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틀녘 불갑사 상사화, 해질녘 백수해안길 노을에 설레던 발길…

동틀 무렵 불갑사 상사화 사진촬영은 일종의 ‘기도’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드라이브 코스이자 가장 드라마틱한 ‘해넘이’ 명소로 유명한 백수해안드라이브 코스. 노을전망대에 올라가면 예전 조기의 황금어장이었던 칠산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컵라면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첫 동살이 꽃무릇에 도달하는 장면을 위해 카메라를 가슴에 품고 군락지 주변을 일렁거렸다. 조금 있으니 어두컴컴함이 희붐한 기운에 압도되기 시작한다. 죽음과 삶의 기운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천사의 옷깃 같은 동살이 조개의 관자처럼 은연 중에 암청빛 숲속의 깜깜한 기운을 걷어내고 있었다. 어둠에 밀봉돼 있던 자잘한 꽃잎들이 또렷하게 인지되기 시작했다. 함께한 사진가들도 일제히 꽃무릇을 향해 정조준한다. 동편이 훤해지자 상사화는 마법에서 풀려난다. 선계에서 속계로 풀려나왔다.

신비의 순간도 순식간에 휙 지나가버린다. 빛이 푸짐해지자 상사화는 관광객용으로 퇴각한다.

역시 수선화과의 내공은 상당했다. 설중매보다 더 서둘러 제주도 수선화가 1월에 초봄의 전령사가 되듯, 수선화과 상사화 역시 초가을의 전령사로 자릴 잡았다.

한국 자생식물 85% 이상 자라는 불갑산
불갑사 일주문 주변서 구수재까지 3㎞
꽃이 져야 푸른 잎이 피는 상사화 군락

절 입구엔 ‘귀향못한’ 불갑산 호랑이像
부처 옆모습 보이는 구조 대웅전 특이

일몰 땐 9景에 꼽히는 백수해안도로
위도∼흑산도 수십개 섬 파노라마처럼
16.8㎞ 걸쳐 동해안 뺨치는 광막한 풍광

◆호랑이 품은 불갑산 상사화

불갑사 일주문 주변에서 불갑산 동백골 끝자락 구수재까지 3㎞. 상사화가 지천에 널려 있다. 상사화 군락지는 크게 절 입구에서 정상부로 향하면서 일주문 주변, 불갑사 저수지, 동백골 등 3섹터로 짜여있다.

불갑산은 자연식생의 보고이기도 하다. 한국 자생식물의 85% 이상이 불갑산에 자생한다. 불갑산은 온대림과 난대림이 교차하는 접점. 그렇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식생대를 간직하게 된 것이다. 참나리와 맥문동, 영광 명물인 모시미까지 군락을 이뤄 자태를 뽐낸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싱아 군락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불갑사 절 입구 상사화는 인위적으로 조성돼 운치는 상상만큼은 되지 않았다. 자생하는 상사화의 자태는 관광객의 발길이 상대적으로 덜한 불갑사저수지~동백골로 가야 만끽할 수 있다.

명성답게 축제가 끝났지만 뒤늦게 불갑사 상사화를 보려는 사람이 평일 오후인데도 북적댄다. 화단을 짓밟는 관광객, 오직 사진 촬영에만 혈안이 된 사진작가, 밖에는 먹거리판…. 불갑사 상사화의 성스러운 자태가 너무 추레해진다는 기분을 씻어낼 수가 없었다. 만당 불갑사 주지도 격조 있는 상사화 축제를 꿈꾼다.

상사화가 피면 불갑사 경내는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그 안에 볼 만한 게 있다. 관광객이 상사화에 한눈 파는 바람에 놓치는 유물이 있다. 보물 제830호인 불갑사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고 부처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정문을 열면 부처의 옆모습이 보인다. 이런 구도는 이 대웅전이 유일하다.

상사화 촬영을 끝내고 일주문 쪽으로 내려오다가 희한한 조형물을 하나 보게 됐다. 호랑이다. 상사화 군락지에 웬 호랑이? 영광문화원 등을 통해 불갑산과 호랑이의 함수관계를 얼추 풀 수 있었다.

현재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박제로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한국호랑이의 고향은 불갑산이었다. 불갑산 호랑이가 목포 유달초등에 가죽으로만 남게 된 사연은 슬프다. 1908년 2월 불갑산 북쪽 능선 덫고개 기슭에서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농민들이 창으로 찔러 죽인 다음 호랑이를 들쳐 메고 며칠을 걸어 부유한 일본인이 많은 목포로 갔다. 일본 상인 하라구치 쇼지로가 이 호랑이를 구입했다. 쇼지로는 호랑이를 박제로 만들어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유달초등에 기증했단다. 영광군청에서는 2008년 불갑산 호랑이 포획 100주년을 맞아 유달초등에 전시된 박제를 가져오려 했으나 유달초등의 반대로 무산됐다. 2009년에 박제 대신 불갑사 입구에 호랑이상을 제작했다.

