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유명인과 碑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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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18   |  발행일 2016-05-18 제30면   |  수정 2016-05-18
20160518

예전에는 비석이 망자의 몫
요즘엔 살아있는데도 세워
지자체의 시비난립 때문에
시비의 권위는 나날이 추락
비석 기준안 마련 서둘러야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남평문씨 세거지의 수봉정사 마루 밑.

어두컴컴한 거기에 남다른 사연을 가진 비 하나가 여태 빛을 못보고 숨겨져 있다. 상하이임시정부에 거금의 군자금을 쾌척하고 숱한 과객을 위해 숙식을 제공했던 수봉 문영박(1880~1931)을 위한 공덕비다. 신세를 갚기 위해 과객·식객들이 자발적으로 비를 세워줬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 수봉은 펄쩍 뛰었다. ‘부끄럽다. 당장 그 비를 철거하라’면서 불호령을 내린다. 수봉 타계 후에도 그 비는 세워지지 못한다. 수봉의 인품도 그러거니와 조부의 유지를 받든 후손의 겸양지덕 역시 고매했다.

선비들이 가장 경계한 건 뭘까? ‘비석’이다. 비석은 생자(生者)보다 ‘망자(亡者)’의 몫이었다. 생전 비석은 언감생심. 돌에 새길 업적 남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선조들은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는 참 공덕·선정·치적비가 많다. 그 비는 관리들의 ‘훈장’ 같았다. 하나같이 칭송·예찬 일색. 비문조차 읽을 수 없었던 민초에게 비석은 한갓 ‘큰 돌’에 불과했다. ‘공덕비 로비’를 주도한 토호세력도 적잖았다. 그 탓에 친일파의 공덕비는 훗날 ‘원망비(怨望碑)’로 전락한다.

세상이 달라졌다.

이젠 자기 PR시대다. 유명인은 생전에 모든 영광을 독점하려 든다.

내장산문화광장에는 정읍 출신의 송대관을 위한 노래비가 있다. 전북 정읍시는 그를 위한 가요제까지 만든다. 하지만 송대관은 부동산 사기혐의로 방송을 잠시 중단한다.

시비(詩碑)는 한술 더 뜬다. ‘시인, 한 시비 갖기 세상’이다. 돈받고 시비를 세워주는 단체도 있다. 지자체는 유명 문인을 등에 업고 그를 위한 집도 지어주고 문학관, 시비거리 등도 만든다. 국비와 시비로 그렇게 한다.


유명 시인은 이제 지자체가 포기할 수 없는 관광상품. 미당문학상을 받은 문태준 시인을 위해 고향집으로 가는 이정표를 김천시에서 만들어줬다. 섬진강변에는 김용택 시인의 시비가 수두룩하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스카우트된 소설가 이외수를 위해 세계 최고의 시비공원도 만든다. 전남 장흥에서는 소설가 한승원을 위해 2m 간격으로 30여기의 시비를 세웠다. 지자체의 욕망에 관련 문인이 쉬 맞장구쳤기에 가능한 흐름이다. 비석을 거부한 사례는 없다. 되레 관계자에게 자기 시비를 세워달란다. 이제 시비는 너무 흔해 ‘간판’ 같다. 작고 문인의 시비조차 ‘공로패’처럼 제작된다. 팔리지 않는 시집보다 시비로 얼굴을 알리려 든다. 반면 수필가, 소설가, 동화작가 등 다른 장르 문인은 그 행렬에 설자리가 없다. 유독 시인만이 문학비를 독점하는 형국, 하지만 다들 쉬쉬한다.

전국적 명사가 된 정호승 시인. 전국 각처에 그의 시비가 다수 세워지고 있다. 수성구청도 단장된 범어천 동신교 맞은편에 최근 그의 시비를 세워주었다. 대구 도심에 세워진 첫 생존 시인의 시비였다. 제막식 때 그의 팬과 국회의원까지 참석했다. ‘정호승 시문학 공원’처럼 보였다. 사업 추진 사실을 뒤늦게 안 지역 시인들은 축하를 하면서도 뭔가 개운치 못한 맘을 가누지 못했다. 뒤늦게 이게 아니다 싶었든지 수성구청이 지역 문인과의 공감대 형성에 나선다. 시비가 세워진 언저리를 향토 시인도 동참하는 ‘시문학이 흐르는 개천’으로 가꿀 모양이다.

유명(有名)은 무명(無名)한테 진 ‘빚’이다. 유명할수록 자중하고 겸손해야 된다. 특히 약력까지 새긴 묘석같은 현행 시비는 사후(死後)에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여론이다. 이참에 생전 시비에 대한 기준안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 큰 돌의 경우 1천만원이 훌쩍 넘어선다. 이왕 세울거라면 저렴하게 작품처럼 세우자. 돌만 고집할 필요도 없다. 이동이 가능한 친환경 시비도 고민해봐야 한다.

시비,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좋은 시비일수록 더 짚고 넘어가야 되지 않을까?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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