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 (2) 오사카 경북도민회장 박재길 이하라공업 대표

  • 백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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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7-26   |  발행일 2016-07-26 제6면   |  수정 2022-05-1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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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공장에서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박재길 이하라공업 대표(왼쪽). 작은 사진은 이하라공업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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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출신으로 8남매 중 넷째
中시절부터 운전 배워 배달일
형과 동업하다가 23세때 독립
운동·금주’인생 두 약속 실천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재일 조선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오사카. 이곳 경북도민회장 직을 맡고 있는 박재길 이하라공업 대표(72)는 종종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낮은 목소리로 흥얼거리곤 한다. 비록 정확한 발음은 아니지만 그의 눈빛에 짙은 감정선이 선명하다. 박 대표에게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검푸른 바다는 어떤 의미일까.

◆제철 사업으로 자립…녹록지 않았던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삶

지난달 15일 오전, 일본 효고현 야오시에 있는 ‘이하라공업’. 990㎡(약 300평) 남짓한 공장 안 바닥에는 하얀 쉿가루가 잔뜩 떨어져 있었다. 다양한 크기의 기계에서 쉴 새 없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때때로 공정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전자음도 공장 안에 울려 퍼졌다. 실내는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후텁지근했다.

박재길 대표(72)가 운영하는 이곳은 선박이나 각종 산업용 기계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 금속 가공 공장이다. 태양광 집열판의 경우 대만 등지로 수출도 한다. 그는 인근에 오토바이 부품을 만드는 공장을 하나 더 갖고 있다. 박 대표는 “예전에는 직원 수가 18명까지 됐지만, 지금은 7명이 일을 해내고 있다. 거의 모든 공정이 자동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대표의 고향은 청도다. 그의 부친이 19세가 되던 해(1928년)에 생계를 위해 일본에 들어온 후 그대로 둥지를 틀면서 자연스럽게 재일 조선인 2세가 됐다.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박 대표는 “여느 재일 조선인이 그렇듯, 부친의 일본 생활 역시 녹록지 않았다”고 전했다.

박 대표의 아버지는 염색공장에서 일을 하다 짐을 옮겨주는 일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헌 옷을 한국으로 가져가서 팔아 돈을 마련하기도 했으며, 폐철 따위를 주워서 내다 파는 일도 했다.

당시 이러한 재일 조선인들을 가리켜 속칭 ‘스크라뿌(스크랩·Scrap) 일을 한다’고 했다. 스크랩은 고철, 쇠부스러기나 파쇠를 나타내는 말로, 이 일에 종사하는 1세대 재일 조선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넉넉지 못한 가정 형편에 박 대표도 맘 편히 공부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운전면허증을 딴 뒤, 배달 일을 돕기 시작했다. 이후 고교 2학년 때는 학교마저 그만두고 둘째 형과 함께 철제 가공품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선반기계 두 대가 영업 밑천의 전부였다.

박 대표는 “가난한 형편에 혼자만 학교를 다닐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형님들도 중학교밖에 안 나온 상태였다”며 “마침 학교 다닐 때 시계나 라디오 등 기계가 고장 나면 직접 분해해서 고치는 걸 좋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든든한 ‘사업 파트너’였던 둘째 형과 착실하게 공장을 꾸려 나가면서 점차 덩치를 키웠다. 이후 그는 23세쯤부터 독립해서 따로 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직원 1명만을 데리고 휴일도 없이 매일 밤늦게까지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고 한다.

◆닮아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생애

인생에 있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속속 시작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과의 ‘두 가지 약속’을 지켰다.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꾸준히 운동을 했던 게 첫째다. 박 대표는 19세 때부터 3년간 권투를 배웠다. 그는 “덩치가 큰 편이어서 일본인 친구들에게 대놓고 차별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강해야만 (싸워도) 안 진다고 생각했다. 권투는 그래서 배웠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박 대표는 결혼하기 전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기분 좋게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 선은 넘지 않는다. 아버지가 반면교사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면 솔직히 좋지 않은 감정만 남아있는 게 사실”이라며 “부지런히 일을 하셨지만, 거의 매일 술을 마셨던 게 기억난다. 집에 돌아오시면 창문을 열고 정체불명의 한국 노래를 목청껏 부르셨는데 창피했다”고 회상했다.

박 대표의 부친은 철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그의 가족이 일본 땅에 정착할 수 있게 노력했고, 아들 역시 제철 공장을 꾸려나가며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미워하면서도 닮아가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세상 대부분의 아들이 느끼는 사랑이 이와 같지 않을까.

흥이 많은 성향도 닮았다. 춤과 노래가 그들의 연결고리다. 아버지가 노래를 통해 풀어놓던 흥은 아들의 춤으로 연결됐다. 박 대표는 사교댄스를 즐겨 췄다고 한다. 20대 초반, 박 대표는 ‘지르박’을 추기 위해 종종 무도회장을 찾았다. 지금의 아내는 이곳에서 소위 ‘부킹’을 통해 만난 것이었다고 하니, 인연이란 참 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사진=<사>인문사회연구소 제공

※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6-일본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pride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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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길 대표의 결혼식 기념 사진.


■ 키워드로 읽는 在日조선인의 삶-‘한국인 아닌 한국인’

“고국 방문하면 차가운 시선 섭섭…민족의식은 항상 품에 간직”

박재길 오사카 경북도민회장

박재길 이하라공업 대표는 그와 애증(愛憎)의 관계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장례를 치르기 위해 처음 한국을 찾았다. 이때가 1978년.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부산에 도착했고,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한 뒤 청도로 모셨다.

박 대표와 함께 제철사업에 뛰어들었던 둘째 형은 항공기 사고로, 셋째 형은 기계에 몸이 끼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맏형(83)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다. 형제가 하나둘 떠나면서 그는 일종의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박 대표가 조국(한국)에 대해 갖는 서운한 감정도 뿌리가 깊은 듯 보였다.

박 대표는 “그동안 일본에서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 열심히 버텼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 것”이라며 “우리나라를 위해서 나름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 가면 ‘일본인’이라 여기는 듯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섭섭하다”고 말했다.

오사카 경북도민회를 비롯해 경북 출신의 재일 조선인들은 그간 우리나라를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비록 몸은 일본에 있지만, 그들은 ‘기쁨’(올림픽 등 국제행사)과 ‘슬픔’(자연재해 등)을 함께 나눈 한국인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걸음마 수준의 한국어를 구사한다. 출생지가 일본이어서다.

그럼에도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틈바구니에서도 민족의식만은 항상 품에 안고 있었다. 박 대표가 기억하는 ‘싫어하는 아버지’ 역시 자녀들이 한국 국적을 포기하겠다면 부자로서의 인연을 끊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가 굳이 일본땅이 아닌 고향인 청도에서 긴 안식을 취하고자 했던 이유와 같을 것이다.

박 대표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이 점점 ‘현지화’돼 가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사회에 점점 동화돼 한국인보다 일본인의 정체성에 가깝게 될 것이란 의미다. 그는 “다음 세대(3·4·5세대…)들은 우리(1·2세대)와 다르게 ‘조국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않을 것 같다”며 술잔을 연거푸 비워냈다.

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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