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代 이은 구두 장인 백수용·슬기씨 父子

  • 이은경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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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27   |  발행일 2016-05-27 제35면   |  수정 2016-06-17
그리도 싫어하던 구두쟁이가 되려 아들은 사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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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용(오른쪽)·슬기씨 부자가 대구시 중구 향촌동 ‘종로제화’ 작업실에서 수제화를 함께 만들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구두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고 있는 슬기씨는 이제 3년차 신참이다. 아버지 수용씨의 정통 수제화 기술을 대를 이어 계승하는 것이 슬기씨의 꿈이다.

아버지는 평생 구두를 만들었다. 덕분에 그의 아들은 늘 발에 꼭 맞는 멋있는 맞춤 구두를 신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싫었다. 독한 본드 냄새와 상처 가득한 손, 먼지투성이의 옷. 반짝거리는 구두를 만들어냈지만 아버지의 삶은 남루하고 고단했다. 아버지가 부끄럽고 싫었던 아들은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일부러 신지 않은 날도 많았다. 그 아들이 이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함께 구두를 만들고 있다. 운명과도 같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구두를 만드는 종로제화(대구시 중구 향촌동)의 백수용·슬기씨 부자다.

365일 가죽 본뜨고 자르고 형태 잡아
세상 하나뿐인 구두 만드는 ‘종로제화’
3년 전부턴 아버지와 아들 함께 작업

13세 때 어깨너머로 기술 익혀 반세기
아버지 수용씨 “힘들때도 구두만 생각”
그런 아버지의 삶 싫었던 아들 슬기씨
법학 전공후 他 지역서 회사 다니다
수제화 명맥 끊길 위기에 향촌동으로
“아버지 이름 걸고 정통 기술 이을 것”

◆구두는 나의 운명

백수용씨(61)는 농사를 짓던 가난한 집안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열세 살, 초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돈을 벌러 나섰다.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구 중구 화전동 구두 골목으로 갔다.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수제화 기능공은 화전동 자유극장 주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분홍신’과 ‘칠성구두’ 등 전국에 명성을 떨쳤던 브랜드 외에 수십 개의 소규모 점포가 난전을 이루고 있었다. 수백 명의 수제화 기능공이 실력을 겨루던 시절. 밑창 없는 신발 껍데기 하나 만들고 수습생들이 챙기는 돈뭉치가 도시락통보다 더 두툼했다는 시절이었다. 그런 만큼 수제화 기능을 익히려는 사람도 몰렸다.

“수제화 기술자로 일주일을 일하면 직장인 한 달 월급을 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실제로 몇 달만 꼬박 일하면 도청 옆 도지방 하나는 얻을 수 있을 정도였다. 비싸서 먹지 못했던 짜장면, 라면을 이 골목에 오면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인맥이 없으면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 기술은 평생을 수월히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이어서 배운 것 없는 이들이 너도나도 배우고 싶어하는 고급 기술이었다. 직원만 해도 20~30명이 넘었고 하루 100족 이상의 구두가 팔려나갔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배우들이 구두를 맞추어 가던 시절이었다.”

1960∼70년대만 해도 대구 수제화는 전국 최고였다. ‘남자 구두는 대구, 여자 구두는 서울, 운동화는 부산’이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 수제화는 대학·직장에 들어갈 때나 결혼할 때 부모가 특별히 맞춰주는 것이어서 그 의미도 남달랐다. 부푼 꿈을 안고 백씨는 구두 공장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구두를 만들기까지의 세월은 만만찮았다. 처음에는 선배의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우는, 말 그대로 견습생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의 연속이었고 칼에 손이며 무릎 등을 베이는 게 일쑤였다. 하견습, 중견습, 상견습에 이르기까지 10년 가까운 세월을 몇 푼 안 되는 월급을 받아가며 잔심부름이나 해주며 견뎌야 했다. 연탄불에 찹쌀풀을 끓이는 것만 3~4년을 했다. 쓰고 난 못을 망치로 두드려 펴고 가죽을 자르는 칼을 가느라 몇 년, 실밥을 따고 본드 칠을 하는 잡일을 하며 또 몇 년이 흘렀다. 그리고 재봉틀로 실을 박는 상견습에서 디자인과 재단을 하는 갑피사가 되기까지 또다시 몇 년의 세월이 걸렸다.

“상견습이 되어 재봉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살림이 나아졌다. 기술자들은 월급제가 아닌 도급제여서 구두 한 족에 50원 받던 것을 재봉 기술을 배우자 구두 한 족에 100원을 받았다. 도급제라서 만든 만큼 돈을 벌었다. 생고무를 휘발유에 녹이느라 불도 내고, 본드 냄새 때문에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죽자 살자 일을 했던 시절이었다.”

서른이 되던 해 백씨는 ‘가리온제화’라는 자신의 가게를 이곳 향촌동에서 오픈했다. 가리온제화는 96년 ‘종로제화’로 이름을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향촌동 수제화 골목은 1970년대에 생겨났다. 대구의 상권이 향촌동에서 동성로 쪽으로 넘어간 시점이다. 상권이 옮겨 가면서 임대료가 싸져 당시 자유극장 뒤쪽에 있던 수제화 기능공과 피혁상들이 들어왔다. 한때 300m 골목에 가게와 공장, 피혁점이 130여개에 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려한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90년대 말부터 수제화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2000년대 들어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 쇼핑몰과 대형마트가 활성화하면서 많은 수제화 공장이 하도급업체가 됐다. 값싼 중국산의 공략에 불황까지 겹쳤는데 재료비가 급등하면서 그늘은 더 짙어졌다. 최근 10여년간 수제화 가게 수는 반토막이 났다.

