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표성흠의 캄보디아 편지] 왓 시엥 통의 생명의 나무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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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8-26   |  발행일 2016-08-26 제39면   |  수정 2016-08-26
사원 외벽엔 보석·황금 빼곡 박힌 ‘생명의 나무’
20160826
왓 시엥 통 외벽에 황금빛으로 치장된 생명의 나무는 언뜻 에덴동산의 사과나무를 연상시킨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과도 유사한 구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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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행해지는 탁발 광경. 아낙네들은 매일 길거리에서 탁발을 청하는 승려를 위해 기꺼이 공양 올리는 걸 큰 복으로 여긴다.

1560년 왕실사원으로 세워진 건물
황금부처 33구와 화려한 안팎 장식
클림트 作 ‘키스’와 이미지 오버랩

중앙 커다란 나무와 주위 짐승·사람
모자이크 벽화 속 이미지 뜯어보면
닮은 듯 다른 佛·힌두교 우주론 보여

라오스 북부 메콩강변에 루앙프라방이 있다.

동남아 최고의 샹그릴라로 불리는 곳이다. 티베트 고원으로부터 급하게 흘러내려오던 강물이 이쯤에서는 완만한 유속을 보이며 한층 드넓어진다. 풍부한 모천에 합류하기 위해 남칸강이 흘러들며 마치 엄지손가락을 세워놓은 듯 묘한 지형을 만들어냈다. 이 천혜의 반도를 배경으로 33개의 금빛 불상들을 모신 ‘왓 시엥 통 사원’이 자리 잡는다. 본당의 벽에 보석으로 수놓은 ‘생명의 나무’라는 모자이크가 있다. 신령스럽고 고풍스러운 문화유산을 탐낸 프랑스인들이 이들 원주민을 억누르고 통치했던 흔적으로 프랑스식 건물들이 남아 있다.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건물이 고전과 현대를 융합시키는 데 일조를 해, 루앙프라방은 뒤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다.

왓 시엥 통은 엄지손톱에 해당하는 묘한 자리에 위치한다.

‘왓’은 사원을 뜻하는 단어이며 ‘시엥 통’은 ‘황금 도시’라는 뜻이다. ‘황금도시의 사원’이라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면 이곳에 그만큼 많은 황금이 있었다는 것인가. 동남아 여행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 경우 중 하나가 불상에다가 순금을 입히는 작업을 직접 목격하는 것인데, 이 사원 안에는 온전히 황금으로 만든 불상이 33구나 있다는 것이다. 저 남미의 잉카제국의 황금신화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잉카제국을 점령한 피사로는 숨겨놓은 황금을 전부 갖다 바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던 약속을 깨고 황금을 탈취한 뒤 왕을 죽여버려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그렇다면 이곳을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었던 프랑스 군인들은 황금을 도적질하지 않았을까? 불상의 진위도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왓 시엥 통의 벽에 부조된 조각그림인 생명의 나무는 진품이 아닐 것이라는 상상을 할 필요가 없다. 안내문이 밝히는 것처럼 그것들이 이 지역에서 나는 온갖 보석으로 조각되었다면 그걸 떼내고 다시 붙이는 수고를 하는 것보다는 현지에 가서 보석을 줍는 것이 더 쉬울 일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긴 동굴도 많고 폭포도 많고 빛나는 돌들도 많다. 인도의 타지마할 벽을 장식하고 있는 보석 중 일부는 라오스 산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클림트 그림 같은 생명의 나무

생명의 나무를 보면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먼저 떠오른다.

클림트의 그림은 유치원생에서부터 미술전문가들에 이르기까지 인구에 회자된 그림이다. 생명의 나무도 수많은 모사품은 물론 짝퉁 상품으로까지 판매되고 있다. 심지어 미술시험문제로도 출제되어 그 정답을 요구할 정도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졌다.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멍하니 서 있게 만드는 모자이크가 여기 있다. 도대체 이 나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를 이야기할 때 많은 평론가들은 에덴동산에 있던 사과나무를 예로 든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선악을 알게 하는 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부끄러움을 깨닫는다. 이를 본 신은 생명의 나무에 달린 영생의 열매를 또 따먹을까봐 이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다. 하여, 이 생명의 나무는 영생불사 열매를 맺는 나무로 해석이 된다. 그런데 그 생명의 나무와 여기 그려진 이 생명의 나무가 같은 나무일까? 그렇다면 아무래도 좀 이상해진다. 기독교식 사상을 가미한 클림트의 그림과 불교사상을 강조했을 이 사원벽화가 어떻게 동일한 주제를 담을 수 있는가. 불교나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생명의 나무는 ‘악시드 문디’를 형상화한 것이다. 우주의 축이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여 우주의 중심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우주의 중심은 신의 영역으로 축복받은 땅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서로 다른 사상을 바탕으로 그려진 두 그림에 나타난 표현형식은 어떤가?

