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트로이, 그 불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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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7-01   |  발행일 2016-07-01 제40면   |  수정 2016-07-01
땅 속 36.5m엔 6천여년의 역사가 층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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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유적지의 명물인 트로이 목마. 복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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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된 트로이 시절의 우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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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거대한 항아리. 곡식 저장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점쟁이가 자신의 전생이 전쟁고아라 했다며 내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사람이 있다.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사람이 아닌지라 그 앞에서 애써 표정은 감추었지만 폐허 속 혼자 울고 있는 아이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던 기억이 난다. 어떤 장소나 상황이 가끔 꿈처럼 사진이나 그림으로 눈앞을 스칠 때가 있다. 말 그대로 데자뷔이거나 동요 속 ‘두고 온 나뭇잎배’식인데, 이거 혹시 흔히 말하는 ‘신기(神氣)’ 아닌가, 덜컥 겁은 나지만 내겐 처음 본 에게해 연안의 트로이가 꼭 그랬다. 완벽한 폐허, 달리 말할 길 없이 그랬다. 그 풍경이 너무 황량했다.

‘그녀 이름은 폐허였다/ 젖가슴으로 염소를 키워 달 없는 밤이면 번제(燔祭)를 올렸다/ 제물은 그녀였다/ … / 아버지는 욕망이었다/ 그는 온몸이 눈이었다 보는 것마다 꿀꺽 삼켜/ 그의 많은 자식들 지칠 줄 모르는 놀이터였다’(졸시 ‘가족사’)


트로이 멸망 가져온 거대한 목마 계략
허물어진 벽들과 흙더미 수북한 유적
지금 그 입구엔 복원된 목마가 ‘파수꾼’

전설 속 구릉으로만 전해오던 유적지
1873년 獨 슐리만이 실체 발견·발굴
맨 밑바닥은 기원전 3000년 조성 도시
트로이戰 때 파괴된 6유적지 등 뒤엉켜

美 재조사, 트로이 아래 유적 존재 확인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누군가 정신분석을 해보겠다고 기염을 토했지만 이 시가 어떻게 내게 온 것인지 나는 안다. 동양신화보다 서양신화, 그중에서도 그리스 로마신화를 먼저 접하게 되는 독서 상황은 국민학교를 다닌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세대들이 겪었을 터, 자식들을 삼킨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에 충격을 받은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독서 상황 따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돼먹지 않은 교육행태이지만, 눈을 감고 세계 지리부도의 나라와 도시 손가락 짚기 놀이를 즐겼던 당시의 나는 그리스나 로마가 걸릴 때마다 환호했다. 그 신화가 내겐 실로 통조림 과일시럽처럼 달콤했던 것이다. 외할머니가 삼천갑자 동방삭을 잡기 위해 마고할미가 숯을 숫돌에 갈았다거나, 섣달그믐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는 이유, 제사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는 데는 달의 항아(姮娥)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얘기를 내게 해주었지만 왠지 그건 구식 같았다.

일찌감치 발췌본, 윤색 동화, 만화, 잡지 등에서 1969년 우리를 열광하게 했던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갈 때 탄 우주선 이름이나 박하향이 오묘하던 삼천만 국민의 자양강장제 상호에서도 그리스의 숱한 신들은 너무 남발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후 내 머리맡에는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신화 문고판이, 나이가 들어 시를 쓰면서부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등이 차례로 놓였다. 내 속으로 아킬레우스와 헬레네, 헥토르와 오디세우스의 트로이가 폐허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고고학과 문화인류학 탐구가 나의 막연한 꿈이 되었다. 앙드레 모로아·조지프 캠벨·하인리히 슐리만·베르길리우스에 이어 하워드 카터와 데이비드 롤 등이 시공을 초월해 그 속을 또 드나들었다. 뒤죽박죽 섞였지만 어느 순간 조금씩 정리되는 책장처럼 연대와 연관이 자리를 잡자 신화와 역사 속에서 일리아드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 헤로도토스의 역사 속으로

호메로스가 실재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거의 없다. 헤로도토스의 ‘기원전 850년경 살았던 눈먼 그리스 음유시인’이란 기록이 보편적으로 현재 통용된다. 그의 생몰 연대와 일곱 곳으로 추정된다는 출신지를 둘러싸고 학자들 간에도 이견이 분분하다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프랑스 소설가 레몽 크노는 ‘호메로스적 알레고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메로스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을 시작하며 점차 어른으로 자라날 때 곁에 서 있고, 우리가 활짝 피어날 때 함께 피어난다. 우리는 늙을 때까지 결코 그를 싫증 내지 않는다. 우리가 그를 곁에서 치워두자마자 곧바로 그를 향한 갈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호메로스가 갖는 한계만큼이 우리 삶의 한계다.’

서구식 교육의 폐해라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지만, 뒤늦게 할머니의 옛 얘기들을 짚으며 동양역사와 신화에도 큰 흥미를 느끼며 접하고 있는 나로서는 레몽 크노의 말에도 크게 공감함을 숨기지 않겠다.

