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터널’ 이정수役 하정우

  • 윤용섭
  • |
  • 입력 2016-08-19   |  발행일 2016-08-19 제42면   |  수정 2016-08-19
“재난상황에도 자연스러운 웃음 유발로 영화적 재미 더했다”
20160819


“옆에 있는 맹수 한 마리와 연기한다는 느낌으로 해 달라.” ‘터널’을 연출한 김성훈 감독으로부터의 주문은 일종의 모노드라마처럼 극을 이끌어야 하는 하정우에게 유용한 지침이 됐다. 그는 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무너져내린 터널 안에 홀로 갇히게 된 평범한 가장 정수를 연기했다. 밖에서는 긴급하게 사고 대책반을 꾸려 그를 구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때까지 정수는 혼자만의 생존기를 펼쳐야 한다. 다시 말해 하정우는 감독의 표현처럼 맹수와 같은 붕괴된 터널을 상대배우 삼아, 미세한 진동과 잔돌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따라 리액션을 해야 하는 낯설고 녹록지 않은 상황과 마주한 셈이다. 김성훈 감독이 하정우를 고집한 이유다. 비슷한 상황에 처해졌던 ‘더 테러 라이브’(2013)에서의 인상적인 모습만 보더라도, 지금 충무로에서 이런 상황에 이 정도로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는 배우를 찾기란 쉽지 않다. 러닝타임 내내 심각한 상황을 유쾌하게 헤쳐나가고 관객의 위로까지 유도해야 하는 골치 아픈 미션까지 수행해야 한다면 더욱더. “그래서 정수나 정수를 연기하는 배우 모두 낙천적이었으면 했다”는 김성훈 감독이다.

그의 선택은 적확했다. 감독의 말처럼 하정우는 영화 속 가장 어둡고, 두렵고, 무서운 공간과 상황에서 그만이 지닌 특유의 긍정적 에너지와 매력으로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하고 연민을 이끌어냈다. 덕분에 폭발할 듯한 긴장감 속에 간간이 터져나오는 웃음, 사회구조에 대한 통렬한 비판까지 아우른 영화는 재미와 감동을 견인하며 빛을 발했다. 대체 불가,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라는 수식이 어느 때보다 잘 어울리는 ‘터널’의 하정우다.

"붕괴터널을 상대 삼아 진동 하나에도 리액션
'고통은 잠시, 재미는 길게’ 보여 주려 고민
김성훈 감독과 의논 끝에 코미디서 해답찾아
극한 외부와 대비되는 인물로 아픔 극대화

'아가씨’때와 달리 즉흥연기 주문 짜릿·흥분
연기는 경연대회 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싸움
한 이미지 밀고 나가는 알파치노가 나와 맞아
'국가대표2’ 수애와 드라마라도 함께 하고파”


▶개봉 후 줄곧 박스오피스 정상(17일 현재)을 차지할 정도로 시장 반응이 좋다.

“다행이다. 가장 중요한 건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인데 그 점에서 관객과 소통이 제대로 이뤄진 것 같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터널’을 만들어 나갔던 시간이 결과적으로 헛되지 않았다는 게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하다.”

▶어떤 점에 끌려서 ‘터널’을 선택하게 됐나.

“소중한 하나의 생명을 다룬 이야기에 울림이 있었다. 밖에서는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구조작업에 나서고 온 나라가 열심히 뛰어다닌다. 안에 있는 정수는 갇힌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해 나가게 되는데 그 부분이 흥미로웠다. 특히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정수의 아내와 그를 구하기 위한 구조대가 진지하고 심각하게 안을 걱정하고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터널 안에 갇힌 정수는 그 안에서 재미를 찾고,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며 버텨나간다는 게 아이러니하고 블랙코미디적인 매력으로 다가왔다.”

▶제한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전작 ‘더 테러 라이브’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번에도 재난상황에 빠진 인물인데 그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진짜 현실을 생각하면 이 사람은 패닉과 공황장애가 와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가만히 엎드린 상태로 아무것도 못했을 거다. 과연 관객이 그런 모습을 보고 싶을까. 아닐 것이다. 고통은 잠시, 재미는 길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너무 말도 안 되게 릴랙스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 또한 설득력이 없으니까 조절을 잘 해야 했다. 처음에는 터널에 갇혔으니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일 테고, 일주일 안에 구출될 수 있다는 구조대장의 말에 안정을 찾는다. 이후 그의 생존기가 펼쳐지게 되는데 관객들도 그렇게 정수가 안정을 찾아가길 바랄 것이다. 그건 이 영화의 동력이라 할 수 있다. 남은 숙제는 영화적 재미를 주면서 관객을 유도하는 일이다. 감독과 의논한 끝에 그 답을 코미디에서 찾았다. 재난상황이지만 이를 무겁거나 우울하게만 전시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유쾌하게 진행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결과 정수는 비록 고통스럽지만 관객의 입장에선 웃을 수 있는 웃음 포인트를 군데군데 삽입했다.”

▶정수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되게 긍정적이고 침착하다. 한편으론 그 모습에서 하정우의 모습이 보였다. 이 캐릭터에 당신의 색깔을 얼마나 입혔는지 궁금하다.

