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8] 홀로 산창에 기대니- 이황과 두향(上)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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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08   |  발행일 2016-09-08 제22면   |  수정 2016-09-22
밤비에 새잎 나거든
30년 나이 차 넘은 학자와 관기…단양팔경 노닐며 9개월 짧은 사랑
20160908
이황이 선정한 단양팔경 중 하나인 사인암(舍人巖). ‘사인(舍人)’은 사인 벼슬을 한 고려말 우탁 선생이 고향인 단양의 이곳을 좋아한 것을 기려 정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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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글씨 ‘복도별업(複道別業)’ 암각자. 이황이 단양군수 시절 ‘복도소(複道沼)’라는 저수지를 준공한 후 기념으로 직접 글씨를 써 부근 바위에 새기게 한 것이다.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 때/ 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두향(杜香)이 9개월 동안 모시던 퇴계(退溪) 이황(1501~70)과 이별할 때 지었다는 시다. 퇴계의 나이 48세, 관기인 두향의 나이는 18세 때 일이다. 이황이 지천명(知天命)이 가까운 나이에 만난 두향. 지혜롭고 재능이 뛰어난 그녀에게 이황은 차츰 마음을 주게 된다. 두향 역시 이황의 인품과 학문에 반해 연모와 존경의 마음이 절로 일었다. 역사적 사실 기록이 아니라 대부분 전해오는 내용인, 이황과 두향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 단양 군수와 관기의 만남

이황이 두향을 처음 만난 때는 그가 48세 때인 1548년 정월이다. 당시 이황은 단양 군수로 부임했고, 두향은 그 고을 관기로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30세나 차이가 있었지만, 곧 서로 끌리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취미가 있었던 것도 서로 좋아하게 된 원인이었다. 두향은 어린 나이지만 매화를 기르는 데 뛰어나고 거문고도 잘 탔다. 게다가 시도 잘 지었다.

이황은 어떤가. 대학자이자 빼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그는 특히 매화를 매우 사랑했고, 또 ‘금보가(琴譜歌)’를 쓰기도 할 만큼 음률에도 밝았다. 이황의 매화시 한 수를 보자.

‘뜰을 거니니 달이 나를 따라오네(步中庭月人)/ 매화 언저리 몇 번이나 돌았던고(梅邊行遼幾回巡)/ 밤 깊도록 앉아 일어나길 잊었더니(夜深坐久渾忘起)/ 꽃향기 옷 가득 스미고 그림자 몸에 가득하네(香滿衣巾影滿身)’

이런 두 사람이니 서로 마음이 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이황은 2년 전에 두 번째 부인과 사별한 뒤 홀아비 생활을 하던 때였다. 이황은 많은 것을 갖춘 두향의 매력에 빠져 들어갔다. 부임 1개월 만에 둘째 아들 채(寀)마저 잃고 마음 아파하던 때, 곁에 있던 두향은 이황에게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
두향의 지혜와 재능에 이끌려
사인암 등 절경 함께 찾아다녀
풍기군수 발령 나 영원한 이별



두향이 하루는 집에서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매화분 하나를 이황의 거처에 가져왔다. 이황이 매화를 각별히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두향은 10세 때 어머니가 죽는데, 어머니가 매화분 하나를 잘 길러 꽃을 피우고 있었다. 두향은 어머니가 사망한 후에도 매화분을 고이 잘 돌봤다. 기생이 되어 기적에 오를 때까지 어머니를 보듯이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그러면서 매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황이 단양 군수로 부임한 때가 마침 이른 봄이어서 매화가 꽃을 피워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고, 두향은 자신이 돌보던 매화분을 이황의 처소에 가져온 것이다.

이황은 매화분을 가져오자 처음에는 받을 수 없다며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두향이 매화분에 대한 사연과 매화의 성품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받아줄 것을 간청하자, 두향의 순수한 마음을 차마 물리칠 수 없어 받아들였다.