한때 포기하고도 싶었지만 힘든 시절을 견디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구두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수만 켤레의 구두를 만들었지만 하기 싫다 이런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까 이런 생각만 했지.” 그런 그에게 구두는 운명이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세상 단 하나의 구두를 위해 어둡고 좁은 작업실을 지키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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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은 구두 장인

수제화가 노력은 많이 들고 돈은 크게 되지 않는 사업이다 보니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 자칫 하다가는 명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것이 수제화 골목 가게들의 공통된 걱정이다.

서른셋의 백슬기씨. 슬기씨는 이런 수제화 골목에 젊은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백씨는 제주도의 한 회사 법무팀에서 근무했다. 몇 년 전부터 아버지는 슬기씨에게 종로제화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자주 토로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게를 정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했다. 50년 가까이 구두를 운명처럼 붙잡고 살아온 아버지였다. 그 세월이 그 기술이 이렇게 잊혀지는가, 그는 안타까웠다. ‘나이를 먹어서도 오래오래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구두가 없어지겠느냐’ ‘구두는 아는 사람이 만들고 팔아야 한다’ 아버지의 말이 가슴 깊이 파고 들었다. 그렇게도 싫어했던 구두쟁이가 되기 위해 사표를 던지고 향촌동 수제화 골목으로 들어온 것이 2014년, 이제 3년째다.

“독한 약품 냄새에다 손에 흉터가 사라질 날이 없고 고무가루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일이 손으로 구두를 만드는 작업은 3D 업종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50년 가까이 한 우물만 판 아버지를 사회에서는 이제 ‘장인’이라 부르며 인정해주고 있다. 구두 장인들의 인고의 세월이 보상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3~4대에 이르기까지 정통구두제작 방식을 이어가고 싶다.”

어릴 적부터 신발의 못을 뽑으며 놀았고 만드는 것도 질리도록 봐 왔지만 직접 만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 슬기씨가 재능이 있어 보이냐는 질문에 아버지는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젓는다. 아버지의 눈에 아들이란 그런 법. 때문에 슬기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혼난다. 아버지의 호통은 아들이라 더 날카롭고 호되다. 손으로 하는 작업이니만큼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10년은 넘겨야 구두장이 명함 나온다 할 정도로 배울 게 많은 만큼, 슬기씨의 솜씨는 아직은 초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겨우 가죽을 자르고 본드를 칠하는 법을 배웠지만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되려면 시간만이 약이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묵묵히 배워나가는 슬기씨를 보고 골목의 장인들은 하나같이 칭찬과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신발 하나를 만드는 데는 1주일 정도 걸린다. 라스트(신발 틀) 깎기, 디자인에 따른 패턴 만들기, 가죽 재단, 갑피(가죽 재봉질), 저부(가죽을 씌운 뒤 굽 부착하는 작업)와 같은 여러 단계의 공정이 필요하다. 모든 공정은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가죽 재단도 기계화가 어렵다. 같은 가죽 원피라도 질이 좋지 않은 부분은 피하면서 재단하기 때문에 일일이 눈으로 보면서 가위로 재단한다. 이렇게 손이 많이 가도 신발 한 켤레당 가격은 5만~8만원이다. 디자인에 따라 수작업이 많이 들어가는 경우 15만~20만원 정도다.

이곳 골목에서 만들어지는 수제화들은 전국으로 나간다. 백화점에서 20만~30만원대에 구입하는 수제화들도 알고 보면 골목에서 만들어진 물건이 많다. 백화점 입점 브랜드들이 향촌동 수제화 공장에 아웃소싱을 통해 수제화를 받아 판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골목을 찾는다. 어떤 손님들은 백화점에서 디자인을 골라 찾아와 자신만의 구두를 사가기도 한다.

슬기씨의 현재까지 주요 업무는 매장 관리와 판매다. 아버지의 단골 고객 명단과 관련 자료를 DB화하고 인터넷 판매 루트도 만들었다. 덕분에 강원, 제주, 인천, 서울에서 손님들이 전화와 e메일 한통으로 구두를 맞추고 있다. 이미 슬기씨의 고객이 되어 매장을 찾으면 먼저 ‘아들을 불러 달라’고 요청하는 손님까지 생겼다.

“특별히 발이 불편한 사람이나 중장년층이 애용하는 구두가 돼 버린 수제화를 젊은층에 타깃을 맞춰 고퀄리티의 맞춤 구두로 제작·판매해 볼 계획이다. 수시로 서울에 가서 부자재 시장을 돌며 고급화를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수제화 골목이라고 하지만 고객의 어떤 요구도 다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나만의 맞춤 구두를 만들어주는 곳은 몇 안 된다. 수입가죽을 사용해 홍창을 만드는 기술은 종로제화가 독보적이다. 인터넷에 소개되면서 큰 히트를 쳤다. 수제화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고 싶다.”

글=이은경기자 lek@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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