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3] 김해부사를 지낸 김치(金峙)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6-06-23   |  발행일 2016-06-23 제13면   |  수정 2016-06-23
창왕 즉위년(1388) 무진방(戊辰榜) 병과(丙科) 4위
길재의 특출난 제자…만호부 관리 비리 파헤쳐 日과 외교마찰 차단
20160623
20160623
김치의 과거급제 이력이 기록되어 있는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등과록전편은 신라·고려시대 과거급제자 명단이 적혀 있는 문헌이다.


세종 때 지사간·김해부사 지내
널리 알려진 효자…旌門도 받아

왜구침입에 폐혀가 된 객관 정비
사당세워 선산 백성 교화도 힘써


선산 장원방(壯元坊·옛 영봉리, 지금의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 출신 15명의 과거급제자 중 첫 손에 꼽히는 인재는 길재의 제자이자 김해부사를 지낸 김치(金峙)다. 그는 고려 창왕 즉위년인 1388년 문과에 급제해 중앙관직에 진출했다. 조선 초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김해부사에 올랐다. 김해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장원방에 살면서 김숙자와 함께 후진양성에 힘썼다. 김숙자의 아들인 김종직도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조선 태종 때 견내량만호(見乃梁萬戶) 목철(睦哲)의 비리를 밝혀낸 일화가 전해진다. 특히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선산의 객관을 정비하는 데 앞장섰고, 사당을 세워 선산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릴만큼 효행도 지극했다.

#1. 널을 뛰는 정치인생

거제와 통영이 만든 작은 해협, 견내량(見乃梁)은 전하도(殿下渡)로도 불렸다. 고려조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당시 왕이던 의종(毅宗, 재위 1146~1170)이 거제도의 폐왕성(廢王城, 현 둔덕면 거림리)으로 쫓겨 내려왔는데, 그때 전하(임금)가 건넜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그런 견내량을 지나며 김치는 쓴 침을 간간이 삼켰다. 그도 한때는 고려의 신하였다. 우왕(禑王)이 사라지고 창왕(昌王)이 등장한 격변의 그 해(1388년)에 과거에 급제해 출사했으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시 무진방(戊辰榜) 병과(丙科) 4등의 영광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쟁쟁했다. 하지만 김치는 정신을 곧추세웠다. 비록 지금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정5품)에서 물러나 확실한 소속이 없는 상태이기는 해도, 이제 그는 엄연한 조선의 신하였다. 게다가 삼가 받들어야 할 어명도 있었다.

“가서, 알아보라.”

왕의 명은 조용하고 간결했지만, 사건의 내막은 시끄럽고 복잡했다. 지난해인 1401년, 견내량의 만호(萬戶, 외침 방어를 목적으로 설치된 군사조직 만호부의 관직)인 목철(睦哲)이란 자가 바다에서 도적을 여럿 잡았다 해서 상을 두둑하게 챙긴 일이 있었다. 그런데 올해(1402년), 일본에서 사신이 와 한다는 말이 해괴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사신들을 태운 배가 지난해 5월 조선으로 향하여 떠났으나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만호에게 화를 당했음이 분명한데, 알고는 있는 것입니까? 명명백백 밝혀 죄 주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임금이 노여워했다. 그것이 김치가 견내량으로 내려온 이유였다. 사안의 전후를 낱낱이 파악해 보고해야 했던 것이다.

김치의 서슬 퍼런 추궁에 목철은, 왜선(倭船) 한 척을 잡아 열다섯 명의 목을 벤 후 도적을 잡은 것으로 고했다며 순순히 이실직고했다. 거짓으로 조정을 능멸했을 뿐만 아니라 외교에 불안까지 조장했으니 이제 목철은 죽은 목숨이었다. 실제로 목철은 목이 잘리는 참수의 형을 받았다.

견내량에서 돌아온 김치는 견내량 만호의 비리를 밝힌 공로로 형조(刑曹) 정랑(正郞, 정5품)을 제수받았다. 아마도 일의 갈무리가 깔끔했던 덕분이었을 것이나, 평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사헌부와 마찰이 빚어진 탓이었다. 사헌부라면 김치가 한동안 몸을 담았던 곳이니만큼 이심전심의 융통성이 발휘되어야 자연스러울 일이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사건의 요는 이러했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거짓을 고한 사람의 경우, 옥쇄장(獄鎖匠, 옥에 갇힌 죄인을 맡아 지키는 나장)으로 하여금 거리에 세워두게 하고 지나는 사람들로부터 망신을 당하도록 했는데, 김치가 사헌부에서 임의로 옥쇄장을 부리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막은 일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당연히 처리해야 했음에도 마무리하지 못한 소송건까지 빌미가 되어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그렇게 김치는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6년이나 지난 1418년이 되어서야, 막 즉위한 세종으로부터 사간원(司諫院)의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종3품)로 부름받으며 다시 정계에 등장했다. 이후 김치는 지사간(知司諫)을 거쳐 김해부사(金海府使)에까지 이르며 관운에 꽃을 피워나갔지만, 돌연 정계에서 물러나 경상도 선산 장원방으로 향했다. 그 이유에 대한 단서는 남아있지 않으나, 정황상 노환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2. 솔선수범으로 고을의 기운을 바꾸다

“부사어른, 저 왔습니다.”

