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프레퍼족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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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9-27   |  발행일 2016-09-27 제31면   |  수정 2016-09-27

재난과 사고가 닥칠 것을 우려해 일상생활 중에서도 생존을 위해 스스로 대비하는 사람들을 흔히 프레퍼(Prepper)족이라 일컫는다. 여기서 말하는 재난에는 지진이나 화산폭발, 태풍, 쓰나미, 지구온난화 등 자연재해뿐 아니라 테러, 전쟁, 대형사고, 전염병 확산 등도 포함된다. 프레퍼족은 종말론 확산과 함께 경제 대공황이 시작된 1929년 전후 미국과 영국에 처음 등장했다. 냉전시기였던 1950~60년대는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면서 일부에서 대피시설을 짓거나 식량을 비축했다. 그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Y2K(밀레니엄버그)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이 비상식량과 비상용품을 준비하기도 했다.

국내 프레퍼족도 세월호 사고, 북한 핵위협, 각종 전염병 확산 등 사건·사고가 이어지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비상시에 대비해 비상식량, 구급약, 손전등, 생수, 방독면, 라이터, 나침반 등을 담은 생존팩(EDC)을 손이 닿기 쉬운 곳에 항상 준비해 둔다. 평소에도 건물로 들어갈 때는 비상탈출 경로를 미리 확인하는 등 재난에 철저히 대비한다. 또 SNS나 인터넷 카페를 통해 사고 경험과 대처방법을 공유하고 새로운 재난대비 용품이 나오면 성능 검증을 거쳐 공동구매를 한다.

특히 최근 경주 지진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자 프레퍼족 대열에 동참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이는 지금까지 일본의 지진이나 동남아 쓰나미 참사를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기다 ‘내게도 닥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급속히 확산된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지진 이후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헬멧, 전투식량 등 비상용품과 ‘생존가방’ 주문이 급증했다는 소식이다.

전문가들은 프레퍼족의 심리 기저에는 믿음보다 불신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고 진단한다. 강진이 발생해도 조기경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매뉴얼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국가 비상대응체계의 민낯이 드러나면서 나와 가족의 안전은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정부도 전문가도 못 믿으니 각자도생(各自圖生)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이 투영된 결과다. 이처럼 프레퍼족 확산에는 불안 심리가 반영돼 있지만 재난과 위험에 능동적으로 발 빠르게 대처하는 자세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재난과 사고는 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닥친다는 점에서 이들의 유비무환 정신만은 모두가 본받았으면 한다. 배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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