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같은 커피, 지옥인 커피사업…브랜드에 최면 걸린 현실 가슴 아파”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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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23   |  발행일 2016-09-23 제39면   |  수정 2016-09-23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대구 커피시장 현주소 (하) 커피명가 안명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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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규 대표는 2천여개의 커피 묘목을 소장하고 있다. 또한 브라질에 방치된 대형 커피선별기를 수송비 1억원을 들여 라 핀카 창고까지 끌고 왔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생두보관창고에서 음악회를 여는 것도 그만의 커피사랑법(위에서부터 아래방향).

‘커피는 느낌이자 문화’ 20여년 신념
대한민국 원두커피 역사의 산증인

1990년 오픈후 대구 커피문화 주도
공연하는 커피숍과 특색있는 체인점
‘공장표 커피명가’소리 듣지 않으려
로스팅 머신 개발·생두 산지 직구까지

“그냥 괜찮아 보여 너도나도 커피숍
흑자 0.1%도 안돼…공멸할까 걱정”


커피에 대한 최초 기록은 유길준의 ‘서유견문록’(1885년)에 등장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우리가 숭늉 마시듯 서양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고 소개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커피마니아는 고종. 1885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 맛을 보고, 궁으로 돌아온 후 ‘정관헌’에서도 커피를 즐겨마셨다.

인스턴트 커피는 1901년 미국에서 일본인 화학자 사토리 가토에 의해 처음 발명되었고 1938년 스위스 네슬레가 ‘네스카페(Nescafe)’란 이름으로 상품화하면서 인스턴트 커피의 대명사가 된다.

1970년대는 우리나라 인스턴트 커피의 시대. 동서식품은 ‘맥스웰 하우스’를 시작으로 커피시장을 장악한다. 76년에는 커피 역사상 획기적인 발명품인 ‘커피믹스’가 등장한다. 78년 커피 자동판매기가 첫선을 보인다. 80년대는 원두커피의 태동기. 99년 이화여대 앞 스타벅스 1호점이 개점하게 된다. 2000년 중후반부터 대기업발 커피 프랜차이즈 시대가 개막된다.

이런 흐름 가운데 1990년 보수적인 대구에서 ‘대한민국 원두커피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성장한 ‘커피명가’가 태동했다는 건 아주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다. 커피명가 안명규 대표를 만나 우리나라와 대구 커피 시장의 흐름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커피명가를 이끄는 안명규

안명규. 한때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커피마니아로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다. 경북대 북문 언저리를 기반으로 1990년에 오픈된 커피명가. 91년 커피에 공연을 결부시키고, 실내금연 원칙까지 고수했다.

커피명가는 트로트판에 등장한 재즈 같았다. 92년 삼덕1가로 이전한 본점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다. 이후 커피명가의 행보는 한국 커피산업의 신기원이다시피 했다. 92년 자가로스팅을 필두로 95년에는 커피숍으로서는 처음으로 홈페이지를 구축했다. 97년에는 로스팅 머신 개발, 2001년에는 바리스타 교육시스템, 2002년에는 생두를 산지에서 직구(직접구입)한다. 2003년에는 컨설팅 시스템을 구축하고 2007년부터 프랜차이즈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커피명가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기 시작한다. 사업가 안명규를 비판하는 흐름이 동반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장표 커피명가’란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적잖은 고심을 했을 것이다. 자본을 좇는 게 사업가의 기본이지만 그는 맹목적으로 좇는다는 비난을 받기 싫었다. 포드시스템 같은 소품종 다량생산 채널 속에서는 필연코 ‘질적 하향 평균화’란 덫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모든 체인점이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인테리어, 상호 등을 자율적으로 운용케 했다.

그에겐 사장, 대표, CEO 등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냥 안명규가 제일 안정감이 있다. 그는 대뜸 커피는 천국 같지만 커피사업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대단히 수익성 있고 화려해 보이지만 맹목적으로 팽창일변도인 커피시장이 절벽으로 내몰려 공멸할 수 있다”고 그는 전망했다.

지난 10여년 국내 커피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사이 초창기 작품 같던 원두커피는 상품으로 추락해버렸다. 그는 작품적 커피와 상품적 커피의 허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국내 젊은 소비자들이 브랜드 커피에 최면이 걸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도 가슴 아파했다.

그는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커피숍은 어찌어찌 살지 모르겠지만 개념도 없이 그냥 괜찮아 보여서 청년 백수 돌파구용으로 선택한 커피숍은 조만간 거의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예전 커피숍은 문화적이고 여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소비적이고 소모적이고 경쟁적이고 커피가 커피 자신을 돌봐줄 겨를이 없다”면서 “너도나도 커피숍이니 이제 누가 나서 영화쿼터제처럼 커피숍 진입장벽을 깔아야 할 판”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지금 커피시장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으며 투자 대비 흑자 구조를 가진 커피숍은 채 0.1%도 안 된다”고 진단했다. “수요에 비해 너무나 많은 커피숍이 투하됐다”고 분석했다. “20대 커피숍 사장의 자본은 거의 부모의 자본이고, 그 자본이 무너지면 실버세대의 재앙으로 이어지는데 그 주범이 자꾸 커피숍인 것 같아 가슴 아프다”고 고백했다.