◆백수해안도로와 설도젓갈

2013년 비로소 영광의 관광 인프라가 구축된다.

볼거리(9景)·먹거리(9味)·살거리(9品)를 전국민 설문조사를 거쳐 최종 선정했다. 9경은 백수해안도로·백제불교최초도래지·가마미해수욕장·불갑사·불갑수변공원·숲쟁이공원·천일염전·불갑산상사화·송이도. 9미는 굴비한정식·간장게장·황금보리돼지·보리새우·덕자찜·황토갯벌장어·청보리한우·보리떡(빵)·백합. 9품은 영광굴비·모싯잎송편·천일염·대마할머니막걸리·간척지쌀·태청딸기·태양초고추·찰보리쌀·설도젓갈이다.

노을이 가장 아름다운 해안은 어딜까. 이번에 둘러보고나서 백수해안도로라는 직감이 들었다. 2006년 전국 1위 코스로 선정된 바 있다. 해넘이 명소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세상 조기들이 다 모여들었다는 전남 영광의 칠산 앞바다를 발치에 두고 있는 16.8㎞ 백수해안도로는 서해답지 않게 ‘광막한 미학’을 갖고 있다. 스산하지도 촌스럽지도 않다. 비행조종사의 눈높이에서 풍광을 즐길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법성포에서 영광대교를 지나면 두 개의 동백섬이 나온다. 그 섬을 벗어나야 바다로 접어든다. 위도부터 흑산도까지 수십개의 섬이 좌우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벽공을 배경으로 한 탁도가 감도는 회백색 바다 앞에 섰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공연했던 맨해튼 센트럴파크 잔디밭처럼 보였다.

일망무제의 느낌을 더 갖고 싶다면 칠산타워에 올라가야 된다. 높이가 111m로 전남에 세워진 전망대 중 가장 높다.

사람들은 굴비를 운운하지만 상당수 조리사는 ‘설도젓갈’에 더 눈독을 들인다. 강경, 곰소, 광천, 목포 등의 젓갈도 유명하지만 김장철 새우젓갈을 찾는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영광표 설도젓갈을 지목한다.

얼마나 소금이 풍부했으면 지명까지 ‘염산(鹽山)’일까. 염산면 설도항 젓갈은 칠산 새우와 근처 천일염인 염산소금이 만나 상사화처럼 벙글어진다. 염산이 이처럼 젓갈로 유명한 이유는 인근에 칠산어장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염산면과 백수읍 염전에서 천일염이 나는데 특이하게 바닥재를 기존 장판 대신 도자기판을 사용한다. 무려 1천4개의 섬을 가진 신안군이 친환경 장판을 염전에 깐 것과 비슷하다.

설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소금과 젓갈로 이름을 날린 곳이다. 젓갈거리로는 원조라 할 수 있다.

설도에서 젓갈이 생산된 계기는 19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도는 당시 와도(臥島)라는 조그만 섬이었으나 1930년쯤 일제강점기 설도 관문이 건설된다. 이 와중에 와도의 우리말인 누운섬이 눈섬으로 축약되고 이게 한자어인 ‘설도(雪島)’로 전인된다.

전국 젓갈 생산량의 27%, 전남 젓갈의 30% 가량을 생산하고 있다. 설도에서 맛 볼 수 있는 젓은 조개젓, 엽삭젓(송어젓), 황석어젓, 갯물토하젓, 오젓, 육젓, 잡젓, 북새우젓, 멸치젓, 짜랭이젓(병치새끼), 갈치젓, 명란젓, 창란젓, 오징어젓, 숭어젓, 까나리액젓 등이다. 이 중 대장급은 오젓과 육젓이다. 한 드럼에 수백만원을 훌쩍 넘긴다. 새우를 이용한 젓을 ‘백하(白蝦)젓’이라고 하는데 젓갈 상태의 새우색깔이 하얗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젓을 담그는 새우는 일반 새우와 달리 크기가 작고 껍질이 얇은 특징이 있다. 여기선 ‘젓새우’라고 한다. 새우젓은 3~4월에 잡는 ‘봄젓’, 5월에 잡는 ‘오젓’, 6월에 잡는 ‘육젓’, 가을에 잡는 ‘추젓’ 등으로 구분한다. ☞ W3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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