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7] ‘농사직설’을 펴낸 정초(鄭招)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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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7-21   |  발행일 2016-07-21 제13면   |  수정 2016-07-21
[문과] 태종 5년(1405)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2위
[문과] 태종 7년(1407) 중시(重試) 을과2등(乙科二等) 4위
20160721
정초의 과거급제 이력이 기록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위는 태종 5년(1405) 식년시 을과에서 부장원을 차지한 내용이고, 아래는 태종 7년(1407) 중시 을과2등(乙科二等) 4위에 합격한 내용을 적은 기록이다.

1429년 세종 때 편찬한 농사직설(農事直說)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서(農書)다. 이 책은 우리나라 풍토에 맞게 기술한 농업기술서로, 조선시대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농사직설의 편찬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선산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 정초(鄭招)다. 장원방은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마을로 옛 선산 영봉리를 일컫는다.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 노상리, 완전리 일대다. 정초는 사헌집의(司憲執義, 정3품)를 지낸 정희(鄭熙)의 둘째 아들로 어릴 때부터 명석하고 총명하기로 유명했다. 특히 한 번만 보고 들어도 단번에 암기하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져 그의 일화가 ‘용재총화’에 실리기도 했다. 태종 5년(1405) 식년시에 부장원에 올라 벼슬길에 나아갔고, 태종 7년(1407)에는 중시 을과2등(乙科二等) 4위를 차지하는 등 두 번의 과거시험에 급제한 엘리트다.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농사직설 외에 음악서인 ‘회례문무악장’, 윤리서인 ‘삼강행실도’ 등을 지었다. 장영실 등이 만든 천문 관측대인 간의대 제작을 관장하기도 했다.

어릴적 금강경 한번에 줄줄 외워
놀라운 암기력 문집에 실리기도

태종 5년 식년시 부장원 오르고
2년 후 승진시험도 단번에 합격
비범한 재능 세종도 아끼며 찾아

우리풍토에 맞는 농사직설 집필
천문관측대 제작에 관장하는 등
조선 농업·과학기술에 큰 업적


#1. 귀신 같은 기억력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묵은공 댁 둘째 열지가 그리도 총명하다는데, 그 얼굴 한번 보았음 싶으이.”

여기서 묵은공(默隱公)은 사헌집의(司憲執義, 정3품) 정희(鄭熙)의 이름이었고, 열지(悅之)는 정희의 둘째 아들 정초(鄭招)를 말함이었다. 소문대로 정초의 명석함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정초가 어려서 어떤 절에 갔을 적이다. 한 스님이 방 안에서 ‘금강경(金剛經)’을 읽고 있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정초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보탰다.

“그 정도는 한 번 보면 욀 수 있습니다.”

“소학(小學) 한두 장도 아니고 이 어려운 금강경을 한 번 읽고 왼다니, 어리다고는 해도 잘난 척하는 버릇을 고쳐야겠구나.”

아이의 당돌함에 스님은 느닷없이 내기를 제안했다. 정초는 선뜻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한 손에 야무지게 북채를 쥐고 북을 두드려 장단까지 맞추면서 ‘금강경’을 외워나갔다. 살짝 걸리는 부분 하나 없는, 물 흐르는 듯한 암송이었다. 그렇게 반 권쯤을 지나갈 무렵 놀라움과 무안함에 입장이 곤란해진 스님은 그만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버리고 말았다.

정초의 놀라운 기억력은 성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마시(司馬試, 생원진사시)를 코앞에 둔 때였다. 다른 이들은 시험 준비에 난리가 났는데도 정초는 그저 태평하게 놀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정초가 하루는 육경(六經)을 뽑아들더니 주르르 훑는 것이었다. 육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기(樂記)’의 여섯 경서로, 이를 다 합치면 분량이 방대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경에 실린 시만 해도 300편이 넘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충 보고도 정초는 시험관 앞에서 막힘이 없을뿐더러, 질문마다 메아리처럼 응답하니 당할 자가 없었다. 합격은 당연지사였다. 이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다가, 중종 때 문신 성현(成俔)의 문집 ‘용재총화(齋叢話)’에 실리기까지 했다. ‘학문을 널리 익힘에, 한 번 보면 곧 외우고 붓을 들면 곧 문장을 이루었다’고 적힌 기록은 정초의 명성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2. 두 번의 급제

