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김영란법 언론을 誤 조준하다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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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23   |  발행일 2016-09-23 제23면   |  수정 2016-09-23
[조정래 칼럼] 김영란법 언론을 誤 조준하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김영란법에 언론인이 왜 포함됐나. 우리 언론이 ‘따’를 당하는 게 정당한지 두고두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을 변호한다는 게 쑥스럽고 오해의 소지도 없지 않다. 언론 이기주의라는 비판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더 비겁하고 두고두고 후회를 부를 것 같아 낯 두껍다는 비난마저 감내할 작정으로 한소리 하려 한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 후보자는 기자와 김영란법의 관계에 대한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이 전 후보자는 “김영란법에 기자들이 초비상이거든. 안 되겠어, 통과시켜야지. 진짜로. 내가 막고 있는 거 알고 있잖아. 그치? 욕 먹어가면서. 통과시켜서, 여러분들도 한 번 보지도 못한 친척들 때문에 검경에 붙잡혀가서. 당신 말이야… 당해봐. 지금까지 내가 공개적으로 막아줬는데 이제 안 막아줘. 지들 아마 검경에 불려 다니면 막 소리 지를 거야.”

언론사의 김영란법 포함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 법을 두호하는 언론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반면 비판적인 소리는 잦아드는 추세다. 언론계 안팎의 그릇된 관행을 바로잡자는 김영란법의 취지와 목적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불가역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언론을 표적으로 삼은 김영란법은 정의롭지 못하다. 나는 욕을 들어먹고, 구정물을 뒤집어쓴다고 해도 김영란법을 온전히 수용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입법 의도와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 어쩌다가 언론인들이 ‘공공의 적’이 됐는지, 특히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에게 미운털이 박혔는지 새삼 내 얼굴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게 된다. 이 전 후보의 막말에 도사리고 있는 앙금처럼 국회의원과 언론인 사이, 두 직역 간 특수한 감정과 갈등이 개입되고 증폭되며 언론에 대한 부정적 여론으로 전이·확산된다면, 그래서 SNS와 인터넷에 원색적 비난 일색으로 유포된다면 그것은 분명한 마녀사냥이다. ‘키보드 전사’들이 두드려대는 자판에는 균형이 자리할 공간이 있을 수 없고, 김영란법의 핵심에 언론인이 올라앉은 건 본말전도다. 김영란법이 언론인 망신 주기와 족쇄 채우기로 기획되지 않았다면 타깃 설정이 잘못 됐다.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원이 어떻게 공직자의 범주에 드나. 법은, 특히 문자로 적시하는 성문법은 정교하고 치밀해야 한다. 김영란법은 검찰에서 ‘스폰서 검사’와 ‘벤츠검사’ 사건이 대가성 입증 실패로 무죄로 선고되자 금품을 받는 그 자체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검찰과 같은 이유로 언론인도, 사립학교 교원도 청렴성을 요구받을 수 있고 그래야 할 필요성이 크다면 두루뭉술하게 김영란법에 집어넣을 게 아니라 새로운 법으로 규제를 받게 하면 된다. 이대로는 통상의 사기업적 활동 제약은 물론 언론인 개인의 권익·법익 침해가 자행될 게 뻔하다.

언론인의 ‘직무 관련성’은 무한대다. 법 적용의 포괄성과 자의성은 법적 합목적성과 안정성을 해친다. 기자가 접하는 취재원은 거리의 노숙인부터 대통령까지라고 한다. 한도 없는 규제는 실효성과 적실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거의 모두 다를 망라하려다가 모두 다를 놓칠 위험도 높다. 김영란법이 우리 사회 상규와 통념, 그리고 현실과 맞지 않아 사문화된 법들의 전철을 밟으리라는 예단마저 나온다.

‘언론=부패’라는 등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나마 언론이 상대적인 염결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해명은 궁색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정의의 불길은 감성적으로 타오르더라도 법의 온도는 냉철해야 한다. 밉다고 해서든 혹은 일도양단의 극약처방을 위해서든 그 어떤 이유로든 사적인 인간관계까지 법으로 규제하려는 것은 전체주의 극좌파적 발상과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 가정의례준칙이 울타리를 넘어왔는지, 무슨 놈의 법이 사기업의 영업활동과 내밀한 관계까지 감시하고 처벌하려 하나. 인간의 진보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법이 인간 위에 서고 인간성을 범접하는 진보라면 나는 결단코 진보를 포기한다. 법의 과잉과 법의 무위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게 법가의 교훈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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