두향은 그 후 또 한 그루의 매화나무를 구해서 이황에게 가져와 처소에 심어두고 완상하기를 청했다. 희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보기 드문 청매화였다. 이황은 그 매화를 뜰에 심게 했다. 당시 두향이 선물한 매화나무를 보고 지은 것으로 보이는 이황의 시다.

‘홀로 산창에 기대니 밤기운 차가운데(獨倚山窓夜色寒)/ 매화나무 가지 끝에 둥근 달 걸렸구나(梅梢月上正團團)/ 구태여 소슬바람 다시 불러 무엇하리(不須更喚微風至)/ 맑은 향기 저절로 뜰에 가득한데(自有淸香滿院間)’

◆ 꿈같은 시간은 9개월로 끝나고

단양은 산간벽지이지만 산수가 빼어난 곳이다. 옛날부터 단양은 그곳에 부임해오는 관리들이 모두 ‘울며 왔다가 울며 간다’는 말이 전해온 고장이다. 올 때는 궁벽한 곳이어서 귀양 오는 듯한 마음이어서 울고, 갈 때는 아름다운 고장을 떠나야 하는 마음에 아쉬워 운다는 것이다.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상·중·하선암, 구담봉, 옥순봉 등 단양팔경을 비롯해 기암괴석과 옥류계곡이 곳곳에 널려있다. 단양팔경의 아름다움을 아껴 많은 이들이 그림으로도 남겼다.

이황은 두향과 함께 이런 절경들도 둘러보면서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다. 단양팔경은 이황이 당시 두향과 같이 다니면서 직접 이름을 정해 붙이며 선정한 것이라 한다.

단양팔경 중 옥순봉과 관련해 두향이 기지를 발휘한 일화가 전한다. 옥순봉 근처에서 태어나 자란 두향은 옥순봉이 단양 땅이 아니라 청풍 땅임을 아는지라, 이황에게 옥순봉의 관할이 청풍임을 알리면서 청풍군수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면 단양 땅으로 편입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당시 청풍군수는 아계(鵝溪) 이산해의 아버지 이지번이었다. 이황은 두향의 말에 따라 청풍군수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구한 결과, 옥순봉은 단양군 관할로 바뀌고 단양팔경에 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이황은 옥순봉 아래 석벽에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자신의 글씨를 새기게 해 단양의 관문임을 표시했다. 이 단구동문 암각은 안타깝게도 충주호 속에 잠겨있다. 현재 옥순봉은 제천에 속해 있다.

이황은 또한 단양이 물이 많은 고장임에도 가뭄 피해로 백성들이 굶주린다는 사실을 알고, 처음으로 물을 가두는 보를 쌓는 등 민생안정을 위해서도 애를 많이 썼다. 보의 이름은 복도소(複道沼)라고 했다. 이 보가 완공되었을 때 이황은 준공 기념으로 ‘복도별업(複道別業)’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써서 부근 바위에 새기게 했다. 이 각자 바위는 충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이황과 두향은 특히 남한강 가에 있는 강선대(降仙臺) 바위에 올라 종종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으며 노닐었다. 하지만 이황과 두향의 이런 꿈같은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을이 미처 다 가기도 전인 10월에 갑자기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닥친 것이다. 두 사람이 불과 9개월 만에 이별하게 된 것은 이황이 풍기군수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풍기군수 발령은 이황의 형인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오게 되면서 형제가 같은 지역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른 것이었다.

단양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 두 사람은 이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두향은 붓을 들어 서두에 소개한 시 한 수를 남기며 슬픈 마음을 달랬다. 이날 밤의 이별은 결국 영원한 이별이 되어 두 사람은 1570년 이황이 70세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생전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 이황과 두향은 이별한 후에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서신 왕래는 있었던 것 같다. 이황이 1552년에 지어 두향에게 보냈던 시다.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마주하고(黃卷中間對聖賢)/ 빈 방 안에 초연히 앉았노라(虛明一室坐超然)/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니(梅窓又見春消息)/ 거문고 줄 끊겼다 한탄하지 않으리(莫向瑤琴嘆絶絃)’

두향은 수시로 이 시를 거문고 가락에 실어 노래하며 이황에 대한 연모의 정을 달랬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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