1405년(태종 5) 4월21일, 식년시(式年試) 을유5년방(乙酉五年榜)이 열렸다. 식년시는 간지(干支) 중에서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들어 있는 해에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과거시험이었다. 정초도 응시한 이날 시험관으로는 이숙번(李叔蕃)이 지공거(知貢擧, 고시관)로, 유창(劉敞)이 동지공거(同知貢擧, 부고시관)로 나왔다. 이숙번은 제1차 왕자의난에 공을 세운 정사공신(定社功臣)으로 훗날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할 터였고, 유창은 조선을 여는 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성격이며 언행이 지위가 높아질수록 아름다워 두고두고 칭송받을 터였다.

시험은 어수선한 가운데 치러졌다. 풍해도(豊海道, 황해도)에 굶는 자가 무려 4천명에 육박한다는 소식과, 안동과 밀양을 비롯한 경상도의 스물여섯 개 고을이 폭우로 엉망이 되었다는 소식이 맞물려 온 탓이었다. 모질고 험한 때였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인재가 절실한 법이어서, 태종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시험의 추이를 살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넘쳤던 시험이 끝나고 4월27일 드디어 결과가 발표됐다. 정초가 부장원(副壯元, 2등)이었다. 선산 영봉리가 배출한 인재, 마을 전체가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정초는 내자직장(內資直長, 종7품)으로 임명되었다. ‘내자’는 당시 궁중에서 사용하는 쌀·밀가루·술·기름·채소·과실 등의 공급과 내연(內宴, 궁중잔치)에 관한 일을 맡고 있던 관아, 내자시(內資寺)를 일컫는다. 나라 살림에 대해 배울 것이 퍽 많은 자리였다.

그로부터 이태 뒤인 1407년(태종 7) 4월18일 중시(重試) 정해7년중시방(丁亥七年重試榜)이 치러졌다. 중시는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승진시험으로, 이날의 중시가 조선 들어 첫 중시였다. 100명 넘는 응시자 중에는 당시 예문검열(藝文檢閱, 정9품)이던 정초도 있었다.

창덕궁 광연루에 하늘같은 시험관들이 관복을 펄럭이며 입장했다. 독권관(讀卷官)은 좌정승(左政丞, 좌의정·정1품) 하륜(河崙)과 대제학(大提學, 정2품) 권근(權近)이었고, 대독관(對讀官)은 이조참의(吏曹參議, 정3품) 맹사성(孟思誠)과 지신사(知申事, 정3품) 황희(黃喜)였다. 임금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치러지는 시험인 만큼 독권관은 제출된 답안을 왕 앞에서 읽고 그 내용을 설명하는 업무를 담당했고, 대독관은 그 독권관을 돕는 것이 맡은 바 소임이었다.

이날 중시의 책문(策問, 논술) 주제는 ‘제왕입법정제(帝王立法定制)’였다.

“그대들의 뜻이 이 세상에 있은 지 오래라. 부디 제왕의 마음을 가지고 임할 것인 즉, 다스림의 도리와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이치를 예전의 교훈에서 되짚되, 시대에 맞는 것으로 참작하여 각각 포부를 다해 모두 글에 나타내라.”

응시생들의 머리와 가슴이 동시에 끓기 시작했다. 정초 또한 품고 있던 뜻을 정연하게 밝혔다. 그리고 나흘 뒤인 4월22일 합격자가 발표됐다. 을과1등(乙科一等)과 을과2등(乙科二等)을 합쳐 모두 10명이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을과1등에는 변계량(卞季良), 조말생(趙末生)과 박서생(朴瑞生)이 2위와 3위를 차지했고, 을과2등에는 김구경(金久)이 1위를 차지한 가운데 박제(朴濟), 유사눌(柳思訥)이 뒤를 이었고 정초가 4위에 이름을 올려 좌정언(左正言, 정6품)을 제수받았다.

