쪽 낭떠러지 아래엔 천이 흐르는데, 그리 아찔한 높이도 아니건만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윤슬인지 팔랑이는 이파리들의 낯빛인지 눈 깜빡일 때마다 자리를 바꿔가며 희롱하는 빛, 빛들. 그 고요와 빛 속에 작은 협문이 나타났다.

◆거북이가 몸을 숨기듯

문은 잠겨 있다. 시선이 차단된 담장 너머엔 자목련이 아직도 유난하다. 담장을 따라 열린 문을 찾는다. 대문은 문짝이 떼어진 채 활짝 열려있다. 네 칸의 곳간이 대문 양쪽에 이어져 있다. 대문이 소박해 오히려 곳간이 으리으리해 보인다. 대문과 협문 사이 작은 건물이 면벽하고 있다. 뒷간이다. 대문간에서 보이는 뒷간의 모습이 헛기침 같다.

광주안씨(廣州安氏) 영천 입향조인 안증은 인종의 왕세자 시절 스승이었다. 그는 학문보다는 정치문제에 큰 비중을 두고 강론했는데, 왕도정치에 의한 민본주의를 이상으로 여겼다. 그러나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못 되어 승하하고, 이어 을사사화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인종의 태실이 있는 영천으로 내려왔다.

선생은 젊은 시절 이미 터를 점찍어 두었다 한다. “남쪽에 글을 상징하는 필봉이 있고 동쪽에는 부를 상징하는 두지봉이 감싸고 있는 지세이므로 이곳에선 벼슬길로 크게 출세는 못해도 먹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록이 전한다. 그곳이 여기 영천 도남동 북안천 언덕이다.

선생은 1546년 이곳에 살림집과 사랑채를 짓고 은거했다. ‘완귀실기(玩龜實記)’에 보면 “호계(虎溪) 기슭에다 정자를 짓고 거북이가 몸을 숨기듯이 명철보신(明哲保身)한다는 의미를 취하여 완귀정(玩龜亭)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정자의 이름으로 호를 삼았다”라 쓰여 있다. 북안천은 옛날 호계천이었던 모양이다. 짧은 진입로에서도 집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북안천 맞은편에서도 간잔지런한 검은 기와만 보인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담벼락이 처마에 맞닿아 전체가 머리와 꼬리와 다리를 숨긴 거북의 등껍데기 같기도 하다.

◆ 완귀정과 식호와

대문에 들어서면 곧바로 안채 영역이다. 정침은 일자형의 4칸 구조에 나지막한 홑 기와집이다. 일설에는 안채가 아니라 고지기채로 기와를 얹기 전에는 초가였다는 말도 있다. 정침이 지나치게 검박한 것을 보면 고지기채 설이 그럴듯하다. 완귀 종택은 정자 가까운 곳에 따로 있었고 60여 년 전 소실되었다는 이야기도 고지기채 설에 힘을 실어준다.

정침 옆의 협문을 통과하면 사랑채다. 정면으로 세 칸의 완귀정이 정좌해 있다. 선생이 지은 정자는 임진왜란으로 불탔고, 현재의 것은 숙종 때인 1695년에 그의 후손인 안후정이 원래의 정자 터 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마당에서는 단층의 건물로 보이지만 천변 쪽은 누마루다. 절벽 사면에 뿌리를 박고 자라난 회화나무, 물푸레나무, 느티나무들이 사선으로 자라 지금은 한창 이파리마다 통통히 물오르고 있다. 왼쪽에는 영조 때 지은 식호와(式好窩) 건물이 지붕을 살짝 낮추어 자리한다. 다섯 칸 규모에 양쪽에는 누를 둔 형식이다.

선생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이 없고 선생의 글도 임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완귀실기’는 훗날 선생에 대한 파편 같은 글을 모은 것으로 그 간행 연도도 분명치 않다. 완귀정에는 아계 이산해, 순암 안정복 등이 남긴 10여개의 현액이 걸려 있는데 그중 하나가 남명 조식의 시다. “벼슬길에 나아갈 때 타고 갈 말은 어찌 그리 더디던고/ 아름다운 이 강을 비워두는 일 또한 마땅치 않았으리라/ 거북이가 지닌 깊은 뜻을 살펴서 올바른 성정을 기르고/ 유유히 자연을 즐기면서 세상사에 만족할 줄 알게 되었네.” 남명은 정자의 이름을 빌려 선생을 칭송하고 있다.

완귀정 누마루 아래 흘러가는 천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이제 곧 금호강과 합해지고 낙동강과 하나 되어 바다가 될 저 소소한 물길이 은연한 희망을 실어오진 않았을까. 광계군(廣溪君) 안여경(安汝敬)은 선생에 대해 “입은 말하지 않을 것 같고 몸은 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할 것 같았으며 종일토록 무릎을 모으고 꿇어앉아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면서 수기치인을 목표로 공부를 했다”고 했다. 무게를 털고 일어나 말할 시대가 아니었으니, 이후 선생은 곡성현감(谷城縣監)에 제수받았으나 부임치 않았다고 한다.

◆청못과 청제비

완귀정에서 도남공단을 가로질러 잠시 가면 신라 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청못(菁池)과 그 건립 경위를 기록한 비석이 있다.

못 가의 언덕진 자리에 비각은 위용 있게 서있고, 그 속에 글자 희미해진 ‘청제비(菁堤碑)’와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가 나란히 서있다. 이 오래된 비석은 청못의 축조 경위와 과정, 이후의 수리내용을 알려준다. 청못은 지금 수리 중이다. 둑의 한쪽이 터져 있고 흘러나온 여러 물길이 저수지 밖을 습지로 만들고 있다. 둑에 올라보니 얕은 물만 고여 있을 뿐 청못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공사는 올해 겨울에 완료될 예정이다. 돌아서는 마음은 아쉽고, 공사장의 인부들 마음은 알 길이 없고, 청제비 가에서 봄나물 뜯는 할머니의 오체투지는 보물보다 경건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영천IC로 나가 대구방향 4번 국도로 조금 가면 왼쪽에 도남동으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북안천에 놓인 도남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의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어 100m쯤 가면 완귀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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