그래서 터키의 수많은 멋진 도시들 중에서 슐리만이 발굴한 허물어진 벽들과 말갛게 흙더미들만 수북한 트로이에 갔을 때 다른 어떤 곳보다 좋았다. 우습지만 트로이에 발을 디딘 그 순간 범법 행위만 아니라면 작은 꽃삽 하나 가지고 들어가 신화와 역사를 밝히는 데 삶을 묻어도 좋으리란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올림푸스 신들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화를 내며 나타나 잔칫상에 황금사과를 하나 내던졌다. 어느 누가 불화의 여신을 잔치에 초대하고 싶으랴만 역시 그녀답게 사과의 겉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당연히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이렇게 세 여신은 사과를 놓고 다투었다. 셋 중 하나를 택해 두 여신의 원한을 사고 싶지 않았던 제우스는 그 일을 인간 중 최고의 미남인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해야 한다고 둘러대 위기를 모면했다.

졸지에 미(美)의 심판관이 된 파리스에게 선택의 대가로 헤라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권세, 아테나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명예, 아프로디테는 인간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노라 약속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약속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스파르타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였다. 아내를 빼앗긴 왕은 형인 아가멤논과 그리스 연합군을 구성하여 트로이를 공격했다. 십 년 동안의 그 처참한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아들 헥토르의 시체를 찾기 위한 트로이 프리아모스왕의 애원은 얼마나 간절한지.

그리고 그 유명한 오디세우스의 거대한 목마 계략으로 인해 트로이는 멸망하고 만다. 물론 파리스도 죽고 프리아모스를 비롯한 트로이의 왕족들은 거의 몰살당한다. 아무도 믿지 않는 용한 점쟁이 카산드라 공주는 아가멤논에게 끌려갔다가 무서운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다. 헬레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경국지색(傾國之色),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분노한 남편 메넬라오스의 칼날도 무력화시켜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간다.

일부 역사가들은 트로이의 풍요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탐욕이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명백한 진실을 알 수 없는 우리는 폐허가 된 황성옛터와 현란한 밤하늘의 별자리를 만드는 데 기여한 신의 아들들을 다만 추앙하며 추모할 뿐이다. 그들은 트로이의 이 벌판에서 천공의 별자리와 온 인류의 가슴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질 것도 모른 채 명멸해 갔을 것이다.

◆ 슐리만…트로이 유적지 발견

차낙칼레에서 30㎞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은 그저 전설 속의 구릉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1873년 독일의 고고학자 슐리만이 그 실체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섬세하게 발굴하고 있다. 히사를릴크에 있는 트로이 유적지는 36.5m나 되는 땅 속에 시대별로 여러 유적지들이 뒤엉켜 있다. 각 유적지를 표시한 안내판을 보지 않고서는 어떤 시대의 유적지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가장 깊은 바닥에 있는 1유적지는 기원전 3000~2500년 조성된 곳으로 도시라기보다는 요새에 가깝다. 2~5유적지는 2500~1900년 만들어졌고 트로이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곳은 6유적지다. 그리고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7유적지는 전쟁 후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 1250~1025년에 만들어진다.

곳곳에 발굴 표시 팻말과 금줄이 눈에 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슐리만은 고대사에 능통한 아버지에게 들었던 전설을 사실이라 굳게 믿으며 일리아스를 탐독했다. 그리고 천재성을 발휘해 1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러시아 군수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마흔 살이 넘어서도 슐리만은 그 거대하고 웅장한 성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자신의 막대한 재력으로 트로이 발굴을 착수했다. 수없이 많은 고난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나중에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발굴한 금은보화 등의 유물을 독일로 밀반출하여 베를린 박물관에 공개하는 등 여러 가지 고고학적 흠결이 있는 사람이지만, 트로이 고대사가 그때 비로소 밝혀지기 시작했으며, 그 열정 또한 당시 강단의 어느 학자들도 흉내 낼 수 없었음은 인정받고 있다.

아, 그때 불타는 트로이 왕족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 안키세스를 들쳐 업고 빠져나온 토굴 바로 앞에서 나는 졸고 있는 토끼를 만났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슐리만이 베를린으로 밀반출해 전시한 그 유물들을 2차대전 승전국인 러시아가 빼앗아 간 것을 모스크바 푸시킨박물관에서 봤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이것은 그리스인 호메로스가 쓴 트로이 멸망사라 할 수 있는 일리아스에 대해 후에 로마 건립의 아버지가 된 트로이의 후예인 베르길리우스가 대 그리스 복수서처럼 써내려 간 ‘아이네이아스의 현현(顯現)’은 아닐까. 나는 혼자 ‘현학취(衒學臭)’를 풍기며 서양의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그 토끼에게 농담하듯 키득키득 웃었다.

트로이 유적지는 96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슐리만 사후 1930년대 미국의 재조사 결과, 트로이 유적 아래 6천년 된 유적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존재함이 또 판명되었다.

유적 입구에 들어서면 트로이 목마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데, 이는 최근에 새롭게 만든 것이다. 트로이 목마를 지나 성벽 아래를 따라 한 바퀴 돌면서 전체 유적을 감상할 수 있다. 성벽은 트로이 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당시에는 이곳에서부터 바다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아킬레우스, 행복한 자여. 그에게는 호메로스가 있었으니. 하나 그보다 훨씬 뛰어난 나에게는 노래할 시인이 없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트로이를 돌아나오며 나는 추앙해 마지않을 영웅과 초인(超人)을 대낮에 촛불이라도 켜 들고 찾아다니고 싶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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