구성이나 내용이 동일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같은 구석이 너무 많다. 이 모자이크 벽화를 찬찬히 뜯어보면 중앙에 커다란 나무를 그려놓고 그 아래위로 각종 짐승과 사람을 배치한다. 클림트의 그림 역시 나무 모양은 다르지만 구성과 배치는 거의 비슷하다. 예술작품에 있어 비슷한 것은 모방이라 하여 순수창작에서 도외시 된다. 그렇다면 클림트가 이 벽화조각을 모방했단 말인가. 이 벽화제작자가 클림트를 모방했단 말인가.

◆루앙프라방 건축양식

왓 시엥 통은 처마가 길고 화려한 전통적인 루앙프라방 건축양식의 신기원으로 평가받는다. 1560년 세타티랏 왕에 의해 왕실사원으로 건축된 건물이니만큼 본전의 벽화인 이 조각품이야말로 세월의 더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조각가가 클림트의 작품을 모방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런데 묘한 상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난다. 클림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키스’에 나오는 황금 옷이다. 연인인 에밀리에를 꼭 껴안고 키스를 하고 있는 이들을 온통 감싸고 있는 황금 옷은 어디에서 빌려온 것일까. 왜 이런 상상을 하는가. 왓 시엥 통의 화려한 내부 장식이나 온통 황금을 뒤집어 쓴 금부처들이 클림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한다. 흔히들 피카소의 그림을 두고 인디언 벽화나 조각과 연관짓기도 한다. 상응하는 영감의 예술세계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쾅시 폭포를 다녀 와 다시 이 생명의 나무를 보기 위해 왓 시엥 통에 와 앉았다. 라오스에 와서 처음 보았던 왓 푸 참파삭의 ‘생명의 물’과 왓 시엥 통에서의 생명의 나무 사이에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오늘은 많은 곳을 들르기보다는 이 주제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 싶다. 나 홀로 여행의 매력은 한 가지 주제를 심도있게 물고 늘어질 시간을 충분히 갖는 데 있다.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다. 결국 생명은 물에서 연원한다. 물이 없으면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 한 방울의 물이 산 위에 떨어져 굴러 내리다가 개울을 이루고 강이 되어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다시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린다. 이번에는 이 물방울이 어느 메마른 꽃나무 위에 떨어져 수액이 되었다가 다시 꽃과 열매로 환원됐다가 새들이나 들짐승, 혹은 사람의 양식이 된다. 이런 순환의 연속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다. 이 순환의 고리에서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생과 사 역시 이 윤회의 사슬에 다름 아니다. 이 사슬을 끊는 것이 해탈이다. 온갖 만상번뇌를 삭히며 오늘은 여기 생명의 나무 아래 앉아 쉬고 있다. 이 순간이 소중하지 않은가.

지금 나는 일어날 수가 없다. 좀 전에 올랐던 푸시산의 북동쪽에 왓 시푸파닷 티파람에 무엇이 있었던가. 거기 부처님의 발자국이 있다. 그 족적 위에 세운 사원이 왓 시푸타밧 티파람. 1395년 등장한 파야 삼센타이 왕조라 했으니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라 할 것이다. 동시대의 크메르제국에서도 부처님 발자국이 찍힌 족적 위에다가 세운 사원이 세 군데나 있다. 그 마지막 족적이 남겨진 곳이 프놈 쿨렌의 프레하 앙톰이다. 그 발자국 안에 시줏돈이 한가득 들어 있음을 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오늘 새벽 거리에서 탁발승의 큰 밥통에 밥을 퍼주던 보살님을 시장에서 다시 만났다. 그 아주머니의 좌판에는 생선과 뱀이 놓여있었다. 이 희한한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제 여행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나의 캄보디아 여행기의 여러 모티브는 현재 집필 중인 대하소설 나를 찾아 떠나는 깨달음, ‘직지(直指)’로 엮어질 것이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성찰로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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