◆커피뮤지엄 같은 ‘라 핀카’

한국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커피나무. 그래서 영원히 수입에만 의존해야 하는 생두. 하지만 그는 한반도에서도 해외 현지의 커피문화를 간접체험할 수 있는 ‘커피뮤지엄’ 같은 걸 구축하고 싶었다. 그 꿈의 일단이 수성구 만촌동에 들어선 ‘라 핀카(La Finca·스페인어로 ‘농장’이란 뜻)’로 영글었다. 거기서 그를 만났다.

5년 전에 오픈된 라 핀카는 안명규를 위한 커피뮤지엄 같은 곳이었다. 91년부터 그는 국내에서는 희소성이 있는 커피묘목을 확보하기 시작한다. 현재 라 핀카에는 2천여개의 커피묘목이 자라고 있다. 그 옆에는 로스팅룸과 공연장을 겸한 생두창고가 있다. 그 내부는 꼭 어린왕자가 살아가는 ‘소행성 B612’ 같다. 그는 여기서 커피향을 맡으며 인터스텔라의 우주인처럼 유영한다.

그가 귀중한 소장품을 보여준다. 1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세상에 몇 대 없는 브라질 현지에서 사용하다 방치된 커피선별기다. 그가 보물이다 싶어 수송료만 무려 1억원 들여 갖고 왔다. 커피명가는 현재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 10여개국 20여 품종을 직접 구입한다. 워낙 많은 수량을 직구한 때문에 커피명가란 상호가 찍힌 포대까지 갖게 됐다. 커피콩도 숙성과정을 거치면 더 좋은 풍미를 가질까. 그게 궁금해 2002년부터 인도네시아 커피 등을 18℃에서 숙성시키고 있다. 현재 나라별로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커피명가 초창기 국내 원두커피 문화는 인스턴트 수준이었다.

“기존 커피문화에 항명하고 싶었다. 내가 추구하는 커피는 일종의 클래식이었다. 클래식이 나쁜 건 아니다. 덜 익숙한 것일 뿐. 그래서 익숙해질 때까지 손님들에게 지속적으로 커피의 본질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욕구와 열정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 같다.”

그는 커피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갔다. 그는 살아있는 커피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커피숍 안에 화초도 들였고 음반에서 나오는 음악 대신 실제 공연을 보여주었다. 그는 커피는 마심이 아니고 ‘느낌’, 그래서 식품이 아니고 ‘문화’라고 믿었다. 커피숍 음악회는 바로 그 일환이었다.

90년대 중반까지는 줄기차게 어떻게 하면 좋은 원두를 추출할 수 있는가에만 치중했다. 2000년까지 연구 과제는 ‘불’이었다. 90년 그는 북성로 기술자한테 부탁해서 자작 로스터를 만든다. 국내에선 첫 흐름이니 배울 데도 없었다. 88년 커피 공부를 해보려고 시내 학원서림을 찾아 커피 관련 책을 찾아 적어봤는데 A4 한 장 분량도 안 됐다. 커피의 선진국인 일본을 벤치마킹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베의 한 커피기기 공장을 10번 이상 찾아가 로스팅 기기 제작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때 만든 자작 로스터가 지금 생두창고 안에 있다.

그는 이후 방대한 커피 관련 사진, 서적, 자료 등을 활용해 서울 시장 개척에 나선다. 대구에는 2일, 나머지 5일은 서울에서 머물렀다. 그 덕분에 2009년 한국스페셜티커피협회(SCAK) 초대회장이 된다. 커피와 관련해 물과 불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면서 점차 그의 화두는 ‘커피 직구’로 이동한다.

“커피를 구성하는 3대 요소는 생두·로스팅·추출이다. 이 요소를 좌우하는 건 땅·불·물이다. 불과 물에 대한 건 대충 정리가 됐는데 마지막은 현지 커피 공부였다.”

2002년 인도네시아를 필두로 2004년 중남미 커피벨트 순례에 나선다. 당시 우리 실정으로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덕분에 세계적 선풍을 일으킨 파나마 에스메랄드 농장과 과테말라 인헤리토 커피 등에 대한 직구 수입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커피에 대한 여러 선택지를 고루 체험하면서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이 뭔가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할수록 커피와 관련해 과장된 언사가 난무할 수밖에 없다.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그 심정을 잘 안다.”

그는 해외로부터 생두를 직접 구매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말했다. 60%의 장점과 40%의 허실이 있다고 했다.

“사실 나도 이런저런 라인을 통해 직구하지만 와인에 대한 모든 걸 알 수 없듯 커피도 마찬가지다. 모든 커피를 다 알 수가 없다. 해마다 기후조건도 다르고, 품종도 무궁무진하다. 결국 자기가 알고 싶은 것만 알다가 죽는 것이다.”

그는 얼추 30년 커피와 관련된 A부터 Z까지의 변수를 훑어간 것 같다. 그런 그가 요즘 “도대체 커피가 뭔데”란 탄식 같은 푸념을 하게 된다고 고백한다. 시쳇말로 커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란 생각에 닿았단다. 한때 ‘커피지상주의’가 일종의 편애였고 커피에 대한 배려가 일종의 ‘독선’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단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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