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불감증에 걸린 나라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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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27   |  발행일 2016-05-27 제23면   |  수정 2016-05-27
[조정래 칼럼] 불감증에 걸린 나라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묻지마 범죄’의 희생양이 된 20대 여성을 추모하는 물결이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으로 확산됐다. 누가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씩 나붙기 시작한 추모 메모지가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을 빼곡히 채웠고, 지난 24일 비소식이 전해지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모인 자원봉사자 50~60명이 추모 포스트잇(메모지)의 훼손을 막기 위해 일일이 떼내 패널에 다시 붙이고 이를 서초구청에 전달했다. 서울시는 이를 서초구청에서 넘겨받아 별도의 공간에 보존하며 추모의 의미를 기리기로 했다.

우발적 범죄 피해자, 그것도 한 개인에 대한 이 같은 자발적인 추모열기는 전례없이 이례적인 사건으로 간단치 않은 사회적 함의를 시사한다. 경찰은 이 살인 사건을 정신질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라고 결론을 내렸다. 일각에서는 경찰의 수사결과와 달리 여성혐오증에 의해 사전에 기획된 범죄로 해석을 하기도 한다. 살인의 원인과 동기 분석이 어떠하든 억울한 죽음이란 사실은 고정불변이고, 그 억하심정은 안타까움과 연민, 동정과 공감의 물결이 돼 우리 모두를 엄습하는 게 틀림없다. 우발적인 살인의 대상이 바로 나일 수도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위험사회에 노출돼 있다는 공포까지 더해져 절로 섬뜩함을 감출 수 없게 된다.

나의 안전은 이제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다는 각성이 위험사회와 국가의 무능을 일깨운다. 추모열기와 추모 메모지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의문이고, 국가의 역할에 대한 질문지일 터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세월호 사건이 그랬고, 메르스 사태 역시 기시감을 더한다. 우리 나라가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줄임말)를 연발하는 시민들의 아우성이 채 잦아지기도 전에 사고를 사건으로 만들어 내는 사고 공화국이고, 방역체계는 수시로 구멍이 뚫리니 안전 불감증이 치유 불가능한 수준에 이른 시한부 국가인가. 시민의 억울한 죽음을 초래한 사건에 대해 아무런 사과도 해명도 하지 않으니, 역으로 시민들이 나서서 이를 일깨워 주는 의식이 바로 추모열기 아닌가.

세월호 이후는 아직도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단식을 하는 유족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는 것도 집회시위의 자유인가. 그나마 이러한 시민의 일탈은 시민적 상식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태되거나 교정이 된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할 만한 사회적 이상 징후는 아니다. 한마디로 시민사회 속 상식의 바다가 지닌 자정능력으로 치유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와 국가는 즉시에 적실한 방식으로 제어되고 견제되지 않으면 궤도 이탈을 정상으로 돌리기 어렵다. 공권력의 일탈은 곧잘 특정 정부와 정권의 안보에 봉사하면서 사적인 폭력으로 행사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수히 목격해 왔지 않은가.

도대체 왜, 세월호 조사특위의 활동 연장 여부마저 여야 정치권과 진영에 따라 이견이 노정되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우리의 아이들을 제대로 대면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7시간’을 포함한 조사 대상에 성역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 것이며, 조사기간의 연장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세월호 백서가 제대로 엮어지지 않고서는 세월호 이후는 없다. 이제 그만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과거부터 되풀이돼 온 가해자의 폭거요 폭력이다.

국민의 안위와 고통에 무감각한 불감증에 걸린 나라다. 정부와 국가가 깊은 잠에 빠져 있으니, 시민들이라도 의식을 차려야 사회가 지속 가능하다. 반성하지 않는 정부, 책임지지 않는 정권은 시민의 심판을 받게 돼 있다. 자발적 추모열기는 바로 혁명의 날갯짓이다. 시민의 민도는 높아만 가는데 정부와 국가는 전체주의의 도를 더해가는 요즘이다. 한 국회의원이 어느 날 절실하게 ‘민주공화국’을 호명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주인이 누구인지 총체적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안전 불감증에 이어 도덕 불감증, 죄의식 불감증, 유전무죄 불감증 등 온갖 불감증에 걸린 나라, 세월호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우리의 아이들을 애써 잊으라고 하는 나라, 말기적 불감증에 걸린 나라가 분명하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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