김숙자(金叔滋, 1389~1456)였다. 그는 김치를 여전히 ‘부사’로 부르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가까이 앉으시게.”

김치는 선산 영봉리, 즉 장원방에 둥지를 튼 이후로 김숙자와 많은 시간을 더불어 하고 있었다. 김치의 생몰연대를 확인할 길은 없으나, 김치가 출사한 그 다음해에 김숙자가 태어났으니, 나이로는 김치가 한참 위인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두 사람은 그 의기와 이상이 잘 맞았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문인 중에서 두 사람은 단연코 빛나는 커다란 별이었다.

김숙자는 학문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훗날 영남사림의 영수가 되었던 바, 선조조의 유명한 학자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정몽주는 성리학의 원조대가로, 그 정몽주에게서 길재가 배우고, 길재에게서 김숙자가 배우고, 김숙자에게서 김종직이 배우고, 김종직에게서 김굉필이 배우고, 김굉필에게서 조광조가 배웠으니”라고 일렀을 정도였다. 그런 김숙자 곁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준 이가 바로 김치였다.

김치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예의범절과 문물이 날로 타락해져가고 있는데, 학자 된 자로 어찌 가만히 앉아 탄식만 하겠는가. 사당을 지어 참배하고, 우리부터 솔선수범하며, 그 뜻을 안팎으로 전해 교화해야 한다고 봄세.”

“지당하십니다. 저도 힘을 얹겠습니다.”

이에 사당을 세우고 김치가 나서서 예를 행하며 교육에 힘쓰니, 점차 고을에 절의와 효 사상이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김치가 널리 알려진 효자였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신뢰를 주고도 남았다. 실제로 김치의 효행은 정문(旌門, 효자·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받았을 정도로 남달랐다. 이는 성종실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 예조(禮曹)에서 임금에게 청하기를 “김치는 효자여서 나라로부터 정문을 받았는데, 이를 그의 자손들이 정성으로 다루지 아니하여 헐어버렸으니 그 뜻을 존경하고 본보기로 삼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니 관으로 하여금 고치고 손질하도록 하소서”라고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비록 자손들의 허술한 사후처리가 아쉽기는 했으나, 이 부분은 김치의 효심을 나라에서도 인정했다는 증거였다. 이처럼 선산은 김치를 통해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들을 배출하는 걸출한 고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3. 선산(善山)을 위해서라면

1428년(세종 10) 봄 해거름이었다. 정갈한 찻상을 앞에 두고, 전 김해부사(金海府使) 김치와 현 선산부사(善山府使) 이길배(李吉培)가 선산에 대해 조곤조곤 의견을 이어나갔다.

“이 부사께서 선산에 오실 때 전하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수령을 임명할 때마다 반드시 그에 적당한 사람을 택하였으니, 마땅히 나의 뜻을 받아 인구도 늘리고 살림도 부유해지게 하라’ 하셨다 들었습니다.”

“예. 실로 어깨가 무겁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선산은, 고려 우왕 때 왜구가 헤집고 간 이후로 아직까지 정비되지 않은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신들이 묵는 객관의 상황이 이루 말로는 다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데도 지금까지 수령이었던 자들이 머뭇거리기만 해서 당최 수리를 하지 못한지라 고을이 모두 한탄하고 있습니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선산이 교통의 요충지인 것을 감안하면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헌데 이 부사께서 평소 백성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송사를 듣고 판단을 내림에 과감하시다 하니, 이 어찌 고마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객관 정비를 위해 힘을 써주십시오. 저도 저지만, 전 하동현감(河東縣監) 신희충(申希忠)과 온 고을이 나서서 애쓸 것입니다.”

이로써 객관 정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큰일에는 임자가 있는 법이었다.

집현전(集賢殿)의 교리(校理, 정5품)였던 권채(權採, 1399∼1438)의 기록에 따르면 “1428년에 선산부사 이길배 공이 정사에 임한 후, 전 부사 김치와 전 현감 신희충, 그리고 학문과 덕행이 훌륭한 고을 노인들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버려진 절의 재목과 기와로 객관을 새로 짓기를 청원하였고, 이를 감사 홍여방(洪汝方)이 임금께 아뢰어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놀고 있는 사람들을 모으고 남아도는 재물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징발하지도 그들의 시간을 빼앗지도 않고서, 1429년 10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1430년 2월에 준공하였다”고 했으니, 바로 이것이 남관(南館)이었다. 이때 선산 출신의 중앙 고위관료였던 박서생(朴瑞生)도 협조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객관 역사가 한창이던 당시 박서생은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다녀온 직후였으며, 객관 완공 즈음에는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정3품)으로 임명되었다. 한꺼번에 열일을 치러야 할 정도로 바쁜 와중이었을 텐데도 선뜻 나선 것을 보면, 그 또한 김치의 영향력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김치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선산 객관은 60여년이 지난 1492년(성종 23), 북관(北館)의 추가 건립으로 보다 더 큰 규모를 이루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관만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교통 수요가 늘어난 때문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 참고문헌=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조선왕조실록, 선산군지,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동 기획:구미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