이후 정초는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했다. 워낙 비범한 데다 관리로서의 재질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 임금도 아끼며 자주 찾았다. 1423년(세종5)에 함길도(咸吉道, 함경도) 관찰사로 나아갈 때는 친히 불러 이르기도 했다.

“내 어찌 경을 외지로 떠나게 하고 싶으리오. 하나 외지를 중히 여기는 과인의 평소 뜻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성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오.”

정초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이에 그 공을 인정받아 이조판서(吏曹判書, 정2품),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정2품), 세자시강원좌빈객(世子侍講院左賓客, 정2품) 등 고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그 까다롭다는 청백리로도 선출됐다.



#3. 농사직설(農事直說) 집필 주도

임금이 어떤 가치관을 지녔는지에 따라 신하의 행동반경이 결정되는 법이어서, 농업과 과학기술에 몰두한 세종 덕분에 정초에게는 그 비상한 재능을 충분히 쓸 기회가 넉넉하게 주어졌다. 특히 정초가 해낸 수많은 일 중 으뜸은 1429년(세종11) 4월에 완료된 ‘농사직설(農事直說)’ 편찬이었다.

당시 백성들은 중국의 농서를 활용했는데, 이는 벼농사 중심의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그나마 있던 우리 농서인 ‘본국경험방(本國經驗方)’도 내용이 부실해 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에 정초는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도 달라야 한다’는 세종의 지침 아래 농사직설 집필을 주도해 나갔다. 그는 농사직설을 집필하기 위해 농민들의 재배법을 확인하는 한편 농부들이 경험한 바를 참고해 우리 형편에 맞도록 기술했다. 곡식 재배에 중점을 두고 물, 날씨, 땅의 형세 등 각 지역에 따른 환경조건까지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곡식을 재배해야 유리한지를 알 수 있게 했다.

예를 들면 넓게는 물이 없는 밭 상태에서 볍씨를 뿌리는 건답직파법, 농지에 직접 씨앗을 뿌려 벼를 재배하는 직파법, 묘를 따로 길러 본포에 옮겨심는 육묘이양법 등의 벼농사 방법에서부터 좁게는 ‘종자는 파종 직전에 겨울 동안 저장해둔 눈 녹은 물에 담갔다 말리기를 두 번 반복하거나 말과 소의 오줌에 담갔다가 말리기를 세 번 되풀이하라’거나 ‘땅은 봄과 여름에는 얕게, 가을에는 깊이 갈도록 하라’와 같은 상세한 요령까지 모두 아울렀다.

그리고 실제 영농기술을 제외한 나머지는 과감히 삭제해 간결한 상태로 만들어 이듬해 봄 본격적인 농사철 전에 각 지역에 배포했다. 실제 정초는 농사직설 서문에서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다. (중략) 농사 외에는 다른 설(說)은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을 써서, 산야(山野)의 백성들에게도 환히 쉽사리 알도록 하였다”며 책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후 농사직설은 개인에 의해 집필된 최초이자 최고의 실용농학서로 조선농업의 기본서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농서(農書)로 평가받고 있으며, 일본까지 전해져 일본 농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정초는 이외에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을 편찬했으며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집필과 간의대(簡儀臺, 천문관측대)의 제작·설치를 관장하는 등 조선시대 전반의 농업과 과학기술에 큰 업적을 남겼다.

끊임없이 과로했던 탓일까. 정초는 1434년(세종16)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의 업무를 수행하던 중 세상을 뜨고 말았다. 소식을 들은 세종이 ‘하늘이 너무도 급히 빼앗아 가버려 마음이 슬프다’고 한탄하면서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배움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니 ‘문(文)’이요, 의(義)에 의하여 절제하니 ‘경(景)’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의 맥락,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조선왕조실록,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공동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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