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 .12] 문무를 겸비한 인재 김여물(金汝) 선조 10년(1577)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1위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6-08-25   |  발행일 2016-08-25 제13면   |  수정 2016-08-25
임진왜란 때 신립의 탄금대 배수진 반대…조령 방어선 구축 주장
20160825
김여물은 탄금대전투에서 신립과 함께 투신해 자결한다. 당시의 전황이 상세하게 기록된 선조수정실록.
20160825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여물은 서인의 영수 정철의 무리로 몰려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선조실록에는 당시 의주목사 김여물을 비롯한 임예신·김공휘 등 정철을 따른 인물들을 파직시킨다는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20160825
김여물의 과거급제 이력이 기록된 국조문과방목.


장원방에서 태어난 김여물(金汝·1548~92)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이름을 떨쳤다. 장원방은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옛 영봉리를 말하며,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를 일컫는다. 김여물이 장원방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버지 김훈(金壎)이 선산 망장촌(網障村, 지금의 구미시 고아읍 대망리)에 장가를 들면서다. 이후 김훈은 장원방으로 불리는 영봉리로 이사해 정착했다. 아버지 김훈이 영봉리에 정착한 후 김여물이 태어났다. 김여물이 태어난 시기에는 장원방의 명성은 예전만 못했다. 세조대에 하위지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면서 과거급제 소식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조선초기 인재향’이라는 명성도 역사 속에 묻히는 듯했다. 그렇다고 장원방의 학풍이 뿌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비록 중앙무대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학문을 숭상하는 전통과 정신적 가치는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장원방의 옛 영광을 재현한 이가 바로 김여물이었다. 그는 1577년(선조 10)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에서 당당히 장원을 차지하며 장원방의 또 다른 인재로 기록됐다. 벼슬길에 오른 김여물은 한때 정철을 따른 무리로 몰려 파직을 당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시 발탁되어 전장에 나아갔다. 이후 충주 방어에 나섰다가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투신해 순국했다.

#1. 이립(而立)에 장원의 꿈을 이루다

공자가 논어에서 그의 나이 30세에 뜻을 세웠다고 한 이후로, 서른 살을 가리켜 이립(而立)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 서른에 장원급제한 김여물은 현실적으로 이립을 이룬 셈이었다.

1577년(선조 10) 9월9일, 알성시(謁聖試) 정축10년알성방(丁丑十年謁聖榜)이 실시됐다. 알성시는 임금이 문묘(文廟)에 가서 제례를 올린 뒤,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우수자 몇 명을 선발하는 비정규 시험이었다. 잡과 없이 문과와 무과만 치렀으며, 문과의 경우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를 생략하고 전시(殿試)만으로 급제자를 선발했다. 왕이 친히 참가해 지켜본다고 해서 친림시(親臨試), 시간을 짧게 준다고 해서 촉각시(燭刻試)라고도 했다. 게다가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했기 때문에 시험관인 시관(試官)의 수가 다른 시험에 비해 많았다.

스무 살이 되던 1567년(선조 즉위년)에 정묘식년시(丁卯式年試) 소과에 합격해 생원이 된 김여물도 성균관 명륜당(明倫堂)에서 시험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 유생들 사이로 담담함을 가장한 긴장감이 조심조심 흘러다녔다. 곧이어 임금이 거둥했다. 이십대 중반의 젊은 지존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임금이 신호를 보내자, 시험 주제로 ‘송팽사영청물내강관자(宋彭思永請勿內降官資)’가 제시됐다. 답안이 기민하게 작성되었음은 물론, 합격자 발표도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총 15명이 선발된 가운데 김여물이 갑과(甲科) 장원이었다. 영봉리에서 또 한명의 인물이 배출된 것이었다.

병서부터 궁마술까지 문무 통달
서른에 급제…장원방 영광 재현

붕당정치 휘말려 파직 당했지만
왜란 발발하자 류성룡이 재발탁
신립 뜻 못 꺾고 탄금대서 순국

광해군, 충절기리며 정문내리고
정조 때 영의정 추증…시호 받아


#2. 법도에 얽매이는 것이 불편한 사내

김여물은 이미 고향인 선산 영봉리(장원방)에서 유명한 인재였다. 정주목사(定州牧使) 김수렴(金粹濂)의 손자이면서, 부사(府使) 강의(康)의 외손이자,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종6품 외관직) 김훈(金壎)의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수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무(武) 쪽으로는 병서와 같은 이론에서 실제 무예인 궁마술(弓馬術)에 이르기까지, 그 통달함이 깊었다.

따라서 김여물이 장원급제했을 때 영봉리는 꽤 흥분했지만, 김여물이 워낙 구속받는 것을 싫어한 탓에 벼슬이 당상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조·예조·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정랑(正郞)에 승진했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또 충주도사(忠州都事)와 담양부사(潭陽府使) 등 여러 지역의 목민관으로서 그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다했다. 그러던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을 때 김여물에게 변고가 닥치고 말았다.

