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떠서 잠들 때까지…당신은 화학물질과 살고 있다

  • 이은경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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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27   |  발행일 2016-05-27 제34면   |  수정 2016-05-27
◆ 화학제품의 현주소
20160527
대구 수성구의 한 대형매장에 세제를 비롯한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고 이후 화학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거부감이 커지고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물티슈·향수·식기·장난감에도 포함
우리나라 3만7천種·4억3천만t 사용
체내서 혼합될 경우 칵테일효과 문제

‘유해성 입증前까진 유해하지 않다?’
정부, 논란 땐 ‘기준치 이하’ 해명만
화학물질 90% 안전성 검사도 않아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안방의 세월호’ 사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소비자들은 화학물질이 이 정도로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뒤늦은 자각과,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끔찍한 독성물질을 걸러내는데 기업의 윤리도 국가의 책임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다. ‘노케미족’ ‘화학포비아’가 들불처럼 번지는 까닭이다.

몇천원짜리 가습기 살균제가 소리없이 수백명의 목숨을 빼앗은 이번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화학사고다. 2006년부터 시작된 이번 참사는 인체에 치명적인 유해 제품을 판매하고도 모르쇠로 일관한 비도덕적 기업과 무책임한 정부 탓에 10년이 지나서야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화학제품은 이제 물티슈부터 세제, 화장품, 향수, 식기, 가공식품,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화학물질 범벅인 환경인 셈이다. 편하고 쉬운 것만 찾아온 우리의 삶의 방식이 결국은 이처럼 수많은 유해 화학물질을 우리 삶 속으로 끌어들여온 셈이다. 가습기 살균제 이전부터 전문가들은 이미 급증하는 현대인의 아토피와 천식, 알레르기, 성조숙증 등의 원인으로 화학물질을 지목해 온 바 있다.

합성 화학물질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온 지 100년여, 인공적으로 만든 합성화학물질의 상당수는 그 유해성이 가시화하고 입증된 역사가 매우 짧다. 가습기 살균제처럼 유해성이 확실하게 입증되기 전까지는 아직 유해하지 않다는 게 정부와 기업의 기본적 태도다. 그리고선 논란이 일 때마다 ‘기준치 이하이므로 안전하다’는 해명만 반복해왔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는 화학물질은 3만7천여종, 4억3천250만t에 이른다. 해마다 새로 등장하는 화학물질만도 200여종이다. 같은 화학물질도 노출에 따라 위험성은 달라진다. 수많은 화학물질의 노출량을 생활 속에서 체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개별 제품에 소량 들어간 화학물질이 체내에서 혼합될 경우 나타나는 칵테일 효과도 문제다. 따라서 전문가가 아니면 정확한 위험 정도를 알기도 힘들다. 안전한 것으로 완전히 판명되지 않을 때까지 위험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황이 이렇지만 정부의 대처는 안이하기 그지없다.

환경부는 일단 현재 정부의 관리를 받는 모든 물질은 용법만 지켜 사용하면 안전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정부는 1991년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을 시행하면서 그동안 사용되어온 3만7천여 종을 기존화학물질로 지정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겨우 600여 건만 유해성 검사를 실시했다. 약 90%의 물질이 안전성 검사도 없이 그대로 유출될 수 있는 환경이다.

사용할 경우 반드시 공개해야 할 성분은 환경부가 정한 유독물질 성분 870여 종, 발암물질 성분 120여 종 등으로 전체 화학물질의 5%도 안된다.

뿐만 아니다. 현행 화학물질등록평가법(화평법)에 따르면 환경부가 지정한 몇 개 유해물질 성분만 표시하면 될 뿐 모든 물질을 다 밝혀야 할 의무가 제조·판매사엔 없다. 생활화학제품에 들어있는 성분을 모두 소비자에게 알리지 않아도 된다는 허술한 법이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탈취제는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사태 후속조치로 지난해부터 15개 제품군을 위해우려제품으로 지정해 유해성분을 표시하게 됐다. 에어컨 항균필터나 핫팩, 물티슈 등은 여기서도 빠져 있어 성분 공개의 근거가 전혀 없다.

환경부와 보건복지부 등 4개 부처로 관리 주체가 나뉜 것도 사각지대를 만든 원인으로 꼽힌다. 가습기 살균제도 2011년 의약외품으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규제 대상이 아니었고 다림질 보조제 등은 지금도 규제 울타리 밖에 있다.

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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