“시나리오에서부터 캐릭터 소개가 잘 돼 있었고 감독님께서 이정수라는 캐릭터에 공을 많이 들인 느낌이었다. 그 캐릭터를 가지고 감독과 준비를 하면서 나에게 대입시켜 보았을 때 나라면 하루 종일 울고만 있진 않을 것 같다. 그 안에서 적응해 나가고, 마음을 둘 수 있는 것들을 찾을 것 같았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하고서 그때그때 연기를 해나갔다. 살아 나가겠다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항상 편안하고 여유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또한 외부 상황이 점점 극한으로 치닫기 때문에 안에서는 더 상반되게 인물이 느슨하게 있으면, 그것이 대비가 되고 고통과 아픔들이 극대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조금 더 느슨하고 유연해지려고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기존의 접근방식과도 달랐을 것 같은데.

“그렇다. 전작 ‘아가씨’는 시나리오가 잘 짜여 있고 연극적으로 구성이 되어야만 찍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때문에 자유로움은 조금 제한이 됐다. 그에 비해 ‘터널’은 완전히 상반된 작업이었다. 감독도 가능하면 즉흥연기를 많이 해달라는 주문을 하셨다. 시나리오에 구애받지 말고 편하게 알아서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표현했으면 좋겠다는 거다. 사실 배우 입장에서 그런 주문은 정말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이다. 내 생각에도 이 같은 접근방식이 영화의 의도와도 잘 맞고 이야기적으로 잘 밀착될 수 있다고 봤다. 그 점에서 즐겁고 보람되고 뿌듯한 작업이었다.”

20160819

▶상대 배우와의 리액션 없이 오롯이 혼자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텐데.

“리액션 없이 연기하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상대 배우의 다른 해석과 새로운 연기를 보면서 내가 변화하는 부분이 분명 있는데 그게 없으니 공허하기까지 했다. 대신 이번엔 세트나 소품에 많이 집착했다. 그 과정에서 ‘더 테러 라이브’가 도움이 됐다. 다만 그때는 책상 앞에 묶여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번에는 제한된 앵글이지만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다. 움직일 수는 있어도 차 안이라는 제한된 상황과 앵글이기 때문에 아무리 연기를 다양하게 하더라도 지루해질 위험이 존재했다. 그래서 일단 그 안에서 어떻게든 자세와 위치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운전석에서 뒷자리로 이동하고, 엎드리거나 누워서도 해보고, 왼쪽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걸터앉기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웃음)

▶연기와 흥행을 보장하는 배우라는 점에서 예전보다 책임감과 부담감도 상당할 듯하다.

“송강호, 최민식 선배를 보고 연기 잘한다고 칭찬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그분들의 연기는 모두가 인정하는 경지에 올라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분들과 동급이라는 건 아니지만 이제 나도 그 외(연기)의 것들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감독님과의 미팅 때 참고할 만한 자료나 아이디어(의견)를 준비한다든지, 현장에선 다른 배우들과의 앙상블이나 조·단역배우들의 컨디션을 먼저 살피게 된다. 이젠 힘들어도 예전처럼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특히 연출을 병행하다 보니 배우의 존재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더라. 일단 감독의 위치에 서면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되게 신경 쓰인다. ‘허삼관 매혈기’ 찍을 때도 평소에는 스스럼없이 지내던 (이)경영, (조)진웅 형이 괜히 어렵고 눈치가 보이더라. 그래서 내가 배우로 임할 때는 일부러라도 다가가서 감독과 스태프를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자세도 더 낮춰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가대표2’와 같이 개봉했다. 당신이 전에 출연했던 ‘국가대표’의 속편이라는 점에서 느낌이 미묘할 것 같은데.

“2013년 때도 ‘더 테러 라이브’가 ‘설국열차’와 맞붙었다. 그때도 기분이 묘했다. 영화를 찍다 보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투자배급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가씨’가 CJ였다면 ‘터널’은 쇼박스이고, 촬영 중인 ‘신과 함께’는 롯데라 특별히 어느 한 곳만을 놓고 응원할 수 없다. 그냥 모두가 다 잘 되길 바랄 뿐이다. 다만 수애씨와는 예전 함께 출연했던 영화가 엎어진 일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크다. 나이가 들어 일일극이나 주말극에서 만나더라도 꼭 함께 해보고 싶다.”

▶당신의 연기 스타일을 말한다면.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매 작품 다르게 접근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어떤 스타일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건 진짜 어렵다. 연기는 금메달을 따고 경연대회를 하는 게 아니라 모두 자신과의 싸움이다. 평생을 해야 할 직업이라 계속 찾아가는 중이다. 다만 그렇게 계속 연마를 하고 나이를 잘 먹으면 설득력이 생기고 뭔가 내공이 채워질 테고 그러다 보면 나만의 연기 스타일과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주야장천 똑같은 이미지로 밀고 나가는 알파치노가 연기 스타일 면에선 나하고 맞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김현수 프리랜서 dada2450@hanmail.net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