당시는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인과 동인 간에 반목이 심한 때였다. 그 와중, 원래는 서인이었다가 집권세력인 동인으로 갈아탄 정여립(鄭汝立)이 역모를 일으켰다는 고변을 받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鄭澈)이 동인 세력을 철저하게 추방해버렸다. 권력의 축이 자연스럽게 서인으로 기울어졌음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서인의 득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철이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얻어 유배형에 처해진 탓이었다.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예민함이 익히 알려진 일이었던 만큼, 정철의 행동은 그야말로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일에 김여물이 엮여들었다. 정철의 무리로 몰린 것이다. 결국 김여물은 1591년 9월, 정철을 종처럼 섬긴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파직되었고 곧 의금부에 갇혔다.



#3. 서애 류성룡과 신립이 인정한 인재

하지만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달라졌다. 군직(軍職)의 최고 우두머리인 도체찰사(都體察使) 류성룡(柳成龍)이 김여물을 옥에서 풀어준 것이다. 그해 4월13일 왜군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이후로, 14일 부산성 전투와 15일 동래성 전투 등에서 조선의 군대가 연일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류성룡은 군사적 책략에 밝은 김여물을 중히 쓰기 위해 자신 곁에 두려했다. 그런데 막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된 신립(申砬)이 간곡히 청을 넣었다. 그 또한 김여물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김여물의 재능과 용기가 뛰어나고 그 성정이 충의로우니, 저의 종사관으로 임명해주소서.”

신립은 북방에서 큰 공을 세운 적이 있어, 왜적에 대해서도 크게 활약할 것이라고 선조와 조정이 기대하는 인물이었다. 이에 신립을 격려하는 마음에서 흔쾌히 허락하였다. 이로써 김여물은 신립과 함께 출전하게 됐다.



#4. 탄금대 전투의 한(恨)

4월24일, 김여물은 신립과 더불어 충주 단월역(丹月驛)에 도착해 군사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신립은 김여물과 일부 병사를 이끌고 곧장 조령(鳥嶺)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폈다. 그런데 먼저 출전했던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패한 채 돌아왔다. 그런데 이일의 설명이 참으로 심난했다.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백성으로 대항하기에는 적의 수준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신립은 군사가 주둔해 있는 충주로 돌아가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의 진을 칠 것을 명령했다. 이에 김여물이 강력하게 반대하며 나섰다.

“아니 될 말입니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오로지 지형이 험한 이곳 조령뿐입니다. 아니면 평지보다 높은 언덕을 이용해 역습해야 합니다.”

하지만 신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곳 조령에서는 기병을 쓸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적은 보병이고 아군은 기병이니 들판에서의 전투가 유리할 뿐만 아니라, 훈련이 미숙한 아군 병력에게는 배수진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신립의 판단도 일리는 있었다. 결국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이때, 김여물은 이 싸움에서 패할 것을 직감하고 아들 김류(金)에게 편지로 유언을 남겼다.

“삼도(三道)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나 응하는 자가 없구나.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안타깝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으나,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웅대한 뜻이 재가 될 뿐이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아울러 다른 가족에게도 경계의 뜻을 전했다.

“나는 여기서 죽을 터이니 모든 가족은 행재소(行在所·궁을 떠난 임금이 머무르는 곳)로 가서 도우라. 결코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한편, 그새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다다른 왜군은 다음날인 4월28일 새벽, 부대를 나누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진은 충주성에 돌입하고, 좌군은 달천 강변으로 숨어 내려가며, 우군은 산을 통해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너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김여물과 신립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정탐을 나갔던 충주목사 이종장(李宗長)과 순변사 이일이 적군에게 차단된 탓이었다. 따라서 군대의 전열을 채 가다듬지 못하고 있던 아군은 왜군의 공세에 밀려 크게 패하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쉽사리 포기해버릴 김여물이 아니었다. 탄금대(彈琴臺)에서 신립과 함께 적병 수십명을 사살하며 끝까지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한계가 다가왔고, 그들은 자결을 선택했다. 김여물은 상관이었던 신립이 탄금대로 투신하는 것을 예를 갖춰 지켜본 후, 본인도 뛰어들었다. 김여물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충주목사 이종장과 같은 종사관이었던 박안민(朴安民)이 따랐다. 이로써 왜군은 충주성에 무혈 입성하였고, 임금은 평안도로 피란을 떠나게 되었다.



#5. 길이 기려지는 충절

김여물이 탄금대에서 순국하고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안산(安山)에서 허장(虛葬)이 치러졌다. 오랫동안 생사를 모르거나 시신을 찾지 못하는 경우, 옷가지나 유품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을 허장이라 이른다. 따라서 이는 결국 김여물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김여물은 이승에서의 연을 마무리지었다.

하지만 그의 공은 두고두고 기려졌다. 광해군이 재위 초기에 정려(旌閭), 즉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내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비록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의 업적들이 엎어지던 가운데 없던 일이 되기는 했지만, 다행히 1639년(인조 17)에 김여물의 아들 김류가 청해 다시 회복됐다. 이후 1784년(정조 8)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데 이어, 1788년(정조 12)에는 장의(壯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덧붙여, 아버지의 죽음에 한이 깊었던 아들 김류의 이야기가 마음에 아프다. 1642년(인조 20), 조선을 찾아온 일본사신이 본국의 새로 지은 사당에 두겠다며 시문(詩文)을 청하였을 때의 일이다. 인조가 글을 지을 자 중의 하나로 자신을 거명하자, 왜란으로 아버지가 죽었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끝내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선산의 맥락,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공동기획:구미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